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집, 전업작가 작업실(박경리 39)

 

    돈암동 셋방살이에서 박금이, 아니 등단을 계기로 장차 필명 박경리로 살아갈 작가는 정릉동 골짜기로 이사했다. 임인년(1962)에 적었던 당신의 신변 글로 추정하면 정릉시절의 시작은 19599월이었다.

    당신의 행보는 고비마다 호사다마(好事多魔)였다. 19577, <불신시대>로 현대문학 제정 제 3회 신인문학상을 받던 날, 셋집에 불이 났다. 여관으로 일단 피신했던 처지에서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장만한 정릉집은 서울살이 안착의 요람(搖籃)이라 치부할만했다.

아이를 잃고 불의의 화재를 당하고 가난과 절망, 그러한 고통스런 기억 밖에 없는 돈암동에서 봇짐을 싸고 정릉 골짜기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삼년이 지나가고 이제 사 년으로 접어들려 한다(“빛과 서재와”,Q씨에게, 지식산업사, 1981. 211쪽 이후).

90평 가까운 뜰을 가진 독()집을 갖는다는 것은 대견하고 고마운 일이겠으나 새로 지은 부흥주택이라 구석마다 벽돌조각, 양회부스러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삭막하기 그지없었다(“초하정릉촌부”,기다리는 불안, 현암사, 1966, 24-27).  

     박경리의 정릉집(정릉동 768-2)은 정릉천변이었다. 일대는 해방 후 한참까지 서울 변두리 한촌(閑村)이었다. 이를테면 경성제대를 나온 뒤 1947년에 서울대 사학과 조교수로 뽑힌 김성칠(金聖七, 1913-51)이 서울권역에서 농촌생활이 가능하다며 이른바 밭엣집을 마련했던 곳이 바로 정릉골짜기였다. 6.25때 피난을 못간 내력, 그래서 잔류파가 될 수밖에 없었던 탓에 나중에 곤욕을 치렀던 체험을 글로 남겼던 바로 그이였다(역사 앞에서: 한 사학자의 6.25 일기, 창작과 비평사, 1993).

자생적 문예인촌

    태조 이성계 계비(繼妃)의 무덤인 정릉 너머, 북한산 보국문 쪽으로 개울을 따라 올라가며 생겨난 동네였다. 정릉유원지로 불리기도 했던 일대는 경국사(慶國寺)와 청수장(淸水莊)이 랜드마크였다.

    고려시대에 세워졌던 경국사는 정릉에 묻힌 이를 모시는 원찰(願刹)이었다. 우리 현대사의 최대 사건이던 6.25 전쟁의 휴전을 맹렬히 반대했던 이승만 대통령을 선무하려고 닉슨 미국 부통령이 방한했다. 외빈 접대 차원에서 우리 사찰문화를 보여주려고 195311월 중순 서울 근교의 가장 정리 잘된 절을 찾게 했다. 과연 닉슨이 남긴 회고록에도 경국사에 갔던 경험이 한국 방문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적었다(“이승만과 닉슨 경국사 방문,” 법보신문, 2018.3.20).

    청수장은 1910년대에 세워져 일본인 별장으로 이용됐다가 해방 뒤 고급 요정으로 탈바꿈했다. 1974년 이후 제법 기품 있는 음식점, 여관으로 운영되었고, 2001년부터 국립공원 북한산 탐방안내소로 바뀌었다.

    일대는 종전 이후 한동안 쟁쟁한 문인·예술가들이 정릉시대를 구가했던 문예촌이기도 했다. 전쟁 직후 무주택자 김병기(金秉騏, 1916- ) 화백의 회고에 따르면, 행적이 모호했던 그 며칠 사이 또순이아내가 무허가 하꼬방을 완성했던 그런 동네였다. 자별하게 지냈던 박고석(朴古石, 1917-2002) 화백의 거사에서 자극을 받았던 자구책이었단다. 마침 씨알 좋은 사나이로 소문났던 당신 인품답게 박 화백은 무뚝뚝하나 담담한 1955년 이곳 입주 회고담을 남겼다. 화가는 이웃사촌 경리 작가의 1961경향신문연재소설 노을진 들녘삽화를 맡기도 했다.

정릉으로 이사해 온 지도 벌써 네 해가 흘렀다. 군색한 살림살이를 메워보려던 마누라의 갸륵한 곗놀이가 튕겨지며 밑바닥이 들여다보이던 우리네 살림살이가 송두리째 무너졌다. 오도 가도 못하고 정릉으로 쫓겨나온 셈이다.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서면 용기도 나고 꾸려나가는 힘이 저절로 생기는 모양이다. 삼천 환짜리 셋방살이로부터 천막 살림으로 이럭저럭 고생도 무척 했거니와 작년 봄 만용을 일으켜 열 평 남짓한 내 집을 지었다.

대지는 오래 살던 동네 어른이 걱정해 주었고 재목 값이 약 이십만 환 들었을 뿐 절반 이상이 내 손과 자주 드나드는 제자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판잣집은 틀림없으나마 제 법 내 집이라서 그렇고 뜰이 한 이백 평 남짓하니 아이 새끼들의 마음대로 뛰노는 꼴도 제법이요 금년에는 코스모스를 비롯하여 국화에 이르기까지 가지각색의 꽃을 즐길 수 있어 십상 좋다.

