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때 마주친 판타지(박경리 30)

 

    19508월 중순은 남반부 적화통일의 성공을 눈앞에 둔 듯 마산·진해를 겨냥한 북괴군 공세도 막바지로 치닫던 시점이었다. 그 침공군을 따라온 종군작가 한 사람은 예사작가가 아닌, 일제 때 이광수만큼이나 문명(文名)이 높았던 동경제대 독문과 졸업의 평양 출신 김사량(金史良, 1914-50)이었다. 공격 산꼭대기에서 종군기를 적어나갔다.

바다가 보인다. 거제도가 보인다. 바로 여기가 남해바다이다. 진해만을 발아래 굽어보며 마산을 지척 간에 둔 남쪽하늘 한끝 푸른 바다가의 서북산 700 고지 위에 지금 나는 우리 군대 동무들과 같이 진중에 있다.... 미제와 그 괴뢰들이 철옹성같이 가로 막았던 38선을 가슴 답답히 앞에 두었을 때는 그렇듯 까마득한 외국의 남방 땅처럼 생각되던 사시장철 대나무 숲이 푸르던 마산 땅에 우리 영웅적 00 부대는 잘도 당도하였다. 바로 그 바다가 그 옛날 우리들의 리순신 장군이 왜적들의 함대를 전멸시킨 영웅의 바다다.

 

    영웅의 바다 그 한산도 통영도 잠시지만 인공치하에 들고 말았다. 침공군의 공세가 마산 서북방 서북산에서 일진일퇴하던 사이, 거의 무방비였던 통영반도를 먼저 점령한 뒤 거제도를 돌아 마산항과 진해만을 봉쇄하려했다. 드디어 북괴군이 817일 새벽 통영시내로 들어왔다. 한데 이틀 만에 한국해병대가 반격의 상륙작전에 성공했다. 이 공방전 전후로 통영사람들은 적잖이 부산으로 피난 갔다. 19509월 중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 알려지자 잠깐의 인공시절에 환영대회 개최를 주도한 사람들에 대한 보복극이 통영에서도 벌어졌다.

불시에 돌아온 고향땅

    인공치하 소란도 훨씬 지난 1951년 봄이었던가, 떠났던 고향을 6년 만에 박금이도 불시에 돌아왔다. 이 해 연말 부산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통영에서 살고 있었던 아버지가 쪼그려 든 살림일망정 사지(死地)를 살아 돌아온 장녀를 위해 탕약을 달려주는가 하면 어렵사리 가게도 얻어주었다. 호구지책으로 실, , , 잡화 등도 파는 수예점인가 양품점인가를 열수 있었다. 서문시장 바로 위, 그러니까 예와 같이 지금도 통영 도심 한 모퉁이인, 항남동 오거리였는데 좁은 동네라 금방 소문이 났다. 통영으로 시집왔던 진주고녀 동기생이 서둘러 달려왔다.

고향인 통영으로 갔습니다. 미군 담요로 몸빼를 지어 입고 아버지가 마련해준 조그마한 가게에서 양품점을 차렸을 때 멍하니 거리를 바라보며 쇼팽의 장송곡을 듣곤 했습니다(박경리, “다시 Q씨에게 2”, 1981).

어수선한 어느 날 시장에서 다른 친구를 만났는데 하는 말이 지금 금이(경리)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어머니와 같이 서울서 와 있는데 혼자 몸이 되었단다.”라는 슬픈 소식을 들은 나는 그 길로 곧장 찾아가보니, 전쟁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좋은 집과 많은 재물을 두고 맨손으로 내려오다시피 하여 모두가 어려운 처지라 그녀도 다름 아니었다.... 진정 목이 메이게 한 것은 그녀의 하얀 소복 차림이었다. 이다지도 젊고 고운 사람이 미망인되어야 하는가. 그때의 우리들의 나이는 이십오륙 세의 실로 꽃다운 젊은 엄마들이었다. 이런 모습을 본 나는 마치 친자매가 불행을 당한 것만큼이나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최혜순, 박경리와 나의 우정, 잎새, 1994, 27-8).

