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리 눈에 들다(박경리 14)

 

      사람에겐 일이 곧 생명이라 했다. 인간 박경리의 정체성도 작가 박경리로 파악하는 것이 백분 정당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박경리의 등단작 그러니까 공식적인 첫 단편 <계산>(현대문학, 19558)을 뒤늦게 읽은 내 소감이라면 두 가지 점이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당초 당신의 문학 수련이 시작(詩作)이 시작이었던 정황이 말해주듯 시적 표현의 문장이 글의 향기를 더해주었다는 점이었다. 주인공들이 겨울날 추운 새벽에 전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나가는 장면이 그랬다  


가등(街燈)이 희미하게 아스팔트길을 비추고 아침과 새벽이 얽어진 하늘에는 별들이 물먹은 듯이 아스름하다.”

넓은 전차 안은 공기가 이내 얼어서 돌돌 말릴 것만 같이 차다. 달달거리는 유리창 밖에는 어둠이 무슨 검은 포장처럼 펄러덕거린다.”

 

      또 하나는 첫 단편에서 이미 작가의 소심증, 이 연장으로 한평생을 줄곧 함께 살아온 당신 모친이 안타까워했던 결벽증, 보다 전문적으로 말해 방어기재(defence mechanism) 심리가 작품 전개에 깔려 있다는 점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피해의식이 내연하면서 자신의 내면은 물론 대인 관계가 까칠해지는 정황의 전개는 이후 당신의 후속 소설에 많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비쳤다. 바로 이 점에서 <계산> 줄거리의 핵심이 그 선행(先行) 사례라 할 만 했다

 

작가 개성이 그대로 등단작에

       주인공 회인(會仁)이 바로 작가의 분신. 대구 친구가 다시 대구로 내려간다 해서 전송차 새벽녘에 전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가던 길이었다. 전차표를 사지 못한 채 급히 전차에 올라 불가피 현금을 내야하는 낭패스러운 처지였다. 그때 한 시골학생이 갖고 있던 전차표를 대신 내준다. 그녀는 전차표 값을 학생에게 전하려다 말고 그 시절 구하기가 싶지 않던 기차표를 대신 사주는 편의를 봐주려한다. 대구 친구가 말문을 터놓은 서울역 역무원에게 사정하면 전남 여수로 간다는 그 시골 학생에게 편의를 봐줄 수 있겠다는 계산이었다.

       함께 역무원을 만나 여수행 차표를 산 뒤 시골 학생은 이북 출신 친구를 만난다고 먼저 자리를 떴다. 역무원 방에서 추위에 떨던 몸을 잠시 녹인 회인은 대구 친구가 지금쯤 나왔으리라 싶어 급히 계단으로 올라간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 역무원이 학생의 기차표를 사고 난 거스름돈 칠십 환을 주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회인이는 요새 사회의 버릇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몹시 불쾌했다.”(밑줄은 필자의 것). 바로 그즈음 개찰구 입구에서 여수 학생이 회인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네며 이동 중이다. 전송하러 나왔던 이북 학생이 여수 학생 가까이 몸을 기울이며 뭐라고 얘기한다. 이북 학생이 나지막하게 대답을 하는 것 같다  


이 자식 바가지 썼군! 하핫! 표 야미꾼이야 야미꾼 하핫!“ 회인이는 분명히 들었다. 회인이는 .... 송아지처럼 소리를 질러 울고 싶었다.

 

       이 줄거리를 적다 보니 비슷한 내 경험이 겹쳐져 한결 실감이 났다. 먼저 좋은 기억. 뉴욕 맨하탄을 시내버스로 타고 오간 적 있었다. 가려했던 방향의 버스가 갑자기 나타나서 급히 올랐는데 수중에 잔돈을 준비하지 못했다. 버스 기사도 잔돈을 줄 수 없는 난처한 지경인데 바로 그때 가까이 있던 미국 사람이 2불 정도의 버스표를 대신 내주었다. 마치 나처럼 엉성한 여행객을 예상하면서 버스를 탄 현지 뉴요커 같았다.

