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고양이에게도 푸념을(박경리 33)

 

    세상에 이처럼 경우 바른 사람도 드물었다. 전쟁이 터진 그 불난장판인데도 동네 구멍가게를 찾아 외상값을 갚고서야 피난길에 올랐으니 더 이상 뭘 말할 것인가. 금이의 어머니 김용수 여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경우의 제대로 된 글말이 경위(涇渭)’인 것. “사리의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이란 뜻이다. 이만한 경위의 주인공인데도 그처럼 박복한 이 또한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든 경우였.

    우선 얼마나 오래 전부터였던 지는 확인 못했어도, 자랐던 친정은 오빠가 진작 아버지 대신의 호주였다. 자식에게 반복(半福)을 태워준다는 아버지 부재의 성장기였다는 말이었다. 이 지경에서 아버지 자리 같은 형 또는 오빠라는 뜻이기도 한 부형(父兄)인 오빠의 사람 구실, 본디 말뜻과는 전혀 달리, “인생을 노름판에서 탕진한인성장애였음이 훗날 작가로 대성한 금이의 회고였다(서사시 <외할머니>).

    이 역경 또한 성가 직후에 직면했던 낭패에 견주면 약과였다. 정말 소설 같은 일이 벌어졌다. 여자행복의 결정판이 좋은 배필의 만남이라 여기던 그 시절의 기대가치와는 정반대로 결혼 직후 바로 신랑에게 까닭도 모르게 소박을 맞았던 것. “연분은 억지로 안 된다는 말이었던가

 

생과부가 따로 없었다

    그럼에도 신랑 성씨(姓氏) 일족으로 살아내려 했으니, 말하자면 생과부 신세 자청이었다. 그런 홀대 중에 용케도 처녀 수태처럼 얻은 일 점 혈육 금이는 불가피 편모슬하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고, 어머니의 남편 원망은 가히 태생적으로 딸도 따라할 소지였다.

    반작용으로 어머니는 과잉 엄호할 개연성인데, 이게 정작 오히려 부메랑처럼 며느리가 미우면 손자까지 밉다고 홀대 받는 어머니도 밉다는 식이 되고 있었다. “인종(忍從)과 희생정신으로 살아온 못난 어머니를 나는 미워하는 것이다.”(“식구와 두 개의 외곽,” Q씨에게, 지식산업사, 1981).

    남편의 내침을 당해 생과부 신세로 자립경제를 꾸려가려고 여러모로 발버둥이었다. 바느질은 물론이고 옷감 장사도 해보았다. 작가의 성장소설로 지목받는환상의 시기(1966; 나남, 1994, 227-8쪽 압축)에 따르면 살길을 찾아 동생네 집이 있는 시골에 이사짐을 풀었던적도 있었다. 그때 금이는 통영초등학교의 벽지 분교로 전학 갔다가 다시 본교로 돌아왔다는 말도 소설에 나온다.

    일제 때의 초등교육은 보통학교와 간이학교 2종이었던 바, 분교는 간이학교 시스템을 따랐다. 보통학교는 지금으로 치면 특목고였고 간이학교는 일제에 충실한 농민 양성 학교였다. 간이학교는 문자해독, 농사기술 정도만 가르쳤는데 이마저도 부실했다. 보통학교 학생들은 간이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무시했다(노익상, 가난한 이의 살림집, 청어람미디어, 2010). 이 점에서 간창골 아저씨가 금이의 앞날 교육을 염려했던 것.

너를 여기 보통학교에 전학시키기로 했다. 아저씨하고 의논했는데 기부금을 내면 될 거라고, 아저씨가 오학년 담임선생님을 만나 보기로 했다. 돈에 무서운 엄마로서는 여간 용단이 아닐 수 없었다. 민이(民怡, 어린 금이)의 전학문제를 내내 아버지에게 미루어온 그였던 만큼, 민이에게는 오빠처럼 젊은 아버지였고 어머니에게는 동생같이 젊은 남편이던 민이 아버지는 당시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딸을 둘이나 낳고 딴 살림을 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누님은 좀 무관심했어요. 상급학교에 보낼 아이를 시골구석에 처박아 놨으니, 벌써 오학년 아닙니까?“ 어머니는 울기 시작했다.