 

    고향에는 어릴 적 동무들, 그러니까 충렬초등학교 단짝들이 여럿 남아 살고 있었다. 금이 남편이 월북했다는 소문도 들었다던 옛 친구들이 수예점을 드나들며 물건을 많이 팔아주었다던데, 작가로 대성한 박금이가 고향에 묻히던 날, 그 한 사람이 옛 생각에 감회가 새로웠다(김영화, “단짝 친구 홍봉연 할머니 증언,” <한산신문>, 2008510).

 

유리문으로 된 가게였는데 원래 감각이 있던 친구라 예쁜 것이 많았다. 참새방앗간처럼 그 가게에 매일 출근했지. 우리 집이 항남동이었으니 오가다 들려 문턱이 닿을 지경이었지. 그때 금이에게 산 옷감이 지금도 집에 있다. 어쩌다 그 옷감 보면서 울었다.

당시는 금이가 아이 둘 데리고 진짜 힘든 시절이라 도와줄 방법은 물건을 사주는 일 밖에 없었지. 친구로서. 생활비를 보태거나 해서 잘못하면 서로 맘 상할 수도 있고. 근데 금이가 그걸 알았나 봐요. 그 당시에는 말하지 않았는데, 한참 후 그러니까 원주에 자리 잡은 후 "그때 너거 고마웠다"하더라고. “친구끼리 뭐 그런 말까지..." 하고 서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통영사람은 말 안 해

    증언은 아주 내밀한 대목에도 이르렀다. 작가가 세상을 떠난 뒤 외동딸 김영주가 무슨 말 끝에 내게 갑자기 말해주어 기회 닿는 대로 전말을 알아보려고 마음먹었던 그 사건이었다. 피난시절, 박금이가 재혼을 했다는 사실. 우선 작가의 사후(死後)를 고향이 감당하기 까지 관련 온갖 일을 치송했던 통영시청 문화통 고위 공무원에게 먼저 수소문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고 통영 지방신문에서 난 적도 있다. 하지만 공론장(公論場)에선 알아도 말 안하는 것이 우리 지방정서다.”

    박금이는 돌아온 고향에서 충렬초등학교 음악 선생과 재혼을 했다. 딸이 다니던 학 교의 총각선생이었으니 좁은 통영바닥과 당시 시대상으로 볼 때 곱지 않은 시선이 었다. 금이가 친구를 모아놓고 진지하게 의론을 했지요. 근데 우리 모두 젊은 나이 에 아이 둘 데리고 혼자 살기는 (고생길이)불 보듯 뻔하고, 인생 별 것 아니다. 사 랑을 선택하라 충고했단다.

 

용화사(통영의 진산 미륵산 산자락에 있다) 옆 작은 암자에서 결혼식을 올렸 다. "분홍 한복을 입은 금이가 얼마나 예쁘던지." 정화스님이 주례를 서고 신랑 신부가 친구들 앞에서 서약하는 형식으로 진행된 예식에서 금이는 "우리의 사 랑은 촛불과 같다"고 말했던 것으로 친구들은 기억했다.

직후 세간의 뒷소리가 난무했다. 짐작건대 당시에 총각 선생이란, 더구나 총각 음악 선생이란 지금의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처 녀도 아닌 애 딸린 과부가 총각 선생과 결혼을 했으니 무사할 수가 있었겠는 가. 온갖 악소문과 질시에 시달렸고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금이의 말 처럼 촛불 같은 사랑은 오래 가지 못했고, 결국 마음의 큰 상처를 안고 통영을 떠나게 됐다.

