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게 내 글을 전하자니(박경리 6)

 

     소설 <토지> 주인공들의 행적을 이론지리학으로 살핀 잡지 글은 박경리작가에게 직접 전하고 싶었다. 마침 <뿌리깊은나무>(이하 뿌리) 김형윤(金熒允, 1946- ) 편집장이 작가를 잘 안다 했다. 편집장은 1975년 중반인가 브리타니카백과사전 한창기(韓彰琪, 1936-97)사장이 펴내려고 준비 중이던 뿌리의 창간요원으로 합류하기 전, 2년 반을 <문학사상>에서 편집기자, 이어 편집장으로 일했던 시절의 인연이라 했다

      대하소설 <토지> 1부는 월간 <현대문학> 연재였고(19699-19729), 2부는 197210월에 창간호를 발행한 월간 <문학사상>에 연재를 시작해서 197510월호로 끝났다. 그리고 <토지> 1부 단행본이 1973년에 문학사상의 모회사 삼성출판사에서 나왔다. 일련의 연고로 잡지 편집장이 작가와 여러모로 왕래했을 것임은 묻지 않아도 알만 했다.

      김형윤이 상대의 문장에 대해선 날카롭게, 그 상대 거동에 대해선 느긋하게 대함이 그의 인덕임은 예나 지금이나 내가 갖고 있는 인상이다. 게다가 문학청년 출신이었다. 고교 때 시를 열심히 지었던 감성으로 나중에 시 한편이 조용필 작곡의 사랑의 노래 <여와 남>(1981) 가사가 되었다. “.... 지구위의 반은 남자 지구위의 반은 여자/ - 너는 나의 밤을 밝히는 달/ 나는 너를 지키는 해가 되리라/ 너가 있음에 내가 있고 내가 있음에 너가 있다는 노랫말이었다. 가깝던 MBC PD1981년에 방송프로를 새로 맡으면서 그 구성안을 적어 달라 면서 조용필이 불러줄 TV 프로 주제곡을 위한 가사도 부탁해왔다. 그걸 받아본 대형 가수는 방송프로용 대신 자신의 넘버로 사용하고 싶다 했다. 해서 노래는 방송을 타지 않은 채 조용필 전속이 되었다.

      이런 김형윤이었기에 작가 박경리와의 왕래는 사무적 관계 이상으로 문학에 대한 경의가 함축된 그런 인간적 관계였지 싶었다. 그때 세상의 사시(斜視)에 맞서 두문불출 집에서 칩거 중이라 소문났던 작가를 언제든지 만남을 주선할 수 있다는 언질에서 그런 느낌이 들었다.

 

폐간 잡지 인력활용 방안

      함께 작가를 만나보자는 말은 했지만 그때 1980년 초여름 폐간의 벽에 부딪치고만 뿌리 편집장은 19763월호 창간이래 탄탄하게 구축해온 편집체제의 유지 방안을 놓고, “백척간두에서 한발을 뗀다(百尺竿頭 進一步)”는 옛말대로, 벼랑 끝 고심 중이었다. 드디어 잡지는 반듯이 복간할 거란 사주의 결심은 섰다. 복간 때까지 편집기자들을 풀어 조선시대의 나라 지리지동국여지승람(1421)의 현대판 <한국의 발견>을 만들기로 했다. 전국을 도 단위로 나누어 각도 편은 시군의 개별 설명 각론(各論)에 더해 시군에 공통으로 기저(基底)하는 인문적 상황에 대한 총론 기술(記述)들을 합쳐 한 권의 책이 되게 하는 기획이었다.

      듣자하니 이 기획은 꼭 내가 도우고 싶었고, 도울만한 일이라 싶었다. 우선 잡지 기고를 통해 글쓰기에 관해 내가 배운 바가 컸기 때문에 보답 차원에서 돕고 싶었다. 한글 전용의 그 잡지는 교수 등 각계 필자들이 적어내는 국한문 혼용 글을 한글 또는 한글투로 바꾸는 글자 교정, 그리고 글 내용도 매만지는 교열에 철저했다. 아주 드물게 글 고침이 마땅치 않다며 원고를 되가져간 기고자도 있었다지만 나는 담당 기자, 편집장, 사장이 차례로 읽으며 고쳐나가는 그 교정지 엿보기를 좋아했다. 그런 일로 바쁜 편집실을 찾을 때면 기관총처럼 타자기를 두들겨대는 소리가 편집 작업의 추임새처럼 들리던, 초절기교(超絶技巧) 솜씨의 타자수가 교정지 치는 작업도 아주 볼만했다. 그러는 사이 유학생 냄새가 나던 내 문체가 영문투에서 차츰 벗어나고 있었다.

