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릴 말씀이 없다”는 정부

 

   모두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이 엄혹한 시기에 전화가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생존도구(survival kit)임을 새삼 통감한다. 특히 스마트폰이 때 만나 제 구실을 한다 싶다. 연인끼리 또는 가족끼리 마주 앉아서도 스마트폰에 한눈팔기 일쑤라던 오명은 잠시 접고 수시수처(隨時隨處)로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원격통신의 구실을 제대로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도모하던 일의 진척도 전할 겸, 일상의 안부도 전할 겸 선배 한분에게 전화를 했다. 용건을 전한 뒤 안부를 묻자 묵혀둔 채 오래 읽지 못했던 책이나 읽을 일이고, 이럴 때 젊은이들은 출산율을 높일 용심을 해주면 고맙겠다고 당신다운 고답적 유머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어 요긴한 주변 보살핌에 이골 난 여중군자(女中君子)에게 전화를 “넣었다.” 한두 마디 오가다가 이 사회적 거리두기 시절이 “출산율 높이기 최적기”라 했던 원로 언론인의 경륜을 전하자 웃음으로 듣고 서는, 그렇지 않아도 책 읽기로 소일해오던 차 만났던 행간을 말해줄 때는 울음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책은 미국 대통령 아내 미셀 오바마의 회고록 <비커밍(Becoming)>이라 했다. 정계 최고위층들이 자리에 물러난 뒤 행적을 회고한 책을 적으면 어김없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미국 출판계 전례에 <비커밍>도 다르지 않았음은 나도 듣고 있었다. 2018, 출간 4주 만에 3백만 권이 팔렸고, 같은 해에 우리말 번역본도 따라 나왔다던데 거기서 만난 가슴 뜨거운 구절을 말해주었다.

   영부인 시절 워싱턴D.C. 월터리드 육군병원으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부상한 병사들을 문병 갔던 이야기였다. 병실 문에 눈에 띄게 붙여둔 글을 보고 감동의 전율을 느꼈던 것. 

이 방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만약 당신이 슬픈 마음으로, 혹은 내 부상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이 방에 들어오려고 했다면, 딴 데로 가보십시오. 내 부상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사랑하는 조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사랑하는 직업을 수행하다가 얻은 것입니다. 나는 무척 강인합니다. 그리고 완전히 회복할 것입니다.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의 군병원도 찾았다. 병실에 당도해선 누워 있지 않으려는 환자를 말린다고 잠시 소란이 있었다는 간호사의 말을 전해 들었다. 텍사스 출신 부상병이 심한 화상까지 입었음에도 침대보를 걷어내면서 발을 바닥에 내디디려 안간힘을 썼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따르는 최고사령관(대통령) 아내에게 경례를 붙이려고 그랬다”는 것.

   이어 321일자 조선일보 사설 하나를 보았느냐 물어왔다. 근래 드물게 만난 진실의 글이었다고 나도 마음으로 치부했던 그걸 말함이었다. 30년 전에 그 신문사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5년간 일했을 적대로라면 제일 중요 사안은 2백자 원고지 6.5매 ‘1사설’, 다음 중요 사안은 5.52사설, 글맛도 곁들인 ‘만물상’은 3.9매 준()사설인 것. 그날 1사설은 경제파탄이 예상되는 격랑에 맞서 주력산업은 꼭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2사설 둘 가운데 마지막이 진정성 100 퍼센트의 창끝 같은 예봉(銳鋒)이었다. 읽지 못했던 이들을 위해 그걸 여기에 전재한다. 제목은 <전사 군인 아내 "국군이 지오영 영리 돕는 봉인가“>.

2002년 제2연평해전 전사 군인의 아내가 국방부 청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피켓에는 "국방 의무 젊은이들 마스크 노동 동원 말라" "민간 기업 지오영에 국군 지원 웬 말이냐"라고 적혀 있었다. 정부가 지난 9일부터 매일 군 장병 70 여명을 '공적 마스크' 유통업체 지오영과 백제약품에 보내 포장 작업 등을 시키고 있는 데 대한 항의였다. 전사 군인의 아내는 "어떻게 유통 마진을 받는 사기업 영리 활동에 귀한 군 장병을 차출하느냐"고 했다.