 

    아무튼 당시 지역사회에선 스캔들이라면 스캔들이라 할만 했다. 결혼적령기 청년들이 생사를 기약 못하는 열전(熱戰)의 군문으로 줄지어 들어가야 했던 그래서 크게 여초(女超)였던 시절에 총각 선생이 미망인과 결혼이라니 부럽다 못해 망칙한 사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 사건에 대해 나는 무엇보다 어머니 김용수의 그때 속마음이 어떠했을까 궁금했다. 신혼소박대기는 옛말이고 어떤 이유에서든 결혼 초장(初場)에 갈라서면 당연히 여성 쪽도 조만간 개가를 시도하는 것이 요즈음 풍속인데, 그 시절만 해도 여필종부, 일부종사(一夫從事) 강박으로 여성을 붙들어 맸던 도덕률에서 금이의 어머니 당신 또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20대 초년에 슬하도 없이 청상이 된 여동생에게, 효종 연간에 여섯 차례나 영의정에 올랐던 덕망이 무척 높았다던 정태화(鄭太和, 1602-73), 과부 딸을 시집보낸 일화를 이야기하자 다시는 오빠 김창숙(金昌淑, 1879-1962: 독립투사, 훗날 성균관대학 초대 총장: <김창숙 문존>, 성균관대 출판부, 2001, 187-193)을 보지 않으려했던 일화는 전통 도덕률의 결정판이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당신 딸의 앞날에 대해선 이제 김용수도 달리 생각했지 않았을까.

    뒤늦게 재혼 소식을 접했던 내 소감은 한마디로 충렬초등학교 동기생 홍 할머니와 같았다. “사랑을 선택하라!”는 그 조언, 말이다. 그 시절 적령기 여성들이 결혼은 했지만 거개가 사랑의 통과의례는 성패(成敗)간에 못 거친 경우였으니 하는 말이다.

    결혼식장에서 하객이 되어 주례사를 듣고 있노라면 상투적인 말을 자주 듣는다. “때문에가 아니라 불구하고의 사랑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라는 당부도 그 하나다. 박금이의 초등학교 교사 사랑은 바로 그렇게 각종 금기에도 불구하고감행되었다는 점에서, 그 이후 진행과 결말과는 관계없이, 나는 단연 박금이 편이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같이 고대하는 복록(福祿)에 아주 정반대되는 불운(不運)을 살아낼 수밖에 없었던 박복의 극상(極上) 일대를 되돌아보는 이 순간, 아주 잠시나마 그런 판타지가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도 지금 내 마음에 한 가닥 솔바람으로 불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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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 이 재혼의 말을 들은 이후 나는 특히 이 연재를 적는 도중에 많은 문헌을 훑어보면서 혹시 관련 대목이 나오지 않을까, 예의 주시하며 작가의 각종 글을 읽어왔다. 우선 하나 간접적 암시를 만났다. 재혼 남자와 헤어진 것이 여름이었다는 말이라 싶었다(밑줄 참조). 소설가 일대 관련으로 소설을 쓰는꼴로 내가 추정하건대, 첫 남편에 위한 복상(服喪)1년이었다면 재혼은 영주가 충렬초등학교에 입학하던 1952년 봄을 지나 여름 어름이었을 것이고 이별도 여름이었다면 헤어진 시점은 1953년 여름이란 말이었다. 재혼기간은 겨우 1년 남짓이었지 싶었다.

 

전에 나는 겨울보다 여름을 좋아했고 봄보다 가을을 좋아했다. 살림이 가난하니 겨울이 싫고 마음이 가난하니 봄이 싫었던 모양이다....

이따금 꼬마들이 (하얀 언덕길) 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일이 있다. 그러면 오 년 전에 산으로 놀러갔다가 죽은 아이 생각이 나서 나는 창문을 닫아버리고 만다. 내가 좋아하던 여름을 싫어하게 된 것은 여름이면 아이의 명일(命日, 제삿날)이 닥쳐오는 까닭인가.

남편도 늦여름(9월말)에 없어지고 아이도 여름에 없어졌다. 이별도 여름이었다. 여름이면 그 묵은 상흔들이 날궂이처럼 도져서 나를 괴롭힌다(“산이 보이는 창에서” <Q씨에게>, 1981, 234).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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