이리하여 시내에서 쫓겨난 팔자치고는 상팔자로 봄이 오면 살구꽃, 복숭아꽃이랑 제법 흥취를 주며 여름철에서 가을까지는 가지, 토마토, 오이, 호박을 비롯한 김장거리까지 싱싱한 야채가 내 손으로 가꾸어지며 이루어지는 재미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가 변하여 복()이 될 줄 그 누가 알랴. 불편하기 그지없는 그 변두리 삶이기는 하나 전원생활이 골수를 파고드는 듯 또한 각별한 느낌을 아니 느낄 수 없다(“단풍은 무르익고”,세계일보, 1958.11.17; 박고석과 산(도록), 마로니에북스, 2017).

당호(堂號)도 생기고

     박경리에게 정릉집은 전업 작가생활을 본격으로 시작했던 이른바 땅집이었다. 외동딸 가족이 살고 있는 강원도 원주 땅으로 1980년 이사할 때까지 살았다. 집은 대소 작품을 다수 완성한 창작의 산실이었다. 특히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 출간했고, 1969년에 월간지 현대문학에 처음 연재하기 시작했던 대하소설토지3부까지 완성한 곳이기도 했다.

심산유곡이랄 것은 없지만 지대가 좀 묘하게 되어서 당분간은 판잣집이 들어설 염려도 없고 무슨 명함과 결탁하여 불하될 가능성도 없는 산이 내가 사는 집, 뜰 안에 있어 늦은 밤, 등 너머 절에서 들려오는 맑은 목탁 소리라도 듣는 때면 내 몸이 심산유곡에 있는 듯 한 착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어느 날의 망상”, Q 씨에게, , 1993. 141).

     집은 가족 사생활이 보호되는 피신처이면서 함께 가족 중에 누군가 생업을 꾸릴 경우 작업장구실도 한다. 집이 앉은 자리 주변이 주거환경인데 당신은 그걸 이렇게 그려놓았다.

언젠가 한번 나를 찾아주신 선배 P여사께서 우리 집을 선화장(仙華莊)이라 이름 지으시고 P여사의 자택을 진풍사(塵風舍)라 하셨다. 집은 신통할 것도 없는 후생주택이지만 뜰에 꽃이 있고, 시시각각 음영을 달라하는, 마치 청전(靑田) 선생의 그림 같은 산수가 배경하고 있으니 아마도 P여사께서는 과분한 이름을 붙여주신 모양이다. 하기는 일간초옥이라도 풍류가 있고 유유자적하는 야인의 집이라면 어찌 값어치가 있을 수 없는 옥호(屋號)에 인색하랴. 하지만 심정에 풍류가 메마르고 세상일에 아직도 집념이 태산 같은 범속한 내자신인만큼 그런 마음의 선물이 황송하기만 하다. 세세년년을 하루같이 근심에 해가 저물고 근심에 날이 밝는, 그래서 감성은 닳아진 나사처럼 예리하지만 쓸모없게 되어 버린 일을 생각하면 차라리 아름답고 적막한 이 자연은 내개 있어서 하나의 불협화음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전원으로 향하는 마음,”Q씨에게, 1981, 239-40).  

     글머리에 당호(堂號)를 지었다는 ‘P여사는 정릉천변 이웃사촌 박화성(朴花城, 1904-88)소설가를 말함이었다. 후배의 누옥을 저택이란 뜻의 ()’이라 이름 붙였음에 반해 당신 집은 사() 누추한 집으로 낮추어 말했음에서 후배 작가에 대한 좋은 문학적 평가가 느껴졌다. 사족으로 나도 작가의 집이 자리한 일대의 지리에서 잠시 살았던 적이 있었다. 1969년 봄 결혼-분가로 새 본적지로 삼았던 곳이 바로 청수장 바로 아래의 정릉동 806번지 시민아파트였기 때문이었다. 돈암동 쪽에서 아리랑고개를 돌아 넘어서 고개에 올랐다 싶으면 문득 정릉 골짜기 초입에 펼쳐지던 풍경이 지금도 내 기억에 선연하다.

    선배 여류작가의 평가대로 문단에 등단한 전업 작가가 되고부터 박경리는 무섭게많은 글을 적었다. 작품목록이 말하듯, 1956년 등단한 이듬해인 1957년에 단편 다섯, 1958년에 2회로 분재한 작품을 포함해서 단편 일곱, 1959년에 단편 넷에 장편 연재 하나(표류도), 그리고 특히 1960년부터는 월간지와 신문 매체를 위한 연재가 폭주했다.

    “등짐장사가 짐을 받아도 걱정, 안 받아도 걱정이라 했다. 안 받을까봐 마음 조렸을 걱정도 잠시, “써야만 할 원고 때문에 마음은 항상 꽁지에 불붙은 것처럼 바쁘고 초조해서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만도 했다. 여기저기 받은 글 청탁에 치이는 사이, 식욕을 아주 잃어버릴 지경이었다 

하여간 오늘의 일은 끝났습니다. 아마 마감 시간까지 원고는 도착할 거예요. 그리고 한 달이 지나면 신문사의 기자 월급만큼의 고료를 받게 되겠지요. 후원자를 바랄 수 없는, 모두가 가난한 이 나라에서 글을 써 가지고 생활을 꾸려나간다는 것은 정말 내깐에도 대견한 일이라고 생각하지요(“어떤 순간에”, Q씨에게, , 1993, 200-201). 

     전업작가 박경리의 하루하루는 보람이면서도 과로의 연속이었다. 해서 낯이 선 장소에선 아무리 음식이 좋아도 못 먹고 집에 돌아와 찬밥을 찾는 신경질, 감정이 조금만 흔들려도 식욕이 없어지는 신경질에 시달리고 있었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 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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