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타인 같았다(박경리 31)

 

    금이의 아버지 박수영(朴壽永, 1909-52)은 결혼 초부터 따로 놀았다.” 혼례라는 성인식은 1922년에 올렸지만 이 열네 살 신랑에겐 아직 성인의식은 기대할 수 없었던가. 반면, 열여덟 신부 김용수(金龍守, 1905-75)에겐 자식 배태 염원은 본능이었다. 신랑이 범방(犯房)에 뜻이 없자 집안이 나섰다.

나의 생년월일은/ 1926년 음력 1028일이다/ 한국 나이로 하자면/ 아버지가 18세 어머니는 22세에/ 나를 낳았다// 가난했던 외가였지만/ 혼인한 지 사오 년이 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는 딸자식을 근심하여/ 이웃에 사는 도사/ 그러니까 축지법을 쓴다는/ 황당한 소문이 있는 도사에게/ 자식을 점지해 달라고/ 외할머니가 부탁하여/ 덤불산제(山祭)를 올렸다는 것인데/ 그것이 영험으로 나타났던지/ 바람 잡아 나간 아버지가/ 섣달 그믐날 난데없이 나타났고/ 어머니는, 어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두 눈이 눈깔사탕같이 파아랗고/ 몸이 하얀 용이 나타난 꿈/ 그것이 태몽이었다는 것이다...”(박경리, <나의 출생>).

    “바람 잡아 나간박수영은 일찍 딴살림에 뜻을 두었다. 호적에 올린 첩사이에게서 소생이 줄줄이 났다. ‘기봉이네였다. 모두 51남을 생산. 맏이는 1930년에 났다가 이듬해에 죽었기 때문에 실질적 맏이는 둘째 계봉(溪鳳, 1933년생)이었다. 해서 새 여자를 부르는 택호(宅號)기봉이네였다. 경상도 사람의 복모음(複母音) ’짧은발성법으로 로 읽혔고 들렸다(복모음 발음의 부실을 모를 리 없었음에도 작가는 당신 딸 영주를 이름할 때 언보네라 했다. 당신의 지극한 사랑이던 큰 외손주 원보가 언보로 불렸던 것). 이 택호가 박경리의 글에 더러 나오다. 이를테면 산문시 <어머니가 사는 법>에서 나는 어머니가 목청을 돋우어 남과 다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삐거덕 거리기 마련인 기봉이네하고도 다투는 것을 못 보았다.”고 적었다.

    계봉의 여동생은 계련과 계림이었다. 계봉은 계곡 ()”인데, 그 아래 형제는 계수나무 ()”. 신고자 또는 호적 담당 공무원이 한자를 혼동해서 항렬의 우리말 소리는 같으나 다른 한자를 이름에 올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내 아내 여형제 이름의 끝 글자 항렬이 인데 으로 호적에 달리 올랐음도 바로 그런 경우였겠다). 막내딸은 항렬 를 따르지 않았다.

껄쩍지근 부녀 사이

    박수영의 기업가 정신은 한참은 잘 나갔다.” 새터(매립지: 지금의 서문시장 일대)’에서 통영에 하나뿐인 화물차 차부(車部)를 운영했다. 통영에서 생선을 실어 진주로 보내고 거기서 과일을 싣고 오던 화물차의 차주였다. 차부 살림집에서 금이의 아버지는 '기봉이네와 딴살림을 차렸다.

조강지처를 버리고 재혼했었던 만큼 딸에 대하여 죄책감도 있었겠고, 너무나 젊은 아버지였었기에 평소 딸을 어려워했다. 성미가 불칼 같았고 조금은 낭만적이며 우승컵 같은 것도 받은 적 있었던 자전거 운동선수의 경력, 그리고 미식가이며 의복에 까다롭든 아버지의 강한 기상은 아무도 껐을 수 없었지만 어릴 적부터 따지고 드는 나에게 만은 거북한 듯 침묵을 지켰던 아버지였다(원주통신,1985, 91-93쪽 발췌).

    이후 모험심이 강했던 박수영은 만주로 건너갔다. 신경(新京: 오늘의 중국 길림성 장춘)에 가서 먼저 목재상을 했다. 1940년 거기서 외아들도 났다. “신경에 와서 공장을 처음 차렸을 때 홍이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밤낮을 모르고 일을 했다.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고 그들과 어울려 밤을 새워가며 술도 마셨다는 소설 이야기의 홍이는 바로 작가 아버지의 분신이었다.

    목재상으로 번 돈이었던가 기봉이네가 통영에 왔다가 금붙이를 사갖고 돌아갔다. 한데 이 거래가 탄로 나서 형사들이 만주로 들이닥쳤다. 통영으로 압송된 기봉이네를 남편이 따라와서 뒷바라지했다. 이 줄거리의 각색이토지 5(2, 115)밀수사건이다. 1941년 정초 홍이(이용의 아들 이홍)와 보연이 금부치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만주 신경에서 조선에서 건너온 형사들에게 피체압송되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믄 조선서는 금 가진 사람들 모두가 국가에다 금을 팔아야 하고 개인이 금을 가지는 것을 금한다. 그러이 위법이다 그거지. 그리고 금을 나라 밖으로 실어내는 것 역시 위법이라, 밀수라는 거지. 거러니 통영서 니 어무이한테 금을 판 사람이 적발되고 보니 자연 모든 사실이 밝혀져서.”

