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하지 못함의 포한(박경리 5)

 

       원주 외곽에 들어선 토지문화관의 개관식은 당대 작가에 대한 경배로 모자람이 없었다. 199969일 행사에 김대중 현직 대통령이 발걸음을 했던 것. 당연히 맨 먼저 축사의 말문을 여는데, 소설 속 주인공 가운데 월선이를 잊을 수 없다 했다. 소문대로 그리고 당신의 <옥중서신>에 적었던 대로, 이 대목에서 역시 대단한 독서가였음을 실감했다. 내가 진작부터 공월선의 팬이어서 그런 감탄이었던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애련 주인공의 시간지리 궤적

      <토지> 1-3부에 걸쳐 월선의 포한은 오십 평생(1868-1917), 사랑했던 정인을, 법으로 만난 사이가 되지 못했음은 물론, 한동안 같은 하늘지근거리에서도 살지 못했음이었다. 무당의 딸이란 천민 처지에서 양인(良人)인 또래의 총각 이용(1866년생)과 서로 사랑했지만, 상대방은 물론 당신 어머니도 반대가 무척이나 완강했기 때문이었다(14231).

 

이 미친년아. 이 기든년아, 그라믄 테일 데 태어나지 와 무당 문전에 떨어졌다노! 미친년아, 기든(기가 찬)년아, 와 간장에 못을 박노!“

괄괄하고 우스갯소리 잘하고 사내같이 잔정이 없는 월선네는 딸의 등을 치면서 그러나 그도 울었다.

애미 근본 모르는 데 가서 니나 팔자치리하고 살아라. 오르지 못할 낭구 치다보지도 말라캤다. 나이 먹으믄 어떻노? 다리 병신이믄 어떻노? 니 섬겨주고, 자식 낳거든 노리에 늘이나 보고 살아라. 아예 애미 찾을 생각 말고, 내사 살다 살다 신풀이나 하고 살다 살다 죽으믄 고만이다.”

 

       해서 10대 후반, 자기보다 스무 살 더 많은 절름발이 보부상에게 시집갔다가 1895년에 도망쳐 돌아와 고향 마을 평사리 30리 밖 장터에 국밥집을 차렸다. 불감청 고소원으로 용을 몰래 만난다. 동네 오광대 잔치 뒤에 국밥집으로 찾아든 용이는 니는 내 목구멍에 걸린 까시다. 우찌 그리 못 살았노. 못 살고 와 돌아왔노하다가 용이가 울었다. 월선이는 비실비실 도망치려 했다. ...그는 월선의 손목을 낚아챘다. 손목을 끌고 방으로 들어온 용이는 갓을 벗어던지고 등잔불을 불어 껐다. “어느 시 어느 때 니 생각 안 한 날이 없었다. 모두 다 내 죄다. 와 니는 원망이 없노!” 끌어안아 여자 얼굴에 얼굴을 비벼댔다. 남녀의 눈물이 한줄기가 되어 흘러내리고, 그들의 몸도 하나가 되어 높이높이 떠올라가서 영원히 풀어헤칠 수 없는 처절한 사랑의 의식을 올리는 것이었다“(118). 이 낌새를 알아차린 용의 정실 강청댁이 어느 하루 들이 닥쳤다(11305).

 

속적삼이 찢어진 데다가 서슬에 치맛말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미처 감당할 겨를을 주지 않고 다시 돌진해간 강청댁은 머리채를 낚아채서 휘감았다.

, 이거 놓고 예기하시오.”

못 놓겄다. 간을 내서 묵어도 분이 안풀릴 긴데 내가 네년을 곱게 두고 갈 성 싶으냐? 네년이 나보다 잘 났이믄 얼매나 잘났고 사내 애간장을 녹이는 기이 먼가, 어디 보자!”

그렇게 매타작을 받으면서 기껏 늘어놓는 월선의 발명이라곤 이러지 마소. 우린 옛적부텀, 아아 이러지 마소. 댁을, 댁을 만나기 전부텀.” 할 뿐이었다.

 

       무자비한 폭력을 당한 연후 1898년 경 만주 용정으로 가서 삼촌뻘 공노인(1853년생) 주선으로 국밥집 월선옥을 열었다. 여기로 최참판댁 일가와 함께 1908년 만주 용정으로 흘러왔던, 후처 임이네와 아들 홍을 거느린 이용 일가가 3년이나 더부살이했다. 1911년 가게에 큰 불이 나자 용 내외는 용정에서 백리 떨어진 통포슬 벌목장으로 떠났고 홍은 남아 양모 월선 슬하에서 학교를 다녔다.