(간창골) 할아버지는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 죽일 놈이지, 죽일 놈. 본가 박대하고 지 신상이 뭐 좋을꼬?”

      생과부 신세인 그런 어머니에 대한 홀대, 이를 넘어 배반은, “()은 안에 있었다는 영화대사처럼, 친정 식구도 한몫했다. 적어도 1950년대까지만 해도 문화인류학적으로 탈취혼(奪取婚)이라고 시집의 노동력 확보 일환으로 여겨 신부 쪽 결혼비용도 신랑 쪽이 전담하다시피 했던 경상도 쪽 전래 혼인풍습에 따라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보내온 금전과 물품 등의 예단(禮單)을 금이의 외할머니가 빼돌려 큰 외삼촌 혼례에 전용했음은 친정의 오랜 궁핍 때문이었다 치자. 그래도 어머니와 갈라선다는 조건으로, 말하자면 위자료조로 금이 아버지가 마련해준 집을 외할머니가 외삼촌의 노름빚으로 날려버렸다는 사실은 김용수 일생일대의 포한이었다.

    차츰 자라서는 스타일 차이라 할까, 성정의 차이로 모녀 사이의 의견충돌이 다반사가 되고 말았다. 이를테면 “... 옛날에 내가 꽃을 심었을 때/ 옷 나오나 밥 나오나 하면서 어머니는/ 꽃모종을 뽑아 버리고 상추씨를 뿌렸다는 식이었다(서사시 <소문>).

    당신 어머니의 일대는 굶지 않는 생존(生存) 지상이었고, 그 딸은 일상의 팍팍한 틈새로, 살아가는 기쁨 곧 생락(生樂)을 좇을 처지는 절대 아니었지만, 어쩌다 아름다움도 곁눈질해보겠다는 생활(生活)의 의욕수는 간절했다. 현실에 다소 타협하고 굽히면서도 생활은 흔들리지 않으려는 것이 어머니 방식이었음에 견주어 상대적으로 그 딸 금이는 현실에서 사회적 불신을 만날 때마다 더욱 자신의 신체적 그리고 심리적 영역 안으로 도망치는 비사회성을 쌓아갔다.

    이게 딱하다며 어머니는 딸에게 곧잘 뒷소리, 앞소리로 흘려 말하곤 했다. 토삼 뿌리같이 혼자 살끼다,” 너 토란뿌리처럼 혼자 살아라.”하기도 했단다. 작가에게 토삼인가 토란인가 내가 물은 적도 있었는데, 당신도 모른다 했다. 실제로 토삼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어머니는 그런 말도 했었다고 글로도 적었다(원주통신, 1985, 96). 그 말에 토란(土卵)은 감자 같이 생긴 필마단기(匹馬單騎)같은 뿌리인 것이, 절대함량부족의 내 식물 식견에 겨우 말한다면, 대나무 번식이 그러하듯 뿌리가 서로 얽혀서 뻗어나가는 군마횡대(群馬橫隊)와 대조된다는 그런 말이 아니었을까 혼자 생각한 적은 있었다.

이야기꾼 어머니

     소설가는 속된 말로 이야기꾼이다. 박경리의 그 기질은 어디서 왔을까.

