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 신혼생활(박경리 17)

 

   혼례는 1945년 정초에 올렸다. 박금이의 제적등본에 혼인일자가 1946130일로 적혔지만, 혼례날짜가 실제로 130일이었던지는 확인 불가였어도, 적어도 거행 시점은 8.15 해방되기 훨씬 몇 달 전이었다. “해방이 되고 어머니가 (신혼집에) 올라왔다했거나, 정신대에 끌려갈 일이 염려되어 결혼을 서둘렀다거나 등 소설 속 서술을 참조할 때 혼례는 분명 일제 말이었다.

    1922년생 김해 김씨 행도(幸道)거제도 부잣집에서 자랐고 일본 도쿄 소재 주오(中央)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집안은 남자 네 형제. 큰 형은 농사를 지었고, 둘째는 일본에서 비단 사업을 했다. 동생은 멋모르고 민청연(해방직후의 좌익운동단체)에 가입했다 한다. 시어머니는 나씨.

 

일본서 일 년 동안 미결로 형무소에 있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단식투쟁을 하고 간수 앞에서 밥그릇을 던지고 검사가 형무소에 와서 심문한 이야기, 저는 정말 당신을 존경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중략) 유력한 일본인이 운동하여 아무 탈 없이 나와서 취직도 하게 됐다는 말을 강조하시는 게.....

 

    신랑 김행도는 결혼하기 전이던 일제 말, 불령선인으로 찍혀 잠시 감옥에도 갔다. 하지만 그를 돕던 일본인이 있었다. 무사히 풀려나게 해주었고 취직도 시켜주었다. 그렇게 인천 전매국에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일터는 주안제염시험장이었다. 일제 말이던 1942년에 조선총독부 전매국 직할로 주안출장소가 있었고, 이 산하에 염전관리 파출소가 있었다. 해방되고 1947년 미군정 당시는 재무부 전매국 산하에 전매연구소가 세 곳이 있었다. 이 가운데 소금 전문이 바로 주안제염시험장이었다(전매청, <한국전매사> 1, 1980). 이공학도 출신 기술직 김행도는 일제 말 이래로 해방되고도 같은 직장에서 계속 일했던 경우였다.

 

신혼살림의 근거지

    결혼직후 내외는 잠시 서울에서 살다가, 직장 연고로 지금의 인천 금곡동에 있었던 전매서 관사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이후 행적은 역시 <시장과 전장>(149-151 )이 말해주었다.

 

결혼한 후 우리는 서울로 올라와서 다시 시골 K 마을의 조용한 관사촌으로 소개(疏開) 갔었죠. 그후, 우리는 서울로 이사 갔었어요. 거기서 당신은 저를 양재학교에 넣어 주었습니다. 일주일도 안 다니고 전 그만두고 우린 다시 인천으로 이사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저를 국민학교에 나가라 해서 국민학교에서 6개월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그러는 사이에 두 내외의 성격이라 할까 성향이 그대로 비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직접 말하기 면구했음인지 새색시 박금이는 편지 형식에 그걸 담아 적었다.

 

그러나 말해야겠습니다. 결혼하고 두 달도 못됐을 거예요. 우리는 서울로 갔었지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백화점은 텅텅 비어 있더군요. 당신은 책을 세 권을 샀어요. 그런데 점원의 착각인지 그는 두 권의 책값만 받지 않겠어요? 당신은 아무 말 않고 나왔습니다. 엉겁결에 저도 그냥 따라 나왔는데 기차를 타고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해지던군요. 어째서 그랬을까? 기차에서 내려가지고 K마을로 가는 들판 길에 들어섰을 때 달이 환하더군요. 걸음은 자꾸만 뒤지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가다가 돌아서서 몇 번이나 저를 기다려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생각에 잠겨 걸음이 더디었지만 나중에는 의식적으로 천천히 걸었어요. 당신하고 나란히 가기가 싫더군요. 당신이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참다못해 당신은 화를 내더군요. 그것만이라면 저는 당신이 모르고 그랬다 생각하고 잊어 버렸을지도 몰라요(불의로 남편을 잃은 지 세월이 오래 흘렀음에도 마음에 응어리졌던 옛 일을 문단 인사들에게 말한 적이 있었던가, 일화를 들었던 동인문학상 수상의 소설가이자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선우휘는 그런 박경리를 뜨악해했다. 그 또한 선이 분명했던강직한 인품으로 소문났던 이였음에도 그래도 그건 너무 하지 않느냐고 반응했다는 것).

.

그런데 당신은 감자밭 옆을 지나면서 감자를 좀 파가자구 했어요. 저는 기겁을 하고 말렸지만 당신은 부득부득 감자밭에 들어가서 감자를 팠습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저는 당신을 바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신분증을 잃었다 하시면서 아마 감자밭에 떨어뜨린 거라 하시면서 되돌아 밤길을 나갔습니다. 그때 저는 집에서 기도를 했답니다. 벌을 받아서 그런 거라고요. 내 피, 내 몸처럼 아파하고 내가 저지른 무서운 범죄처럼 뒹굴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때처럼 당신을 저 자신 이상으로 생각한 일은 없었습니다. 당신은 신분증을 찾아가지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허탈한 한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이 왔을 때 당신에게 느낀 신비감과 저대로 소중히 간직한 우리의 생활이 전부 무너지고 만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앞산 싸리꽃 옆에 앉아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저는 입덧이 나고 쌀밥이 먹고 싶더군요. 배급이 충분해서 식량이 어렵지 않았지만 알뜰히 산다고 쌀을 저축하여 우리는 잡곡을 먹지 않았습니까. 그래 어느 날 낮에 저는 완두콩을 두고 쌀밥을 지어서 혼자 먹었어요. 제가 당신에게 실망한 것보다 제가 자신에게 염오를 느낀 것이 몇 배 더 배반, 사소한 일이지만 마음을 볼 때 그것은 사소한 일이었을까요? 당신이 저지른 일과 제가 저지른 일이, 이 조그마한 두 가지는 당신과 저 사이에 커다란 강을 만들어놓고 말았습니다.

 

상극의 부부 성격

    부부는 정반대로 만난다 했다. 편지에 적었던 책값 그리고 감자서리 두 사건에 비친 두 사람 성격은 극명 대조였다. 박경리의 소심증이라 할 지독한 내향성, 그 일환인 염결성(廉潔性)인데 견주어 남편은 외향성으로 악의 없는 거짓말은 예사인”, 내 느낌으론 사람 좋은 유들유들함으로 해서 좀 넘치는그런 스타일이었지 싶었다.

    이를테면 주안의 염전 관사에 살적에 내외가 남편 친구와 거북스럽게 함께 같은 차편을 탄 적이 있었다. 그때 친구가 누구냐?” 묻자, 남편은 누이라 대답했다. 당장 처남하자!” 했다. 나중에 남편보고 당신은 질투심 그런 것도 없느냐?”고 따졌다.

    연안여중에 교사로 부임할 때는 독신이라 말하기로 입을 맞추었다. 불원, 취업한 아내가 궁금해서 학교를 찾아서는 김행도는 자신을 남편이라 하지 않았다. “편지나 해야지. 식구들이 모두 걱정 하잖어.”하고 말문을 열자 아내의 반응은 달리 따져들었다.

 

    “아저씨라 하면 누가 알아요?”
    “그럼 뭐라고 해?”

    “남편이라구 똑똑히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 그야 그럴 수도 있지만 비밀이지 않어?”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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