      한편 현대판 지리지 프로젝트가 도울만한 일이라 여겼던 것은 우선 내 연학(硏學) 배경과 관련이 있었다. 도시계획이란 실천학문을 내 전공으로 앞세우자면 이전에 바탕인 기초과학에 정통해야했다. 어떤 이는 경제학, 또 다른 이는 건축학 등을 앞세우는데, 나는 이론지리학을 내 기초과학으로 익혔다. 이런 지적 축적을 바탕으로 시군마다의 개별 지리특성을 살핌과 동시에 시군들의 공통 지리특성도 아울러 살피도록 잡지사 편집기자들에게 훈수했고, 직접 현지 르포는 물론, 도 단위 문화특징을 개관하는 글도 적었다. 옛일을 지금 내세우기가 면구스럽지만 19834월에 드디어 출간된 11권짜리 <한국의 발견> 후기에 편집을 많이 도와주었다는 치사의 문구를 발행인 한창기가 빠트리지 않았다.

 

백척간두이긴 박경리도

      그 즈음의 상황에서 김형윤에게 박경리를 찾아가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그때까지 알고 있던 작가의 근황도 노모작가옥중에 남편을 둔 생과부 신세 외딸, 3대과부가 어린 외손주와 함께 살면서 사위 김지하 시인 옥바라지한다고 혼이 빠진 모습이 아니었나 싶었다. 이를테면 작가가 갓난 외손자를 포대기로 엎고 집 앞를 서성거리는 무척 처연한 모습의 사진도 기억났다. 그렇게 이른바 정치범을 가족 일원으로 거느린 처지에서 제아무리 열성 독자가 적은 독후감일지라도 당신의 그 시절 심경에 닿았을 것인가.

      그리고 곧 여름이었다. 신문의 인물동정란에 박경리의 원주 이사기사가 실렸다. 나중에 확인한 바로 19808월이었다. 서울 정릉집을 떠나 원주 단구동에 뜰이 넓은 집을 사서 이사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사이 당신이 모셔온 모친이 세상을 떠난 뒤라 단신으로 넓은 집으로 이사하는 대사가 예사롭지 않아 진주여고 동기생 친구 여럿이 우정 동행했고, 그 가운데 왕년의 문학처녀 출신은 몇 밤을 함께 지냈다 했다(최혜순,박경리와 나의 우정, 1994).

      내 형편 또한 작가의 문학적 향기를 맡기 위해 원주로 나들이하기엔 당면 과제가 화급했다. 2년의 박사과정을 마친 뒤 1979년 중반에 귀국해서 전임강사 자리로 복귀하고는 서울에서 논문을 완성해야 했는데 서둘러 완성한다는 것이 꼬박 2년이 걸렸다, 그리고 1982년 가을, 논문 제출 차 미국으로 가서 반년을 머물렀다.

      그 출국 때 내가 고심해서 마련한 준비물이 하나 있었다.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이었다. 영어로 인한 어려움에서 내 정체성을 틈틈이 확인하려는 소도구로 삼기 위해서였다. 배우기는 엄청 오래 배웠지만 잘못 말하는 실수를 두려워하는 소심의 성격에다 타고난 어재도 빈약해서 영어로 글을 적을 때면 이 글이 과연 내가 말하려는 적확 단어이고 문장인가, 습관적으로 회의에 빠지곤 했다.

      기껏 비슷하게 적었을 뿐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내 정체성이 불안해졌다. 그걸 보정하면서 내 정체성을 지켜줄 우리글을 가져가려고 궁리 한 끝에 서부 경남 사투리가 주조인, <토지> 1부의 전편(前篇) 같다고 소문난 <김약국>을 골랐다. 내 땅이, 내 문화가 그리울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말하자면 간간히 모국어 냄새라도 맡기 위해서였다. 왜 모국어인가. 감수성 많은 시인이 미국으로 연수 갔다가 영어로 조잘대는 그쪽 어린이를 보면서 당신 모국어에 대한 그리움을 감정이입했음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당대 시인 정현종(鄭玄宗, 1939- )<모국어>이다.

 

식당 안 저쪽 자리에서

아이들이 재잘거리다

(그건 어른 떠드는 것보다 듣기 좋거니와)

저 아이들은

제가 나고 자란 땅의 말로

재잘거린다.

저 아이들은

제 나라 말로 나눈 사랑의 말 속에

잉태되고

자란 동네 아침 공기와 저녁

연기 밴 말

여러 감정과 운명이 밴 말 속에

자라났다

우리는 소리가 나오는 목구멍의

결정적인 운명과 함께,

저 말을 하는 입의

기운과 함께,

소리와 뜻

숨쉬는 온몸과 함께

살고 살고 또 살았다,(후략)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

(무단 전재 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