       불쾌한 기억. 1980년 전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세미나에 갔다가 자카르타를 거쳐 미국으로 가던 길이었다. 그 시절은 지금보다 훨씬 더 탁송 가방 무게에 엄격인색했다. 초과했다며 추가 요금을 달라했다. 멕시코시티로 학술회의에 갔다 올 때도 그런 일이 생겼다. 그때마다 미국 국적기인지라 담당 주임 미국직원이 바로 옆에 서있는데도 화물 담당의 현지 직원은 내가 낸 큰 현금의 거스름을 내주지 않았다. 뒷돈을 챙기는 방식이 그러했던 것. 이후 그런 도시들은 다시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내 마음에 각인되고 말았다

 

문단으로 이끈 인연

       소설가는 누구인가. “여러 편의 소설들을 통해 한 편의 자서전을 쓰는 사람이라 했다(이승우, “자화상을 그리는 일,” <소설가의 귀속말>, 2020). 이 말은 누구보다 박경리를 말함이라는 게 내 확신이다. 첫 단편 <계산>에서 회인은 물론, 두 번째 단편 <흑흑백백>(1956)에서 6.25 직후 서울에 환도해서 교사로 취직하려던 혜숙(蕙淑)도 작가의 분신이다. 단편 속의 말 어머니와 딸을 데리고 사는 결손가정이 바로 박경리의 가정이기도 했다.

       박경리의 문학 일대는 두 단편이 디딤돌이었다. , <계산>(1955)이 등단작, 그리고 꼭 일년 만에 <흑흑백백>(현대문학, 19568)이 추천작으로 뽑혀 그 시절 문단에 이름을 올리는 통과의례를 마쳤다. 그리고 19551월에 창간호를 낸 현대문학사가 장차 현대 한국문학의 대표 얼굴로 비상하리라 예감이나 한 듯 현대문학상1회 수상자(1956)로 뽑았다.

       이렇게 문단에 이름 석 자를 올리게 된 데는 지인지감(知人之鑑)’ 곧 사람을 알아보는 감각의 중간 거중이 있었다. 문단사에 두고두고 남을만한 일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6.25전쟁의 살상극 회오리 속에서 유탄에 맞아 그만 남편을 잃고만 청상이 외로움을 달래는 방편으로 시짓기에 열심이었다. 기실, 박경리의 글쓰기 버릇은 이미 여학교 때부터 몰입하던 방식이었고, 이를 일찍이 눈여겨 보아온 진주여고 동기가 있었다.

       본디 진주태생이던 친구 최혜순은 통영의 한 부잣집으로 시집가서 통영사람으로 살고 있었고, 박경리는 해방되던 해 정초에 결혼한 뒤 6.25 발발 때까지 주로 인천과 서울에서 살았다. 그러다 1.4 후퇴 직후 천신만고 끝에 피난 왔던 박경리가 고향 통영에서 옛 친구를 반갑게 재회했다. 전쟁이 멈추자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이유였으나, 우연찮게도 서울 돈암동에서 가까이 셋방살이를 이어갈 처지가 되었다. 자별한 친구인데다 이웃사촌까지 되었으니 서로의 왕래는 빈번할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친구가 세든 집이 당대의 소설가 김동리(金東里, 1913-95)의 본가였다. 더욱 공교롭게도 동리 본댁이 진주여고 전신인 일신여학교 졸업의 선배였다. 한참 위 선배는 여학교를 나온 뒤 함양군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있다가 동리와 결혼했단다.

       최혜순 친구는 금이(今伊)가 글을 쓰고 있다면서 그 글들을 자식들을 보살피려 주말마다 본댁을 찾는 남편에게 한번 보여서 촌평을 듣고 싶다고 열을 냈다.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에게 유망 작가 양성 그리고 찾기가 직업이었을 터에, 베게송사까지는 아니었을 지라도, 본처의 청을 마다하지 않았다.

       동리는 박경리의 시를 두고 ()은 좋지만 형체가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은근히 반응했다. 이를 전해들은 박경리는 "시인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는 사람을 공연히 끌어다가 망신을 당하게 했다!"며 오히려 친구를 원망했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