‘글의 사람’(김병기 화백 일대 13)

 

    졸업한 뒤 평양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그 사이 틈틈이 서울 나들이를 했다. 서울에 도착하면 지금의 충무로인 본정통으로 갔다. 거기 다방에 나가서 문우(文友), 특히 삼사문학(三四文學) 동인들과 자주 어울렸다. 술값은 태경의 몫이었다. 그때 사직동(각주 1)에 살던 서모가 용돈을 넉넉하게 주었던 덕분이었다. 그때 절간에서 나왔다는 한 시골 청년도 만났다. 서정주(徐廷柱 1915-2000)였다. 그의 첫 시집(<화사집>, 1941)을 냈다 해서 사보았다. 미국 여류 시인을 패러디했음을 당장 알아챘다(각주 2).

    태경은 그때 이미 대단한 독서가였다. 언젠가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일본의 국민작가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 1923-96)에 대한 내 독후감을 말했더니만 그에 대해 읽어본 바가 없다했다. 그래서 외국어 책방에 나가서 시바의 문고판 책 한 권짜리 <순사(殉死)>를 사드렸다. 책은 러일전쟁때 뤼순 요새 싸움에서 마침내 러시아군을 물리친, 그래서 일본 전역에서 군신(軍神)으로 받들고 있는 육군장수였는데, 나중에 충성을 바쳤던 일왕 메이지가 죽자 아내 시스코(靜子)와 함께 할복자살한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1849-1912)의 일대기다. 책을 갖다 준지 이틀 뒤엔가 독후감을 말하겠다며 만나자고 연락해올 정도였다. 일본 문고판 책인지라 활자 크기가 무척 작았음에도 이삼일 사이에 다 읽었다는 말이었다. 그만큼 빨리 읽어냈음은 평생의 독서습관이 없고서야 익힐 수 없던 습벽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화가를 일컬어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글의 사람(the man of letters)’이 분명하다는 말해왔다. 이 말을 받아 나는 다른 놈들에 비해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거든, 화가들이 책을 많이 읽지 않거든!”이라 말한 적도(김철효 2004) 있었지만, 오히려 그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당신의 소명은 글쟁이가 아니라 단연코 화가라는 사실을 꼭 앞세웠다. 미술 그리고 예술의 신사조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눌 만한 상대방이 대부분 문학가였기 때문에 청년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글의 인사들과 가까웠을 뿐이라 했다.

삼사문학 동인 친구들

    19349월에 창간되었다 해서 이름 붙여진 삼사문학(각주 3 참조)193512월 통권 6호로 종간된 격월간의 순문예 동인지인데, 조풍연(趙豊衍, 1914-91: 각주 4) 등이 창간했다. 3호 이후에 황순원(黃順元, 1915-2000) 등도 참가하였다. 동인들은 스무 살 안팎의 신인들로서 쉬르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문학사에서 항상 천재시인이란 관형사가 따라다니는 이상(李箱, 1910-37)도 삼사문학 동인이었다(각주 5). 193610월에 서구화된 문물에 익숙해지려고 시인은 무작정 도쿄로 왔다. 도쿄에 오기 직전의 그에게서 거기서 유학중이던 주영섭에게 며칠 몇 시에 도쿄로 갈 것이다!”는 전보가 날아들었다. 그때 주영섭은 김병기와 같은 아파트에 살았는데, 전자의 거처가 좀 좁았다. 그래서 김병기는 자신의 거처에다 이상을 며칠 재워주었다.

    얼마 뒤 이상은 도쿄에 실망했다며 서울로 돌아간다 했다. 하지만 서울 갈 여비도 떨어졌고 폐결핵이 악화된 데다 우울증에 걸렸음에도 햇빛이 들지 않은 싸구려 방을 얻어 홀로 은거했다. 직후 불령선인(不逞鮮人) 사상이 불온한 조선 사람이라 지목되어 체포됐다.

    그러나 병색이 깊어진 폐병 때문에 곧 병 보석되었다. 그리고 한 달 만인 1937417일에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죽었다. 이상의 부음을 듣고 급히 도쿄로 달려온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타계 직후 도쿄의 주오센(中央線) 요츠야(四谷) 지하철역 부근 도쿄학생예술좌에서 열렸던 이상의 추모회에도 나타났다. 시골아줌마처럼 생겼던 그이가 바로 변동림(卞東琳)이었고, 나중엔 김향안(金鄕岸, 1916-2004)으로 알려진 여인이었다.

    그 상황을 직접 목격했던 김병기는 그 뒤의 소식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변동림은 화장한 유해를 미아리에 있던 공동묘지에 묻었다(각주 6).

