빽 찾아 구명운동(박경리 25)

 

     남편의 서대문형무소 수감을 확인하자 무엇보다 구명줄 을 구해야 했다. “세상사는 온통 뒷거래로 움직인다.”사바사바판국에서 다급한 일이 생기면 무엇보다 구하기에 혈안이었음이 그 시절 한국 사람의 생존본능이었다. 빽은 딱한 일의 해결사를 일컫던 말. 시정에서 오간 속담으로 성공은 1% 재능과 99% 이라거나, “빽 없는 사람, 죽을 때 빽하고 죽는다.”는 말도 나돌았다.

    박금이만큼이나 다급해진 친정어머니가 부산 사는 제부(弟夫)에게 도움을 청했다(어머니 형제는 맨 위가 아들, 그 다음이 어머니 김용수, 작가의 저술에 셋째 이모 이야기까지 나왔을 정도로, 그 아래로 여형제가 여럿이었다), 그러니까 박금이에게 둘째 이모부로 추정되는 소설 속 송씨의 실제는 경남에서 씨족이 많다던 함안 조()였다트럭을 타고 급히 올라와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이가 서울로 와서 입에 올린 일성(一聲)은 한마디로 ‘고추 먹은 소리’였. 도와주려고 왔는지 뒷소리하려고 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아무튼 말이 앞서는사람임은 분명했다.

 

(처형을 눈에 넣고선) 안 올 거로 내가 와서, 허 참 뭐 할라고 딸네 집에 와가지고 이런 험한 꼴을 보요? 액운 많은 사람은 간 곳마다 액운을 뿌리기 매련이지. 송상인 의원을 찾아가면 되겠구나. 하며 그럴싸한 인연을 풀어 놓는다.

그 양반 본업이 변호사고, 이번에 부산 피란 왔을 적에 내가 그래도 여러 번 찾아가 보았더니 그 효험이 있군 그래. 날 아주 괄시는 못할 기다. 코 흘릴 적부터, 지금이야 국회의원이 되고 우리네 처지하곤 다르지만 척()을 챙기면 조카뻘이 되거든.”

 

   그가 빽으로 삼은 인물은 경남 남해 사람으로 일본 메이지대학 출신의 제 2대 국회의원(1950-54) 조주영(趙柱泳)이었다. 나중에 임시수도 부산에서 체신부장관도 지냈다. 처조카 박금이와 함께 아침 일찍 의원 집을 찾았다. 먼저 송씨가 말문을 열었다.

 

, 인천 경찰서에 잡혔다고 말입니다.”

, 아 아니 지, 직장에 나간 것뿐이랍니다. , 그래서 사람을 사가지고 인천에 보냈더니만 서울 형무소로 넘어 갔다는 이야깁니다.”

어느 형무소에 넘어 갔답니까?”

바로 서, 서대문의.”

언도를 받았는가요? 그럼 그것부터 알아오시오. 언도를 받았다면 재심 수속을 해야 하니까.”

송 의원이 지영에게 직접 묻는다.

공산당에 입당했단 말이요?”

, 아닙니다! 친구가 권하니가 마음이 약하고 겁이 나서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인 공산당도 아니구 이, 입당되지도 않았어요. 그인 빠, 빨갱이가 아니예요!.”

 

   수감상황을 알기 위해 서대문형무소로 향했다. 형무소 넓은 뜰가에 물결처럼 사람들이 넘실거렸다. 독립문에서 서대문형무소에 이르는 너절한 양쪽 길에도 오가는 사람들로 길이 메였다. 인천 경찰서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지 한 달이 못된 시점이었다. 온종일 기다렸다. 해질 무렵, 기석이 이미 기결수가 된 사실을 알았다.

    15년 징역에다 죄수 번호는 1939. 해도 기석이 살아 있다는 확증을 얻은 것만도 일단 기뻤다. 구출방법 하나로 구금자의 신상을 변호해줄 진정서가 필요하단 말도 들었다. 그래서 소금연구소 정소장을 만나려고 급거 인천 금곡동 마을로 갔다. 갔더니만 서울 큰댁에 갔다 해서 발길을 다시 돌렸다.

 

진정서 한 통만 해주시면 얼마나 유리할지... 그래서 이렇게 찾아...” 지영은 말을 끊고 흐느낀다.

실은 내 자신이 의심을 받고 있어요. 몇 번이나 불려가고 했는데 내가 쓴 것이 무슨 효험이 있겠습니까? 도리어 역효과가 날지도 모르죠.”

역효과가 나도 좋습니다. 하여간 선생님이 해주시기만 하면...“.

결국 봉투 한 장을 지영에게 주었다. <우자는 사상이 온전한 것으로 사료함>. 지영은 일어서서 그 집을 나왔다. 사료한다는 것은 잘 모른다는 말과 마찬가지다! 송 의원이 이걸 보면 도리어 의심하겠지. 그 사이 이모부는 부산으로 내려가 버렸다고 어머니는 장탄식이었다. “시상에 조금만 더 있다가 일 돼가는 것 보고 가라고 사정사정해도 그만 내려가부렸다. 온 천지에 누가 있다고 우릴 버리고 그만 가버리겠노?‘

 

밤에 돌아온 송 의원은 지영으로부터 정소장이 써준 것을 받아서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이거 있으나마나.” 떨떠름하게 말하면서 구겨쥐어 버린다.