정부 측은 "마스크 공급이 워낙 급한 상황이라 군 장병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했다. 두 업체가 마스크 공급업자로 지정된 것이 지난달 말이다. 3주가 넘었다. 마스크 560만장을 공장에서 장당 900원에 받아 1100원에 약국으로 넘긴다. 업체 주장대로 장당 마진이 '130'이라고 해도 하루 7억여 원을 번다. 막대한 이익이다. 밤샘 작업에 따른 물류·인건비 인상분 등을 감안해도 장병 70여명 대체 인력을 구할 돈은 충분할 것이다. 지금 지오영은 마스크 수십만 장을 미신고 판매한 혐의도 받고 있다.

정부는 '지오영 특혜' 의혹이 불거지자 "약국에서 마스크를 12매로 판매할 수 있도록 지오영이 재분류·포장하는 비용이 추가로 발생한다"는 해명을 한밤중에 내놨다. 하지만 시중 약국은 "2장씩 재분류된 마스크를 받아 본 적이 없고 전부 우리가 나눴다"고 한다. 정부 해명과는 딴판인 것이다. 그러다 이제는 군 장병을 지오영에 보내 마스크 포장 작업을 시키고 있다.

국가적 재난에 국민 생명·재산이 위기를 맞는다면 군 병력이 동원돼야 한다. 당연한 군의 의무다. 홍수·산불 대처나 방역 작업 등이 그런 경우다. 그러나 마스크 유통업체에서 장병들이 흘린 땀의 결과는 사기업 호주머니로 간다. 전사자 아내는 "군인이 사기업 봉이냐"고 했다. “장병 무료 노동으로 발생하는 이윤을 기업이 챙기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질문에 정부 관계자는 "드릴 말씀이 없다"고 했다.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신문의 역할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이다. 이 말대로 “사실이 그랬고 그랬다(是是)”를 적은 뒤 “아닌 것은 아니다(非非)”고 따끔하게 따졌다. 그러자 정부쪽에서 “드릴 말씀이 없다.”했다.

   정부관계자 말이 허공의 메아리처럼 들렸다. 선조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기용하는 교서에 적힌 장탄식 대목이 연상될 정도였다. 매타작을 한 뒤 남은 목숨은 전쟁터에서 죽어라고 방면시켰다가 원균 휘하의 조선수군이 거제도 칠천량에서 괴멸당하는 낭떨어지 국면을 당하자 화급하게 그 수습책이라며 임금이 말했다. (직책을 교체시키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이고 백의종군 하도록 하였던) 결과 오늘의 이런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임금도 변명의 말을 더 이상 늘어놓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헛바퀴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마스크 공장에 군인을 동원한 것에 “드릴 말씀이 없다”던 정부 관계자의 반응은 청와대 주인의 안면몰수 꽁무니 빼기로 읽혔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



 

 No.

Title

Name

Date

Hit

2524

어리석음(foolishness. stupidity)의 해악(害惡) : 실존적 불안 (5)

김정휘

2020.04.01

117

2523

미술관이 아직도 닫혔습니다

이성순

2020.03.31

362

2522

구십이자술 9 (누님 생각 2)

김동길

2020.03.30

235

2521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382)

정우철

2020.03.29

229

2520

431. 중국무술 영춘권의 일대종사, ‘엽문/葉問’이 펼치는 최후 일전!

인승일

2020.03.28

303

2519

是母是子라

여상환

2020.03.27

167

 ▶

“드릴 말씀이 없다”는 정부

김형국

2020.03.26

3411

2517

어리석음(foolish. stupid)의 해악(害惡) : 실존적 불안 (4)

김정휘

2020.03.25

59

2516

미술관이 안방을 찾아가다

이성순

2020.03.24

711

2515

구십이자술 8 (누님 생각 1)

김동길

2020.03.23

955

2514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381)

정우철

2020.03.22

272

2513

430. 세상 어느 누구의 인생이 이토록 빈틈조차 없이 꼬일 수 있을까?

인승일

2020.03.21

338

[이전] 1[2][3][4][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