 

아름다운 여성의 한 표상

       보기에 따라선 월선은 사련(邪戀)의 주인공이자 부정시(不淨視)되는 혼외정사의 일방이었다. 사회적 맥락은 그럴지 몰라도 인간적으론 지순한 사람의 순교자로 소설 속을 살았다. 영국 엘리자베스 브라우닝(1806-61)시인이 노래했던 당신이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 오직 사랑 때문에만 사랑해주세요조건없는 사랑의 주인공이 그녀 아니었던가.

       작가는 단언했다. “어질고 아름다운 여인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남자의 행복이라고(1173). 월선이 바로 그런 여인이었음에도, 조선시대 최하층 천민 여덟 가운데 하나인 무당이란 천형(天刑)은 피할 길 없어, 또래의 동네 아낙네들로부터 틈틈이 뒷소리를 들어야 했다. “애미가 무당이믄 딸년도 무당이지. 오리 새끼 물로 가지 어디로 갈꼬?”(11108).

       여기 소개하는 시간지리표는 <토지>에 등장하는 두 대표 가문인 최참판 일족 그리고 소작인 이용의 비속(卑屬)과 정인의 행적을 집중으로 보여준다. 특히 함께 있음(coupling)”을 삶의 질의 대표 척도로 본다면, 무엇보다 용과 평생의 연인 월선의 만남과 헤어짐을 중요하게 보여준다.

 

<소설 '토지' 주인공의 평생도> 

 

       이런 내용을 도표와 함께 글로 적어 그 시절 식자들 사이에 인기가 놓던 <뿌리깊은나무>에 기고했다. 이 나라 최초의 한글전용 월간지였다. 파급으로 <한겨레>신문이 생겨났다는 게 정설일 정도로 한국 현대문화에 끼친 영향은 막중했다. 내용상으론 사회의식형 수필을 많이 실었다. 대학교수들이 전문영역의 특정 주제를 보통사람도 쉬이 이해하고 관심을 갖게 할 요량으로 이른바 학술형 수필(academic essay)을 많이 실었던 바, 이는 고급문화를 널리 세속화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었다.

       월간지 발행 취지에 편승해서 나도 전공인 도시이론의 대중화를 통해 사회참여를 하고 싶었다. 경제 성장이 세상의 관심이 되면서 물가지수, 환율, 일인당 국민소득 등 경제학의 중요 개념들이, 도시화의 진척으로 토지구획정리사업, 건폐율, 용적률 등 도시학의 중요 용어들이 보통사람들의 일상용어로 가까이 다가온 사회추세에 부응하여 내 나름으로 훈수라 할까 지적 봉사라 할까를 좀 하고 싶었다.

       이 맥락에서 월간지에 기고했던 글이 소설 <토지>의 인물들과 오늘의 도시생활이었다. 내 딴에는 여성의 인간적 처지를 말할 때, 이를테면 밥벌이 나간 가장들이 생존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은 그걸 보고 듣고 울지 않는 아내와 딸이 없다는 식으로 말해왔음에 견주어, 집안에서 하루 종일 긴 시간을 보내는데 무슨 불평인가, 식으로 곧잘 뒷소리를 듣는 아내들이 한 집안의 하루 시간표를 갖고 그들의 시간이 토막 나는 실상을 물증으로 반박하게 할 수 있지 않나 싶었다. 이론이라는 것이 학자들이 갖고 노는 말장난이 아니라 세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언어장치임을 방증할 수 있다는 생각이기도 했고, 문학이 사회과학 쪽으로도 파생물(spin-off)을 만들고 확대재생산도 되는 그런 경지를 말해주고 싶었다.

       글은 <뿌리깊은나무> 1980년의 56월호에 실렸다. 56월호인가. ()월간지가 되었단 말인가. 5월호가 언론검열에 걸려 하는 수 없이 6월호로 통폐합해야했던, 그래서 마지막 호가 그만 합병호가 되었다. 1980년에 우리 사회 전면에 등장했던 5공이 언론계를 상대로 학살의 칼을 휘두를 때 기자는 신문사에서 쫓겨났고, 잡지는 폐간 처분을 당했다. 사회적으로 노상 삐딱한 소리만 늘어놓는다며 일종의 괴씸죄에 걸려 한달에 유가부수가 9만부나 팔린다던 무게의 <뿌리깊은나무>가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 (무단전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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