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한통에 옥죄진 혼사(박경리 16)

 

    “여자 팔자, 두룸박 팔자.” ‘두룸박은 두레박의 남도 말이다. 두레박 모양새에 따라 퍼 올릴 물의 양이 다르듯, 여성의 행복지수도 어떤 남성을 반려로 만나느냐에 달렸다는 것.

    “여자란 물과 같아서 그릇에 따라 달라지는 거요. 잘난 남자 만나면 절로 현명해지는 거구 못난 남자 만나면 병신이 되는 거구”(<시장과 전장>, 70). 재래의 남존여비 사상이 담긴 전시대적 여필종부형 속담에 담겼던 발상법은 저 멀리 내쳐버리고, 결혼은 남녀에 꼭 같이 중요 인생대사라는 점에서, 대신 부부는 만복의 근원이 말해야만 진실의 언사일 것이다. 결혼을 앞둔 박경리 또한 이 보편의 참말에 마음을 품었을 것이었다.

    혼인에 이르기까지 박경리 행적은 우선 19443월 진주여고 졸업이었다. 19453월이라 적었던 기존의 각종 기록과는 달리, 여고 동기생 최혜순은 자술 15쪽에 1940-44년에 학교를 다녔다고 적었다. 재학중 1년 휴학한 뒤 4년제 과정을 마쳤다는 말. 졸업연도가 이래야만 이후 박경리의 행적과 제대로 이어진다. 그 시절은 젊은 여성을 정신대로 차출한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혼기 처녀들의 혼사는 서두르던 법이었다.

 

연예편지가 화근

    남자 고학력자 가운데 광산학과 졸업생 등 각종 군수산업에 취업할 인력에겐 징병 또는 징용이 면제되었듯, 여학교 졸업 고학력자들이 얻을 수 있던 사회성 일자리는 그런 동원이 유보되던 분위기였다. 박경리도 학교 졸업 뒤에 통영의 금융조합(일설은 우체국)에 취직했다. 해도 이건 역시 임시 방책에 불과했다. 집안은 혼사를 서둘렀다. 당사자도 낯가림 등으로 직장생활 적응이 도무지 함량미달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해 그러니까 여학교를 갓 졸업하여 정신대에 보낸다는 소문 때문에 고향 금융조합에 취직했습니다. 제가 있는 곳은 출납계였는데 사방에 철망이 둘러져 있습니다. 일이 서툴러서 주임 혼자서 하고 전 그냥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때 저는 아무래도 형무소에 갇혀 있나 보다 하고 생각했어요. 꼼짝할 수도 없고 화장실에 갈 수도 없고 미련하게 앉아서 남자들 웃음소리만 나면 머리가 훌훌하여 막 소리를 지르고 싶었습니다. 저는 그 급사 아이에게 차 달라는 말이 하기 싫어 점심시간이면 언제나 찬밥을 먹곤 했는데 이 싫다는 것, 한 번 느끼면 도저히 견뎌내지 못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을 저지르고 마는 바로 그 결과가 당신과의 맞선이었습니다. 결혼을 하면 직장에 나가지 않아도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으리라는 어리석은 계산이었지요(<시장과 전장>, 145-155).

 

    중매가 들어온 상대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거제도 부잣집 아들이었다. 중매가 진척되어 장차의 신부 집에 나타났던 청년은 국방색 각반을 찬 대학생 제복 차림이었다. 살빛이 희고 안경을 쓰고 키가 큰 모습에 주위 사람들이 잘생겼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당사자 처녀는 타고난 방위기재 심리 탓이었던지 상대가 취미를 물어왔을 때 유치하고 촌뜨기 같은 짓을 한다.”고 생각했단다.

 

하여간 전 당신하고 결혼 안할 생각이었습니다. 당신도 저에게 결혼의 의사가 없는 것으로 알고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어머니는 이런 사람을 놓치면 안 되겠다고 당신들을 뒤쫓아 갔었죠.

어느 날 밤 어머니는 마당에서 백봉투를 한 장 주어오셨는데 이른바 연애편지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한 시절 전이었고 좁은 지방이어서 커가는 처녀들에게 연애편지라는 것은 참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소문이 나면 여자에게 잘못이 있든 없든 연애박사라는 흠이 찍히고 마는 그런 조심스런 것이었습니다. 소설을 많이 읽은 탓인지 여러 가지 연애편지가 자아내는 불행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결혼을 사흘 앞둔 날에 처음 받은 편지,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저 우습기만 하더군요. 그런데 소심한 저는 또 그 상상력 때문에, 또 어릴 때 억울하게 받은 놀림이 가슴에 꽉 박혀 있어서 그 편지를 당신에게 보여드렸던 것입니다. 그때 저는 당신이 운동장에서 기다리겠다는 연애편지 임자를 혼내줄 줄 알았어요. 그만큼 아버지도 오빠도 없이 자란 저 자신이 외로웠던가 봐요. 그런데 당신은 그까짓 내버려 두라고 하며 웃었습니다(중략).

