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만난 첫 감회를 글로(박경리 11)

 

 

     원주의 작가 집을 찾았던 소감은 그 직후 198367일자 경향신문에 적었다. “소설 <토지>--4부를 기다리며가 제목, 외부기고치곤 긴 글이었다. 동아일보에 외부 인사들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적는 코너 하나가 청론탁설(淸論濁說)”인데, 그즈음 나도 참여 중이었다. 이게 유력 신문에 내 이름이 등장한 시발이었고, 마침 경향이 동아 지면을 보고 기고를 청해왔던 것.

     신문의 외부인사 기고란에 얼굴을 내민 경위는 좀 특별했다. 세상에 숨은 미문(美文)선필(善筆)은 의외로 많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많은 글, 그리고 댓글을 보고 그런 생각을 갖게 된 이는 나만이 아닐 것이다. 많이들 신문이나 잡지에 투고한다던데, 한 편집장 말에 따르면 잡지사에 쌓이는 투고만도 트럭으로 실어 낼만하다했다. 투고가 지면에 실리는 행운은 벼락 맞을 확률이란 말이었다.

     그럼 신문에 외부 기고자 글이 실리는 경우는 어떤 경로인가. 대학교수 상대로 해마다 언론이 펼치는 신춘문예 공모 같은 공개모집이 있는 것도 아니다. 기실, 신문사 문화부나 편집국장 등 편집 일을 하는 기자들이 생각도 있고 글 솜씨도 있는대학교수나 문화예술가를 가려내서 지면으로 등장시키는 일로 눈에 불을 켜고있다했다. 하필 주로 대학교수인가? 교수는 교육기능 못지않게 연구력이 중시되는 교직이라 무언가 참신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할 말 있다!

     말이 좀 돌아가지만, 신문에서 남의 글을 읽다보니 나도 할 말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람 욕구체계에서 자기표현욕구라는 게 있고, 세속적으론 부귀(富貴)의 지향과 함께/또는 남 눈에 띄고 싶은 가시성(可視性) 욕구도 은근히 강력하다했다. 이름이 세상이 알려지기도 소망해 왔음은 내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효도 방식에 대한 전래 말도 있다. 신체발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건강을 지킴이 효행의 출발이고, 세상에 나아가 이름을 내는 것이 그 완성이라 했다. “! 누구네 아들이 크게 출세를 했다요!” 소리치면, 이웃이 기쁨을 공유하려는 말본새로 아아. 신문에 났당가!” 묻는다지 않던가. 장삼이사(張三李四)까지도 신문지면에 등장한 이름을 중시하는 마당이면 말과 함께 글로 먹고 사는 이른바 선비라면 더 말할 게 있겠는가.

     내 경우, 지면에 얼굴을 내밀 기회가 뜻밖에도 학위 논문을 마무리하던 미국 발원이었다. 1982년 후반에 논문 제출을 위해 머물 동안 거기서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던 박권상(朴權相, 1929-2014) 전 동아일보 논설주간과 가까이 할 시간이 많았다. 1980년 군부의 언론학살 때 해직된 최고위직으로 당국의 출입통제를 받다가 1970년대 초반 주한미국대사였던 하비브(Philip Habib, 1920-92)가 그때 권부에다 손을 써서 출국할 수 있었다. 처음 6개월은 미국 동부 우드로윌슨연구소, 1982년 말부터는 버클리대 동아시아 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말하자면 망명생활 중이었다.

     얼마나 무료했겠는가. 대학도시 바깥이 샌프란시스코인데, 거기엔 당신과 친면이 있던 채명신 장군, 박준규 전 국회의장 등 어울릴 만한 인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버클리대에 적을 둔 각계 한국 사람이 캠퍼스 안에 천명도 훨씬 넘었겠지만, 당신을 알아본 사람은 내가 유일했을 것이었다. 이전, 영국 특파원시절 회고담인 <영국을 생각한다>(1979)을 애독했던 나에겐 그 필자를 뜻밖에 객지에서 직접 만나는 기쁨이 컸다. 학위논문 마무리도 바빴지만 당신에게서 한국정치 이면사를 육성으로 듣는 시간은 재미난 연속극은 저리가라!”였고, 당신에겐 나는 답답한 속말을 들어주는 좋은 반향판(sound wall)인가, 말동무인가가 되었다.

     이야기는 당신 거처인 작은 아파트 거실까지 이어지기 일쑤였다. 저녁은 먹어야 했다. 버클리 대학동네에 참한 일본식품점이 있었다. 급히 가서 일제 인스탄트 소바를 사다가 간단히 요기를 하곤 했다. 박 주간은, 내 개념으로 말하면, “()라면시대사람이었다. 소바는 물론이고 라면도 스스로 끓여 먹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19832월에 귀국했고, 주간은 5월에 돌아왔다. 오자마자 당신이 대부로 있던 해직 언론인 모임에 놀러 오라해서 갔더니만 신문에서 쫓겨난고향 후배 최일남(崔一男, 1932- ), 해직기자들과 코드가 맞았던 김중배(金重培, 1934- ) 등 당대 일류논객 그리고 주필을 따르던 후배 해직기자들에게 명색이 서생(書生)인 나를 단도직입으로 소개했다. “요리솜씨가 특출하다!” 겨우 메밀국수 한 그릇 끓이고 들었던 칭찬이었다. 그리곤 이종석(李種奭, 1935- ) 현직 문화부장에게 말해 두었으니 신문사에서 연락이 오면 당신 전공이나 취미 쪽 이야기나 한번 적어보라!” 했다.