    이어 자동차 서비스공장도 했고, 영화관도 경영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일군 사업도 급히 접어야 했다. 상해로 가서 귀국선을 타려니까 가진 돈은 한 푼도 못 가져간다 해서 매일 돈 잃기 도박도 했던 풍류객이었다. 625 이전에 갖고 있던 통영에서 제일 빠른 유람선도 전쟁이 나자 군대 전령선으로 징발되었다.

    해방 이듬해 1946, 기봉이네 김보금(金寶今, 1911년생)이 병사했다. 집안인심이 다시 본부인과 살아야 한다는 쪽이라 합가는 했다. 결국 잠깐이었다. 특히 아내에 대한 아버지 스타일이 돌아서면 불쌍하고 면대(面對)하면 못견뎌했다.” 서로 안 맞다며 어머니 김용수는 다시 딸네 금이 집으로 돌아갔다.

    625때 피난 간 고향에서 금이가 다시 만난 아버지 박수영은 몹시 불우했다. 만주에서 빈손으로 나온 데다 소생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했고 상처(喪妻)까지 했다. 가족을 데리고 통영에서 부산으로 떠난 것은 금이가 피난간지 얼마 안 된 1951년 말이었다. 새로 얻은 둘째 소가(小家)와 전실(前室) 아이들(기봉이네 소생)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통영까지 들렸다.

피난 때 이복동생이 우리 집으로 도망을 왔어요. 아버지가 달아난 아이를 데리려 오셔셔는 들어오는 길로 매를 찾으셨는데, 내가 지게꾼도 자식들 공부를 시키는데 넥타이 맨 신사가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무안을 줬어요. 아버지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거죠.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로부터 자를 들었어요. “이면 경계 다 아는(이것저것 다 이해할)애가 애비한테 그런다는 것이지요. 나중에 제가 미제담배 한 보루를 사서 건네드렸는데, 아버지도 그런 말을 쓰신 게 스스로 놀라셨는지 술을 자시고 오셔서 괜히 어머니더러 야단을 하셨어요... 그러고부터는 아버지가 타인 같았어요. 부산에서 아버지가 타계하실 때도 저한테 부탁하시고 싶은 게 있었겠지만 저는 죽어도 임종에 가기 싫어 안 갔어요. 내 자신도 어쩔 수 없었어요. 미워한 것은 절대 아닌데 대면하기 싫었어요“(최일남, “박경리 문학대담”,신동아, 199410).

    1952년 연말, 아버지 박수영은 위암으로 타계했다. 그 소식을 듣고도 금이는 장례에 가지 않았다.

아버지 사랑의 흔적

    금이의 성장사는 한마디로 아버지 부재였다. 마음에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래 동안  증오의 대상이었다.

저의 원래 기질은 내성적인데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에 생긴 남성들에 대한 적개심은 좀 있지요. 그라고 집안에서 제가 제일 큰 손녀니까 우대를 하거든요. 나중에 들어온 여자(기봉이네)가 저한테 좀 잘못하면 집안에서 야단이 났고 그러다보니 굉장히 오만한 기질로 자란거지요(최일남,전게서)

    해도 증오 기류 한쪽엔 사랑까진 아닐지라도 연민은 알게 모르게 깔려있었다. 진주고녀를 다닐 때 당신 운운하며 편지를 썼더니만 학교까지 친척 아저씨를 데리고 만나러 왔다. 아저씨가 먼저 와서 너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 해서 나갔더니 선물을 금패(金牌: 금촉) 만년필을 사들고 왔다.“던 일화라든지, 만주에서 사업을 하던 시절 아버지는 품에서 곧잘 큰 딸 사진을 꺼내서 주변에다 자랑하곤 했다는 이야기를 나를 포함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말해줄 때는 얼굴에 화색(和色)이 감돌았다. 이 이상으로 피색(皮色) 곧 외모가 당신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도 주저하지 않았다.

    작지만 의미 있는 아버지의 거동도 기억될만했다. 박수영과 김용수가 결혼식을 올렸던 1922년은 근대호적제도가 아직 도입되지 않았다. ‘조선호적령’(192212월 공포)이 시행에 들어갔던 것이 192371일에 이르러서였다. 이 제도로 말미암아 이전에 여자는 호적부에 종종 성()만 기재하고 이름은 사용하지 않던 구습이 사라졌다. 그만큼 여성 지위의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지만(최홍기,한국호적제도사연구, 1997. 191) 신부를 신혼 소박데기로 만든 채 혼인 신고할 용의가 없었던 신랑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갓 출범한 새 호적제도의 시행 곧 그 사회적 정착이 걸음마였던 틈새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

    1931511, 대신 딴 살림을 차렸던 김보금을 정처(正妻)로 삼아 혼인신고를 마쳤다. 거기에 그 소생들이 연이어 기재되었다. 맨 마지막에 맏딸 박금이가 올랐다. 마치 서출(庶出)처럼 적혔다. 하지만 거기 출생난의 어머니 자리는 금이의 생모인 본처 김용수 이름이 정직하게 적혔다. 이런 엎치락뒤치락 속에서도 박금이에 대한 집안 맏이 대접은 엄연했다는 말이었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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