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아가 뭐라카노?(박경리 8)

 

     아주 오랜만이라며 작가는 김형윤 편집장에게는 잡지 복간의 장래, 그리고 한창기 뿌리깊은나무 출판사 사장의 근황에 대해 물었다. 이래저래 수인사가 끝나자 다짜고짜로찬은 없지만 곧 밥을 지어 올 테니 점심을 함께 하자했다.

      당신이 소설 속에도 적었던 옛적 정경 바로 그대로였다. 원근 간에 찾아온 내객(來客)에게 먼저 단물로 입을 다시게 하고, 이어 밥상을 차렸다. 그렇게 옛적 손님 접대는 인정이 차고 넘쳤다(<김약국>, 1993, 102).

 

아가, 용빈아 이야기하고 앉았거라. 내 얼른 저녁할 께,”
그만 갈랍니다, 큰어머니.” 용빈이 황급히 일어서려니까 윤씨는 기겁을 하며,
야아가 뭐라카노?“ 하며 화를 낸다.
가씨나나 하나 둘 기지. 앉아서 밥 얻어먹기 민망하구마.“ 용숙은 살랑살랑 부채질을 한다.
얼마 후 조촐한 저녁상이 들어왔다. 장에 가지도 않았는데 밥상이 실팍하다. 나물, 자반, 건어, 김치도 깔금하다.

 

      대화에 나오는 큰어머니는 김약국의 고종사촌(이중구)의 아내를 말함이고, ‘가씨나는 어린 여자 붙박이 식모를 일컫는 그 지방 말이었다. 작가가 소설을 적고 있었을 때도 행실이 영 못마땅해서 줄곧 눈살을 찌푸렸을 것이라 많은 독자들이 짐작했을 용숙은 김약국의 다섯 딸 가운데 맏이고, 인물됨이 언니와는 딴판으로 외모와 마음결이 둘 다 고운 용빈은 둘째 딸이다. 두 여인이 찾았던 간창골은 작가가 태어났던, 당신 외갓집이 있었던 명정동 언덕배기에서 저만치 눈 아래로 바로 내려다보이는 통제영 주변이다. 걸어도 10분 남짓, 그런 지근거리인데도 일단 친척집 방문이면 소설의 대화처럼 식사대접은 거의 필수였다.

 

식사는 환대의 꽃

      원주로 작가를 처음 찾았던 날, 시간이 정오에 가까웠던가. 그렇게 초행초면 방문객에게 식사를 함께 하자는 제의는 새삼 각별한 문화적 의미로 되새겨졌다. 동서양 문화권 어디에서나 식사는 기갈 해소 행위를 넘어선 중요한 의례이기 때문이었다. 제사가 끝난 뒤 집안 식구는 물론이고 이웃과도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던 음복(飮福)의 전통에서, 그리고 동지(同志, companion)’라는 영어 단어도 (panion)을 같이(com)”가 유래임에서 알 수 있듯 식사 행위는 오히려 정신적 공감대의 확인이곤 했다.

      작가가 마련한 점심은 따뜻한 밥 한 공기에 손수 기른 감자가 토막 쳐 들어간 된장국, 그리고 싱싱한 비린내가 입맛을 자극하는 통멸치젓과 고춧가루와 절인 배추를 갓 버무린, 지방에 따라선 겉절이라 하는 생김치였다. 고향에서 보낸 소년 시절, 어머니가 내 미각으로 굳혀준 바로 그때 그 맛이었다. 작가가 밥상에 올린 생김치는 그래서 그 맛을 익히던 시절까지 소급되는 긴 과거를 기억나게 해주었고, 나는 그 긴 시간을 통해서만 무르익을 수 있는 친근감으로 내 마음은 무척 흐뭇했다. 내 어머니는 곧잘 생김치에 산초가루도 뿌렸다는 말에 작가는 그게 진짜 진짜 고향맛이라고 맞장구쳐 주었다.