그래도 있는 게 낫지 않을까요?” 부인이 송상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오늘 법관에게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영의 얼굴이 긴장된다.

상당히 악감을 산 모양이야. 성질이 급한가?”

평소에는 순하지만 가끔....”

일제시대에 무슨 사상문제로 어디 관련된 일은 없소?”

일 년 동안 미결로 있었던 일은 있지만 그것은 다, 단순히 친구 간의 편지 때문에, 독립이구 뭐 태극기, , 그런 이야길, , 식민지.” 말을 다 못하고

하여간 정세만 좋아지면 괜찮겠지만 지금 사태가 자꾸 나쁘게만 돼가니.”

 

정세란 195010월 하순 중공군 참전이었다(중공군UN군 사이 최초 교전은 19501025일에 있었고,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124일 중국군 100만이 북한에 투입되었고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발표했다). 옆에서 지켜 앉았던 의원 부인도 안타까운 나머지 한 마디 했다. “(박금이) 이마가 넓은 것을 보니 초년고생은 있겠지만 과부 팔자는 아니다!”

    빽의 효과여부는 남의 개입에 달렸지만 옥바라지 대처는 지근 가족의 몫이었다. 이른 새벽에 보따리를 안고 형무소로 향했다. 방한복이나 사식 차입에도 일정 인원만 가능해서 거기에 닿으려고 이른 새벽부터 수형자 가족들은 줄서기가 경쟁이었다.

 

오늘은 넣겠구먼.” 지영의 앞에 선 사람이 웃는다... 지영은 떡값을 넣고 옷도 넣은 뒤 숯불 위에 구워서 파는 떡 두 개를 아침과 점심을 겸해 사먹고 둑 위로 올라가서 붉은 벽돌담 밑에 붙어 선다. 기석의 헌옷이 나올 시간까지 기다린다. 털모자로 얼굴을 감싼 남자가 장갑도 없이 시퍼렇게 죽어버린 듯한 손으로 담뱃재를 떨면서

, 다 죽지 죽어. 중공군놈들 땜에 다 죽어. 어찌 나오기를 바랄 수 있겠소. 지금 못 나오면 살아나올 사람은 드물 께요,:”

아무리 옷을 들여보내도 지붕 없는 감방에 새우젓같이 처재놨는데 그래가지고 명 보존을 하겠소? 얘기 들으니 많이 죽어나갔답니다. 정세만 좋으면 풀려나올 사람들이 지경이 됐으니....”

해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취급소의 창구가 열리고 간수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지영은 우두커니 서 있다가 기석의 속내의 하나를 받아든다. 그즈음 철문이 열리고 감옥에서 너댓 명이 풀려났다. 그중에 좀 나이든 사나이가 아무 말씀 마시고 떡이나 넣어 주십시오. 넣기만 하면 틀림없이 들어옵니다. 날씨 추운 거야 체력으로 이기니까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 했다.

구이팔 수복 이후 일사 후퇴 때까지 서대문형무소에는 수용능력 삼천 명보다 무려 네 배나 많은 만삼천 명이 수용돼, 두 평 미만의 감방에 십여 명씩 북적거려야 했다. 눕기는커녕 제대로 앉을 수조차 없어 절반씩 교대로 잠을 자야 했을 정도였다(김동현민경원, <서대문형무소>, 개정증보판, 2008, 141)

“(일제 때의 체험담) 겨울엔 얼음 창고 같은 감방 안에서 손발이 전부 동상을 입어 칼로 썩은 살을 베어내어야 했고, 여름엔 한증막 같은 속에서 땀을 줄줄 쏟으며 피부병으로 고생을 해야 했다.”(김정련, “형무소의 도산선생,” 앞의 책)

 

   겨우 여기까지만 박금이의 옥바라지 정경을 재구성했는데도 나는 벌써 목이 매인다. 1950년 여름, “하늘같던남편이 그 생사람 잡던 보도연맹에 무단히 연루되어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자 어머니는 돌잽이 막내 동생을 업고 매일같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형무소 앞을 서성거리며 혹시 드나드는 사람들이 흘리는 소식이 있을까 촉각을 세우다가 하릴없이 귀가하던 모습이 지금도 가슴 아프게 기억난다. 옛날 일에 대한 기억이 절대부족에서 아홉 살 어린 시절의 하나 남은 뚜렷한 기억이 어머니의 그 옥바라지 걸음이었다. 형무소에서 고문 구타를 당해 팔뼈가 부러졌지만 백부가 사람을 푸는 등 백방으로 애쓴 끝에 저승사자인지 권세자인지의 사련(邪戀)쪽에 줄이 닿아 죽음 일보 직전의 동생을 구해냈다.

   그때 예비 검속되어 마산형무소에 갇혔던 수감자 거의 대부분인 1681명을 가고파 그 잔잔한 바다에 수장시켰던 사실은 수 십 년이 지나서야 확인됐다. 좌우를 오갔던 피바람 속에서 또는 납북(拉北)으로 집안기둥을 잃었던 수많은 남은 가족들의 비탄에는 도무지 견줄 바 아닐지라도, 아버지가 마침내 살아 돌아왔음에도 어린 내가 그때 얼마나 포원(抱冤)이 졌으면 그렇게 오래도록 보도연맹의 죄악상 등 사건의 전말을 추적해 왔겠는가. 그때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면 무엇보다 형제들의 고등교육은 없었다는 게 무학(無學)의 내 어머니 단정이었다(밑줄은 필자의 것)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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