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이야기를 시작하며

 

   김동길 블로그(<석양에 홀로서서>의 “새로운 이야기”) 초대, “세상 이야기” 이름으로 목요일마다 글을 적은지 10개월. 매주 한 꼭지 적은 게 지난 4월 9일로 40회에 이르렀다. 옛적에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시사성 글을 적었던 5년 경험을 기억하며 시작한 일이었다. 

 

    지난 10개월의 경험을 말한다면 무엇보다 시의성(時宜性) 주제 찾기가 고심이었다. 교직 등 사회활동 현장⦁현업에서 물러난 처지인지라 지식⦁정보 수집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적어왔던 글 양식은 일컬어 칼럼, 아카데믹 에세이 또는 단편(斷編)이라 부르겠는데, 그 뜻풀이가 말하듯 특히 단편은 “내용이 연결되지 않고 따로 떨어진 짧은 글”인 것. 까닭에 나중에 책으로 묶을 만한 것이 못 되는 점이 스스로 성에 차지 않았다. 

 

    여러모로 성찰했다. 결론은 기왕이면 그동안 축적해온 내 필봉만이 할 수 있는 호흡이 긴 주제가 없을까, 큰 산을 오른다 싶은 덩어리가 없을까를 살폈다. 

 

 문학을 만든 사람 이야기

    고심 끝에 연재 주제를 “박경리 이야기”로 잡았다. 인연이 닿아 해방후 한국현대문학이 낳은 금자탑이라 정평난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와 오갔던 왕래에서 기억나는 바를 적고 싶은 것이다. 

 

    나는 문학평론가가 아니다. 좀 부풀려 말해도 문학애호가가 고작이다. 알만 한 사람이 어떤 문학에 감명 받았다 말하는데도 내가 읽지 못한 것이라면 마음으로 부끄러움을 여길 정도의 애호가이다. 

 

    그런데도 어찌 유명 소설가 이야기를 적겠다는 것인가. 구분이 가능한지 몰라도 문학보다 그 작가, 그 사람의 향기에 대해 적고 싶은 것이다. 전래로 “그 사람에 그 일”이란 말이 있다. 연장으로 “사람됨이 예술됨을 만든다.”는 말은, 전적은 아닐지라도 상당한, 진실이라고 수긍되는 한 그 맥락에서 내가 직간접으로 간파한 박경리의 삶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이런 작심엔 나름의 까닭이 있었다. 내성적 성품에다 창작 작업의 개인성에 집착한 작가이었고 보니 직계 존비속이 아니고는 알 수 없는 사생활은 어떠했던 가도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셰익스피어 연구에선 옷 주머니에 들었던 세탁소 전표도 따졌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당신 외동딸이 꼭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적어 주었으면 하고 기대하고 있었다. 대작가의 딸도 일대 문장이었다. 연세대 사학과 졸업으로 고려조, 조선조 불화연구에 몰입해서 단행본을 세 권이나 냈던 문장이었다. 

 

    그런 그가 박경리가 타계하고 얼마 뒤 나에게 6.25동란 발발 반년 정도 지나서든가 피난 갔던 고향 통영에서 어머니가 재혼한 적이 있다는 말을 불쑥 던졌다. 1.4후퇴 때 첫 남편을 잃은 몸이 슬하에 아들 딸 둘을 둔 처지로 그 깔끔한 인품이 그 혼란 통에 재혼을 했다니 나는 믿기지 않았다. 

 

    적어도 대하소설 <토지>가 1969년부터 발표되면서 전국적 유명세를 탄 소설가였다. 그렇다면 10여 년 전 젊은 전쟁미망인으로 재혼했던 이력은 사람 입에 오르내릴법도 했다. 1983년 여름에 원주를 찾아 처음 대면했던 작가를 이후 당신의 2008년 타계 때까지 제법 정기적으로 왕래했던 처지에서 알 만한 사람들이 알았다면 소문이라도 전해 들었을 것이 아닌가. 대조적으로 당신 지기이던 천경자 화백의 ‘다단계’ 결혼이력(결혼, 이혼, 그리고 유부남 첩실)은 예단(藝檀) 안팎에서 짜한 소문이었다. 

 

    외딸 김영주(1946-2019)가 들려준 재혼 이야기는 아주 간단했다. 상대는 통영의 한 초등학교 교사였다. 그 사실이 그때 그쪽 바닥에선 사람들 입방아에 많이 오르내렸단다. 작가 유명세를 얻기 전인데도 그랬다면 필시 젊은 시절의 당신 미모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생전에 여류 소설가의 '여류'라는 말을 무척 싫어했던 성품이 암시하듯 자의식이 강한 여성에게, “뒤끝은 없다”지만, 남성우위의식이 유별난 경상도 남자의 불뚝성 언행은 쉬이 마음의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통영과 가까운 지방의 출신인 내 짐작이긴 하지만 자전적인 <시장과 전장>에 투사한 초혼의 불편함을 기억한다면 틀림없지 싶었다. 

 

    이래나 저래나 고향 사람들로부터 뒷소리도 많이 들었을 것이다. 뒷소리 치고 좋은 소리가 없지 않은가. 6.25 종전 즈음에 다시 서울로 올라온 뒤로 작가가 고향은 찾은 것아 그로부터 무려 50년 반세기가 지난 2004년이었던 지체는 옛적 그 사건의 뒷소리도 작용했을 것이다. 

 

    오랜만의 고향방문 감회가 어떠했던가, 내가 물었다. 통영의 도심 강구안 쪽 옛 기선 뱃머리 인근의 중앙시장에 들어서자 생선장수 아낙네들도 고장 출신 유명 작가임을 단번에 알아보고 무척 반겨주었단다. 아주 자랑스럽게 그 말을 하던 당신 모습이 지금도 내 뇌리에 선연하다. 

 

  

 

문학을 감당하던 박경리의 한 많은 삶 

  박경리의 문학을 말해준 글은 많고 많다. 내가 마음먹고 하나 고른 것은 문화담당 일간지 기자의 것이다(권영빈, “<토지>의 문화현상”, <중앙일보>, 1994.10.10). 무척 압축된 단도직입이다. 대하소설이 완성되었다는 소문이 자자했을 때였다.  

 

 

 

그녀는 6.25로 남편을 잃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어렵게 외동딸을 키운다. 이 딸이 시인 김지하와 결혼하면서 군사정권의 핍박을 받게 되고 3대 청상(靑孀)이 살아가는 고달픈 나날을 겪는다. 옥바라지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한은 사마천의 궁형(宮刑)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전쟁과 군사정권 아래서 겪는 작가 개인의 참담한 삶을 개인의 불행과 불만으로 끝내지 않고 시대의 한과 서러움으로 승화시켰다는데 작가의 위대함이 있다.

 

  작가 스스로도 당신 처지를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86)에 비유했다. 사마천은 <사기(史記)>를 적었던 중국역사학의 비조. 남자가 거세되는 중형을 받고도 아버지가 시작했던 역사적기 작업을 완성했던 이였다. 

 

   우리 서화애호가들에겐 추사 김정희의 천하명품 서화 <세한도>에 붙인 발문이 태사공 사마천 이름을 친숙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무릇 사람인심이란 “권세와 이익으로 결합된 인연은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멀어 진다”고 사마천이 말했는데, 아주 드물게 그렇지 않음을 소나무 절개에 비유했던 공자의 말을 적었기 때문이었다. 

 

   시작(詩作)으로 문학을 시작했던 박경리가 직접 <사마천>을 읊조렸다.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육체를 거세 당하고/ 인생을 거세 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   (무단전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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