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장에 갇힌 처지(박경리 9)

 

       소찬이라 거듭 말하는 작가의 겸사(謙辭), 모처럼 고향의 맛을 즐긴다는 두 경남 출신 방문객의 찬사가 어우러지는 사이로 방문객의 눈길을 끈 것은 둘. 하나는 벽면에 걸린 어린이 그림, 또 하나는 대청의 미닫이 너머로 펼쳐진 텃밭이었다.

       먼저 그림이 화제로 오르자 작가는 온몸이 온통 신명이었다. 외손주 원보(圓譜) 여섯 살 때 그림(1979)이란 말을 이어갈 때는 강골의 작가에게서 오로지 한없이 푸근한 할머니의 외골수 손주 사랑만 느껴졌다. 이어진 말도 이 연장이었다.     

원주에 터를 잡은 생활이지만 문학 때문에 원주 시내로 나갈 일도 없고 나가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손자의 담임선생이 나를 불러 학교 어머니 교실에서 이야기해 달라는 청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 가장 무서운 사람은 손자의 선생이라.   

 

       손자 사랑도 포함되는 사랑은 이렇게 사람의 강점이자 약점이며, 구원이자 구속이 되고 있었다. 이 메시지는 바로 작품 속에 알게 모르게, 여기저기에 숨어 있는 작가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새장이 바로 당신 처지라는 말

        손자 그림이 나중에 당신의 <못 떠나는 배> 시집(1988) 겉장을 장식했다. 낱장 갱지의 <새장>그림은 새 몸통은 갇힌 채로 꼬리는 새장 밖으로 빠져나온 모양새였다. 어린이 특유의 천진난만 표현방식이 잘 드러난 것으로, 이를 두고 현대회화의 입체파적 표현이라 한다면 아는 채 하는 현학의 말장난이 될 터이지만, 아무튼 그림이 무척 재미있게 보이는 까닭을 굳이 말한다면 그렇다는 말이었다.

        뒤늦게 따져보니 그게 바로 숨은 그림이었다. 토지 4부 착수를 앞두고 작가가 얼마나 고심했던 지의 추체험 단서였다. 시집 제목이 바로 그랬고, 그 표지 그림이 바로 그랬다. 제목대로 강물이나 바닷물이 빠져버려 덜렁 모래톱에 좌초된 못 떠나는 배이고, 4부 집필 착수가 큰 난관에 봉착했음이 새장에 갇힌 신세에 다름 아님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간의 토지 집필 시간대를 보면 토지 1부 연재(19699-19729)는 바로 2부 연재(197210-197510)로 이어졌다. 그리고 1년 정도 간격 끝에 3부가 연재(19771-197912)되었고, 그렇게 1-3부 단행본이 완성되었다.

        4부는, 3부 완성 뒤 무려 2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19819월에 연재를 시작했다. 이 착수도 게재지 사정에다 작가의 사정이 서로 겹쳐 연재가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19885월에야 겨우 마쳤다. 그리고 4년여가 지나 199291일 문화일보에 <토지> 5부 연재를 시작했고 드디어 1994815, 집필 26년 만에 대하소설이 완성되었다. 문화부 기자 말대로 1-3부까지 13, 4-5부까지도 13년이 소요되었다.

        언젠가 작가에게 직접 들었던 바로, 집필 도중에 세웠던 구상은 6.25 전쟁 때까지 다루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단다. 이 구상대로라면 4부가 해방 때까지, 5부가 동족상잔 때까지의 이야기가 될 법했지만, 1930년에서 해방 때까지가 4부 분량으로도 모자라 5부까지로 넘어오고 말았다. 4부의 착수와 집필이 어려워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 고심을 바로 시집 서문에 직접 토로했다. 두 가지를 말함이었다. 먼저 하나는 열 가닥의 씨올로 짤 피륙이 3부까지의 <토지>라면 4부는 삼심 줄 오십 줄의 씨올로 짜야하는 베라 했다. 내 짐작으로 이 말은 3부까지 등장인물들의 혈연관계가 부자(父子) 2대였음에 견주어 이후 4부부터는 조손(祖孫) 3대로 혈연의 실타래가 엮어지다보니 그 경우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는 말이었고, 그렇게 늘어난 사람사건을 유기적으로 엮는 일이 복잡다단했기에 장고에 장고를 거듭했다는 말이었다.