그때 동거여부는 모르겠고 다만 이상의 약혼녀로 소개됐다. 그 여인이 나중에 김환기의 아내가 되고 부터 우리들은 이전의 내력은 모두 흘려버리고 수화의 사모님으로 대접해 왔다. 나중에 보니 이상의 부인 행세도 하고 있지 않은가. 이상이 죽을 때 나에게 멜론을 달라는 말을 했다는 화두를 두고, 초현실주의 문학예술인이 멜론이 아니라 레몬이라 했다며 다투곤 했다. 레몬이라 했던, 멜론이라 했던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닌데도 향안여사는 그게 레몬이 아니라 멜론이라고 증명하고 나섰던 것. 자기가 우리 문학의 천재 이상 그리고 우리 미술의 천재 수화를 컨트롤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함인가. 우리가 그를 존중하는 것은 수화의 아내이기 때문이었지 않았던가.

    이상의 문학성에 대한 김병기의 시선도 극소수를 제외한다면 이상 시는 읽어내기가 어렵다.”는 문학비평의 말에 동감한다(각주 7 참조). 하면서도 김병기 나름의 미학도 펴고 있었다. “모르겠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중요하지 않은가. 이해했다 하면 그건 이미 기성(旣成)이 되고 만다. 예술은 아는 게 아니다. 납득하는 느낌이 예술이 아닌가. 느낌의 중요성으로 말한다면 음악이 제일 순수하다. 오로지 느낌이니까.”

 

각주 1: 지금 종로구 사직동 262-82번지에 있던 일명 도장궁인 도정궁(都正宮)의 별채에 아름다운 정자가 있던 연당집도 아버지의 서울 집이었다. 종친이던 도정(都正) 벼슬의 이하전(李夏銓 1842-62)이 조선조 후기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왕족 중 기개 있는 인물로서 왕위계승권자 후보로도 물망에 올랐다던데, 왕으로 추대됐던 전력이 바로 모반이었다며 사사(賜死)되었다. 집은 나중에 서울 화양동 건국대 구내로 옮겨져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 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각주 2: 피카소가 초상화(1905-6)를 그려준 것으로 유명한 미국 여류 문학가 스타인(Gertrude Stein, 1874-1946)장미는 장미가 장미다같은 형식주의 시를 패러디했다는 사실을 1941년에 출간한 그의 첫 시집 <화사집>을 읽고 금방 눈치 챘다. 스타인의 형식은 일본 근대시의 완성자 한 사람이라 일컫는 하기와라 사쿠타로(萩原朔太郎,  1886-1942)흰소녀, 흰소녀..” 이런 식으로 흉내 낸 적도 있었다. 서정주 또한 그의 시 <바다>귀기우려도 있는 것은 역시 바다와 나뿐./ 밀려왔다 밀려가는 무수한 물결 우에 무수한 밤이 왕래하나/ 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의 첫 연에 이어 마지막 연은 아라스카로 가라!/ 아라비아로 가라!/ 아메리카로 가라!/ 아푸리카로 가라!”로 끝맺는다. 전문적 평인즉, “이 시집에서 미당은 인간의 원죄의식과 업고를 주제로 악마적 관능의 세계를 파고들어 한국의 보들레르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각주 3: 발간은 연희전문을 중퇴한 신백수(申百秀, 1915-46)의 출자(出資)라 했는데, 황순원의 제2시집 골동품 (1936)도 그가 도쿄에서 발간했다.

각주 4: 조풍연은 연희전문 재학 때 삼사문학(三四文學) 동인이던 문청(文靑)’이었다. 그 뒤론 매일신보 기자를 시작으로 한평생 언론계에서 일했다.

각주 5: 20대 초반 알게 된 곱추 화가 구본웅(具本雄, 1906-53)은 야수파적으로 이상 초상화를 그렸고, 기생 금홍과 알게 되면서 함께 다방 "제비"를 개업했다. 이후 이화여전 출신 변동림과 결혼했다.

각주 6: 무덤을 돌보는 이가 없었던 데다 625전쟁 뒤 미아리 공동묘지가 사라져버려 묘소도 유실되고 말았다. 변동림 아니 김향안의 출연으로 1987년에 시인의 모교인 보성고등학교 교정(방이동 소재)울시 송파구에 재미 조각가 한용진(韓鏞進 1934-2019)의 작품으로 이상문학비를 세웠다.

각주 7: 방대한 시를 남겼지만 우리말의 우리말다운 구사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그에 대한 비평의 하나다(유종호, <시란 무엇인가>, 1995, 68-77).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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