고담 마니아였던 나의 친할머니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구두쇠였지만 조웅전, 대봉전, 충렬전, 옥루몽, 숙영낭자전 웬만한 고담 책은 돈 아끼지 않고 사서 소장하고 있었다. 글을 깨치지 못했던 할머니는 이따금 유식한 이웃의 곰보 아저씨 불러다 놓고 집안 식구들 모조리 방에 들라 하여 소위 낭독회를 열곤 했다. 책 읽는 소리는 낭랑했고 물 흐르듯 듣는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그리하여 밤은 깊어만 갔다. 내 어머니도 글 모르는 까막눈이었지만 고담 마니야였을 뿐만 아니라 책 내용을 줄줄 외는 녹음기였다. 어느 여름날인가 지금도 생생한 기억 동네 사람들이 모여 물맞이하러 가던 날 (중략) 어머니는 택시비도 내지 않았고 아무 준비 없이 나만 데리고 동행했다. 그러니까 이야기꾼으로 모셔 간 셈이다. 구성진 입담에다가 비상한 암기력 그것이 어머니에게는 사교적 밑천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과 어우러져도 노래 한 자리 할 줄 몰랐고 춤을 추며 신명 낼 줄도 몰랐고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심지어 농담 한마디 못하는 숙맥이었다. 아마 그러한 점을 조금은 내가 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이야기꾼>, 밑줄은 필자의 것).

만일 나도 소설을 쓰지 않았더라면 어머니처럼 이야기하기를 좋아했을 겁니다. 지나가는 행상의 옷소매를 잡았을 거고, 강아지나 고양이를 들볶았을 거고,..

나의 어머니는 누구든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심지어 지나가는 행상까지도 머무르게 하여 이야기하시기를 좋아하지요. 기뻤던 일보다 슬펐던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성싶었습니다. 하기는 기뻤던 일보다 슬픈 일이 더 많았던 생애였으니까 그랬을 테죠. 사람을 만날 수 없었던 날이면 나의 어머니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상대로 푸념도 하시고 짜증도 내시고 때론 야단을 치기도 하죠. 얼마나 외로운 풍경입니까?(Q씨에게, , 1993, 12-3)

글 쓰는 것이 무언지 모르고 원고료만 챙겼다. 어머니가 어디 가서 점을 치면 하늘에서 문서를 많이 가져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돈을 연상했지만 그게 모두 원고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 작가의 외동딸 김영주의 변을 직접 들을 차례다. 바로 윗대 모녀에 대해서 말이다(김영주, 어머니”, 박완서 외 17, 수정의 메아리, 1995, 175-184).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갈등을 보고 자랐다. 아집이 좀 강하셨던 분이기는 하지만 밖에서는 늘 경우 바르고 정직한 분이셨는데 어째서 어머니에게만 그다지도 경우가 없으셨는지 모른다, 외할머니가 당신의 불행, 외로움을 어머니와의 갈등 관계 속에서 해소하고 계시는 것이었다.

    나는 이쯤해서 큰 의문점을 하나 갖고 있다. 어머니 김용수가, 위에 인용한 작가의 말대로, 과연 글 모르는 까막눈이었을까? 한때 피륙장사도 했다는데 그렇다면 셈은 했단 말 아닌가. 대학 동료교수의 어린 날인데 절대가난의 까막눈 아버지가 산수, 곧 셈을 잘 하는 초등학생 아들을 보고 학교를 마치자 말자 장사를 하는 게 좋겠다고 권면했을 정도로 무학은 셈을 못했는데, 이와 달리 셈을 했을 정도이면 그 어머니도 띄엄띄엄 한글 소리는 낼 줄 알았지 않았을까.

    고향에 지금도 할머니들을 모아다가 한글을 가르치는 의인(義人)을 나는 알고 있다. 시내버스 타기와 은행출입이 자유로워졌다는 그 야학 수료자들의 말을 보람으로 만끽하며 아들가족이 사는 외국은 단 한 번도 나가보지 않았단다.

   아무튼 줄곧 박경리 가족의 가계살림을 맡았던 사이로 원고지 노동으로 살아가는 가장이 펴낸 수많은 소설에서 적어도 제목은 소리 낼 줄은 알았을, 김지하 시인이 ()할머니라 부르던 김용수 여사를 까막눈이라 했음은 좀 어폐가 있다 싶었다. 아들이 학자인데 그 글을 못 읽는다고 한탄하던 무학의 내 어머니도 신문에 나온 아들 글 제목만은 읽은 뒤 잘 간직해두곤 했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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