그때 만일 파혼을 한다면 흠은 저에게 돌아온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군요. 그 이름 없는 연애편지는 아주 적당한 비난의 구실이 되지 않겠어요? 저는 부엌바닥에 쭈구리고 앉아서 별의별 불행한 결과를 상상했습니다. 전신에 소름이 끼치고 무서워 견딜 수 없었습니다. 참 어리숙하게도 저는 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결혼이라는 도박을 한 겁니다. 처음에는 반발심, 두 번째는 저의 명예 혹은 결백을 지키기 위해. 이 두 가지가 모두 열등감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저는 당신에게 불순한 동기로써 시집을 간 겁니다(밑줄은 필자의 것).

 

체면의 편지가 부메랑이 되어

    당시는 어떤 경우든 미혼 남녀 사이 편지는 이래저래 화근이었다. 박경리는 집 마당에 몰래 던져진 전혀 알지 못했던 외간남자의 편지 때문에도 맞선을 본 혼처와 부득불 결혼해야 한다고 판단했다면, 상견례를 했던 남자에게 형편상 인연을 이어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편지한 것이 족쇄된 경우도 있었다. 집안 어른의 거중으로 일본 미술유학중이던 장욱진(張旭鎭, 1917-90)과 맞선을 보았던 이순경(李舜卿, 1920- )이 그랬다. 당신 어머니의 강력반대에 봉착하여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통사정 편지가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어머니의 반대는 당신 남편 이병도(李丙燾, 1896-1989)의 선비생활이 바로 가난의 생활이었는데, 딸이 만날 장차의 환쟁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예단했기 때문이었다(처음 그림이 팔렸을 때 장모님이 살아 계셨으면 좋았겠다!”, ‘탈속의 뜬구름장욱진도 그런 세속적인 말을 할 줄 알았다).

    처음 상견례를 하고 다음 만날 약속을 하고 돌아온 이순경이었지만 어머니의 반대에 따라 뜻을 접었다. 다만 신식교육을 받고 예의 바르게 자란 처지에 아무 얘기 없이 안 나가는 것은 체면 도리가 아니었다. 장욱진에게 편지를 썼다. 집안의 반대로 약속에 못 나가게 되었다고. 이게 화근이었다. 그 시대 인식이 그랬듯, 여자 쪽에서 편지를 보냈다는 것 자체가 사건이었다. 이순경의 편지 사실이 남자집안을 통해 여자집안 어른 이병도 국사학자에 알려졌다. 양가 집안은 그걸 연애편지로 여겼다. 그 길로 딸을 시집보내야 했던 친정어머니는 직후 많이 울었다(장경수, <내 아버지 장욱진>, 2020).

    본디 사람들 사이에 믿음을 전한다 해서 편지는 신표(信標)라 했고, 전해지는 사이로 글에 좋은 뜻이 담겼다 해서 서간문학으로도 치부되었다. 그런 편지인데도 혼사 전엔 절대 금기시되던 미혼 남녀 사이의 통정을 잇는 연애질매체로 지목되면서 서방질처럼 편지질이 되고 말았다. 대성하고도 내 고질의 하나가 편지 기피증.”이라 적은 이가 바로 박경리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초장기 이래 장욱진과 평생지기였던 김원용(金元龍, 1922-93) 전 국립중앙박물관장도 편지질로 크게 봉욕을 당했었다고 자전 수필에 적었다. 경기고보 시절 짝사랑 고녀생에게, 어린 여동생 등 의심을 덜 받을 전달책 대신에, 우직하게 우편으로 연애편지를 보냈더니 처자 아버지가 그걸 가로챘다. 그 길로 학교로 달려와서 총각 학생을 혼찌검내고 돌아갔다.

    해도 우여곡절 끝에 뜻은 이루었고. 혼인날 서설(瑞雪)도 내렸다. 식을 마치고 신부와 함께 경복궁 돌담길을 걷을 때 행복감은 절정에 달했다. 거기에 흠뻑 취한 나머지 신부 보고 격정의 한마디, “지금 여기서 같이 죽자!”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  

(무단전재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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