        또 하나는 “(토지) 4부은 일본이 기둥이라했다. 시대상황 곧 그때 동북아지정은 만주사변, 중일전쟁, 세계대전이 잇따랐다. 비례해서 일제의 조선 지배가 한층 가혹잔혹에 졌다는 말이었다 


4부의 시간이며 무대인 1930년에서 45년까지, 철저히 봉쇄되고 바닥까지 수탈당했으며 모든 것이 말살되었던 일제침략의 말기를 살았던 마지막 세대인 나, 작가라는 멍에를 질머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뭔가에 의해 쫓기는 기분이었다. 강박이었고 초조, 불안이었다(“머리말,” <못떠나는 배>, 1988).   


        이 상황에서 펼쳐질 일제 비판일지라도 민족주의의 한 측면인 에고이즘에 빠지지 않겠다는 경계심으로 가일층 일본공부에 매달렸다. 막상 글을 적어나가려니 비통, 비감이 스스로 어쩔 줄 몰랐다. 조손 누대로 연이어 당했던 아픔을 적어나가다가 끝머리에 이르러 이를테면 평사리 소작인 정한조의 손녀 이야기를 적을 때는 딸(김영주, “어머니”, 1985, 183)에게 어린 남희의 불행을 쓰고 나서 너무 괴로웠노라고 몇 번이고 말했을 정도였다.

        평사리 소녀 남희(鄭南姬)는 조준구가 폭도라 지목한 탓에 일제 헌병에게 즉결 처분당한 정한조의 손녀이자, 애비의 원수를 갚는다고 동분서주했던 정석의 딸이었다. 정석은 기생 기화(紀花)가 된 봉순에게 품었던 연정 때문에 아내 양을례와 사이가 멀어졌다. 남편의 반일 행적을 아내가 밀고해버린 지경에서 정석은 만주로 피신했고, 을례는 부산으로 가서 술집을 차렸고 왜인을 기둥서방으로 삼았다. 이틈에 생겨났던 비극을 작가가 적어나가다가 못내 가슴아파했다는 말이었다. 일제 말 1944년 즈음 이야기인데, 등장인물들의 대화 핵심만 여기 모았다(542).   

꽃봉오리 겉은 나이 머를 우쨌길래 아이가 철골같이 말랐겄소? 빈손에다가 맨발로 온 거를 보이 그 제집이 순순히 보낸 거는 아닐 기고 필시 도망을 쳐서 나온 모앵인데 이 바람 부는 날 찬비를 맞고...대체 무신 곡절이겄소?”
온 거사 천분 만분 잘한 일이지마는 아아 꼴을 본께 피가 마를 것 같소. 이년을 그만, 지 죽고 나 죽고 이 악연을 끊어야지
참으소. 참아 원수는 세월이 갚고 남이 갚아준다 안 카요.”  

밥상이 들어왔다. 김치 한 보시기 된장 뚝배기 하나, 그리고 된장에 묻어둔 콩잎이 한 접시, 남희는 군침을 삼키며 얼른 숟가락을 든다.
콩이파리, 이게 얼마나 먹고 싶었다고.”  

남희가 미처서 돌아왔다누마.”
아니 그기이 아니고 연애질을 하다가 핵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그러든데?”
어린기이 연애질을 해?”
열여섯 살이 머가 어리노. 시집갈 나이다.”
애미가 데리가더마는 신세 망쳤구나.”
그기이, 요릿집을 한다 카이 좋은 본을 봤겄나?”
건강이 나쁘다는 것도 큰일이기는 하지마는 시국이 시국인만치 정신대에 뽑혀가지 않을까 그기이 걱정입니다.” 

사실 의사로서 적잖은 세월을 보냈지만 이런 일은 처음 경험했기에 저로서는 충격이 컸습니다.”
그런 어린 나이에 있을 수는 없는 일이.”
놀라지 마십시오... , 아이의 병은 성병입니다.”
병정놈한테 당한 거예요. 그 몹쓸 놈이 아이를
우리 집에 가끔 오던 놈이었어요. 그것도 명색이 장교라 하는데 그런 짐승일 줄이야... 함께 사는 사람(기둥서방 야나기)하고 면식도 있고 해서.”  


            위안부 비극은 일제의 태평양 전선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한반도 방방곡곡이 절단 나고 있었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