      식탁 위의 대화는 내 글에서 <토지> 주요 주인공들의 생몰을 밝힌 것을 유념해서 거기에 대한 말을 이어갔다. 밝힌 생몰연대가 당신이 장부에 적어둔 것도 다르지 않았던지 화제는 당신 집필방식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주인공들의 생몰 같은 인적 사항을 적은 종이는 갖고 있다. 그럼에도 적어둔 간단한 이력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들이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유롭게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머리와 마음속에 이입(移入)하면서 주인공들의 행적을 그려가고 있다. 미리 자세히 메모해 두면 그 상상의 공간에 제약이 올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붓끝에 생생하게 살아서 제 스스로 신명나게 움직인 인물이라면 주갑을 대표 인물로 꼽았다. “지가 살아서 움직였다.”했다. <토지>사전(임우기정호웅 편, 1997, 545-6)은 주갑으로 말하면 좋은 목청을 내지르며 거칠 것 없는 방랑의 삶을 사는 전라도 출신 인물로 말솜씨가 뛰어나며 가식이 없고 한편으로는 능청스러운 사내로... 비극적인 요소를 낙천적으로 발산하는 타고난 끼와 모든 인간적인 요소를 다 갖춘 자유인의 모습이라 적었다. 원전은 어떻게 적었던가(352, 95-98).

 

눈물이 주름진 얼굴 위로 흘러내린다. 주모도 행주치마를 걷어 눈물을 닦는다. 한구석에서 술을 마시던 젊은 층의 두 사나이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모습은 달라졌어도 주갑의 한맺힌 목소리는 변함없이 청아하고 보잘것없는 한 인간이 홀연 고귀한 모습으로 주변을 압도한다.
주 서방 새타령으 들을 때마다 창자기 끊으지느 것 같재잉요? 애그머니, 무시기 한이 그리 많답매?”
주모는 연신 행주치마로 눈물을 닦는다.
저놈의 청성, 저러니 몽다리귀신 될밖에.”
<새타령>을 끝낸 주갑은
성님, 몽다리귀신도 그리 나쁜 거는 아니란 말씨. 한이 많은 것도 반드시 불행한 거는 아니여라우. 나는 한평생을 이리 살았는디 그래도 후회는 허지 않소. 내 옆에 지금은 없지마는 보고 저븐 사람도 많고, 나헌티 잘혀준 사람도 많고... 허허헛, 답대비 그놈의 계집허고만 인연이 없는 것이 자다가 생각혀봐도 억울하고 눈물 나는디 지내놓고 보이 그것도 견딜 만했지라우..”
(중략)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술집을 나설 때 주갑은
아짐씨
비틀거리며 주모의 손목을 와락 잡는다.
애구망이나 어찌 이러지비? 늙으가므스리 앙이할 것을 한답매?”
늘고 젊고가 워디 있다요? 손 한번 잡으봤으면, 이제 돼구만이라우. 저 보란께? 얼굴이 빨개지 않았소잉? 하하핫....”
미쳤다아. 앙이 하든 짓으.”
오십이 넘어도 여자는 여자, 하하핫.... 얼굴 붉히나 안 붉히나 보고 저벗소. 하하핫....”

 

      대하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인물은 어디서는 600여명이라 하고 또 어디서는 700여명이라 했다. 100명씩이나 차이 나는걸 보면 많긴 많은데 한참 세다가 숫자 연결을 잊었던가, 아니면 많음에 압도되어 아무도 제대로 세어보지 않았던가. 아무튼 무수한 등장인물 가운데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등장할 때마다 그 장면의 주인공으로 그려짐이 소설의 특장이자 미덕이라 했다. 개성이 독특한 주인공마다 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가의 대단한 필력이 독자들에게 읽는 맛을 더해주었다.

      필력이라 하면 주인공마다의 성품과 거동에 몰입한 나머지 작가가 마치 그의 분신으로 살아 움직인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얼굴 붉히나 안 붉히나구절을 읽다보면 그걸 적던 도중에 일렁이었던 작가의 마음도 그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마저 스며들 지경이었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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