     신문에 이름이 났다. 연쇄반응이 나타났다. 내 글을 유심히 보았던 조선일보 간부 두 분이 있었다. 이 신문 외부인사 기고란인 일사일언”, “아침논단필진으로 초대 받았고 1980년대 말부터 주말에 하루 나가는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사설과 준사설인 만물상을 적는 글공부를 5년이나 할 수 있었다.

 

소설의 재미

     글쓰기 공부 내력은 그랬지만 소설 읽기취미는 입이 짧았다.” 아주 어쩌다 소설을 붙잡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경향 기고 글에서 대뜸 읽어 본 소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우리 작품들을 꼽으라면 박경리의 <토지>가 단연 으뜸이라고 적었다. 까닭을 이어 말했다.

 

이렇게(<토지>가 단연 으뜸) 단정 짓고 나면 내 나름의 모순에 빠진다. 어떤 자리에서 만난 이름난 화가 한 분이 어느 연주가보다 정경화의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이 제일이라는 말씀에 거부반응을 보인 일이 있었다. 화가로서 마티스나 피카소 가운데 누가 낫다고 할 수 없겠듯이 평생을 바이올린에 바쳐 한 수준을 이룬 많은 바이올린 대가들의 차이콥스키도 그 나름의 완성인 것을 짐작한다면 누구를 즐기는 것은 스스로의 취향 아니면 개인의 편견 때문이라고 되받았던 일이 기억나서였다. 마찬가지로 내가 읽었던 우리 소설 가운데 <토지>를 가장 높게 치는 것도 나의 취향이자 개인적인 편견이 한 까닭이겠다. 나의 편견을 고쳐 줄 문학평론이 있다 하더라도 당분간 내 마음의 문이 열려 달리 바뀔 것 같지 않다. 이 편견은 바로 소설 <토지>에 대한 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 그 감명은 <토지>가 설정한 시대와 무대의 특수성을 염두에 둔 말이기도 했다. 먼저 19세기 말에서 시작해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던 1929년에 이르는 <토지> 3부까지의 시대가 우리의 피부와 닿아 있어서였다. 이 시점시대에 대한 역사교육은 조선왕조사를 배우다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대목에 이르러 그만 맥이 빠져 단절되곤 했다.

     이렇게 모자란 나의 역사의식은 <토지>를 통해 어느 정도 메워질 수 있었다. 개항 백 년의 격동기에 우리의 바로 앞 선조들이 어려운 세파를 헤쳐 나가는 과정, 그것도 정치권력의 몰락과정보다 나라의 진짜 바탕인 백성이 고초와 설움을 겪는 모습은 머리로 이해하는 역사공부가 아닌, 마음으로 느끼는역사교감(交感)이었다. 이는, 사회과학 같은 학문에선 개인을 나눌 수 있는 존재(dividual)”로 예사로 싸잡아 치부함에 견주어, 문학에선 개인을 실체와 존엄을 갖춘 나눌 수 없는 존재(in-dividual)”로 받들기 때문이라 싶었다. 사회과학에선 ‘0.5도 있지만, 인문학에선 소수점일 수 없는 온전한사람만 있을 뿐이란 말이었다.

 

등짐장수가 나오면 그 장면에서는 그 사람이 주인공이에요. 그런 사람 하나하나의 운명, 그리고 그 사회의 현실과의 대결을 통해서 역사가 투영됩니다. 열 사람이면 열 사람, 백 사람이면 백 사람을 모두 이렇게 주인공으로 할 경우 비로소 역사라는 것이 뚜렷이 배경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

     한편 <토지>의 무대는 나의 국토의식을 새롭게 자극해 주었다. 경남 하동에서 시작해서 만주의 간도, 서울, 진주, 평양으로 넓게 전개되는 소설의 무대는 분단의 오랜 세월 끝에 우리의 땅은 남한뿐이라고 자칫 잘못 생각하기 쉬운 관념에 일침을 놓아주었다. 곧 우리의 조상이 기쁨과 눈물을 흘리던 곳은 아무리 좁게 잡는다손 치더라도 분단되기 전의 한반도 구석구석인 점을 깨우쳐준 것이다.

     이렇게 에둘러 적고 보면 혹시 <토지>가 재미가 별로란 말로 들릴지 모르겠다. 천만의 말씀. 한 대목을 들어 말해 보면 2부까지의 <토지>에서 큰 몫을 차지했던 주인공 월선의 두 가슴에 용솟음치는 사랑의 물결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의 속삭임 못지않게 작가의 격조 있는 문체로 뜨겁게 되살아나 있었다.

     만나는 순간마다 새롭고 전부였고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고, 기다리는 동안의 몸서리치던 고통은 아주 쉽게 잊어버리는것이 그들의 사랑이었다. 몸으로만 부딪치는 오늘의 우리 주변 그 흔한 사랑의 이야기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정감을 불러일으켜 주었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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