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취 현대사엔 역시 사람이

 

    구십 졸수(卒壽)에 신문 연재의 착수를, 이걸 통해 한국현대사를 의미 있게 수놓았던 “백년의 인물”을 매주 살필 것이란 “개봉 박두”가 알려진 게 2017년 말이었다. 예고와 함께 곧장 현대그룹 정주영을 다뤘는데 "김 교수, 결혼하면 200억 줄 수 있는데…“라 소제목을 달고 나자 당대의 논객 긍재 김동길(肯齋 金東吉) 교수가 장차 적어나갈 글에 대한 독자의 관심은 말 그대로 ”걸기대(乞期待)“였다. 

    수면 아래에서 일말의 염려도 있었다. 당신 주관의 각종 공부방에 출입하는 문하(門下)들 눈에 여전히 건강하기로서니 구십에 연재 시작은 혹시 완성을 기약 못할 게 아닌가, 그리되면 현대사 백년의 두드러진 인물을 두루 고루 다루지 못해 여기저기에 구멍이 난 꼴이 되면 어쩌나, 그런 걱정이었다, 주변의 염려를 모를 리 없는 당사자는 오히려 태연했다. “연재가 시작되었으니 그걸 끝내라고 건강이 잘 받혀줄 것!”

    과연 약속대로 시작 2년 만에 “백년의 인물” 100회 분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우여곡절은 있었다, 글 읽는 기쁨이 한창 고조되던 2018년 세밑, 12월 22일자 54회 김일성 이야기로 조선일보가 연재를 끝냈던 것. “하루 소식”이라는 뜻의  ‘일보(日報)’를 내는 신문사 ‘하루살이’ 체질에서 한해살이 연재를 마쳤으니 당초 기획은 실현 됐음이든가.  

 

노익장 집필의 높은 경지 

    긍재의 생각은 달랐다. 100 사람을 다루겠다던 스스로의 약속에 따라 당신 블로그 “석양에 홀로 서서”에 연재를 이어갔다. 그리고 2017년 11월 11일에 연재를 시작한지 꼭 2년만인 2019년 11월 16일에 마침내 당신의 애제자인 ‘국민아나운서’ 김동건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대단한 집념과 지성이 일구어낸 인물기의 대장정이었다. 일주일에 한 꼭지씩 짧은 글이나마 사람의 전모를 파악하는 일은 정말 아무나 다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손가락 근력이 떨어져 직접 글 적기가 어려운 형편이라 받아 적기 해주는 실무 조력자가 있긴 했지만 인물의 생애 줄거리는 대부분 긍재의 비상한 기억력이 근간이었다.  

    백세 전후로 오래 살아낸 세월에 대한 회고담이나 신변담은 달리는 몰라도 한⦁중⦁일에서 간혹 산견되었던 바다. <100세 시대를 살아갈 비결>을 펴낸 일본 의사 히노하라 시게아키(日野原重明, 1911-2017)나 <100살의 힘>을 펴낸 일본의 세계적 여류 추상화가 시노다 도코(篠田桃紅, 1913- ), <다 지나간다>의 중국문헌학자 지센린(季羨林, 1911-2009), 그리고 우리 철학자 김형석(1920- )이 고령 노익장들이었다. 

    노익장의 글도 신변담 정도가 아니라 오랜 연구 끝에 다다른 높디높은 관조로 세상사를 꿰뚫는 감동의 명저도 없지 않았다. 일본의 한문학자 모로하시 데츠지(諸橋轍次, 1883-1982)가 타계 직전 아흔아홉에 동양철학의 정수를 한 눈에 조감한 <공자⦁노자⦁석가>를 펴냈다. 마침내 엊그제 단행본으로 묶여진 긍재의 <백년의 인물>(나남, 2020)도 만 2년에 걸친 집중과 집념으로 일군 집필이었다. 

 

링컨 생일 출간

    출판사도 노객(老客)이 인물로 풀어쓴 한국현대사에 감동해서 책 출간에 무언가 의미부여할 방도를 고민했다. 큰 스승 백낙준 총장이 당신 문하가 최고 무비(無比)의 링컨학자임을 미쁘게 여겨 링컨의 한자 표기 ‘림긍(林肯)’에서 ‘肯(긍)자’를 따고 당호를 말하는 ‘집 재(齋)’를 붙여 아호로 ‘긍재’라 지었음에 착안했다. 설령 그 날짜에 앞서 책이 출간될지라도 발행일은 링컨의 생일 2월 12일자로 진작 확정해 놓았다.

    링컨의 언행을 좌우명으로 삼아왔던 긍재인 만큼 당신의 글 적기도 당연히 거기서 배웠던 바였다. 무엇보다 유머가 있는 스타일의 지향이었다. 

    긍재가 자주 주위사람들에게 들려주던 일화가 있었다. 각료회의 때마다 우스개로 말문을 열자 한 각료가 링컨에게 남북전쟁의 전시 상황이 시방 엄중한데 어찌 우스개로 회의를 시작하느냐, 볼멘소리를 했다. 즉각적 반응은 “그럼 울면서 회의를 시작할까요?!” 

    감화를 받으면 흉내라도 내봐야 한다. 긍재도 연희캠퍼스 스승들에게 품었던 정겨운 마음을 우스개 일화로 슬쩍 담아냈다. 외솔 최현배는 해방직후 ‘소리글자’ 한글의 전면 사용이란 국가 시책의 선봉장이었음에도 말소리는 심한 경상도 사투리 고질이었다. 강의실에서 해방을 ‘해뱅’이라 발음했음을 귀 밝은 수강생이 아직도 잊지 않았다.

    두 번째 대통령 취임 연설(1865)에서 링컨은 “아무에게도 악의를 품지 말고 모두에게 자비심을 가지며”라는 명언도 남겼다. 당연히 긍재의 생활 신조가 되었다. “인생은 괴로우나 아름다운 것“이라 입버릇처럼 말하는 당신의 인생론도 따져보면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일구어낸 빙산의 일각 같은 아름다움도 ‘괄목상대’ 곧 ”눈을 비비고 상대방을 바라보자“는 방식이었다. 등소평이 문화혁명의 죄업에도 불구하고 모택동 받들기를 “공이 일곱이고 허물이 삼”인 ‘공칠과삼(功七過三)’으로 긍정 평가했던 혜지를 소중하게 준거해보자는 식이었다.  

    이런 시각의 긍재에게 가장 못마땅한 세상 짓거리 하나는 정치로 오염된 작금의 친일파 단죄론이다. 고보를 졸업하고 국민학교 교사로 반년 일했고, 징병에 끌려갔던 단 한분 가형(家兄)이 종전 직전에 전사했던 가화(家禍)를 겪는 등 그 시대를 누구보다 아프게 직접 당했던 처지에서 말하는 바로, 일제 강점기를 어렵사리 살아낸 사람들을 너그럽게 바라봐야 마땅하다고 열변해왔다. 일제 식민통치세력의 패악에 대한 비판도 입이 모자랄 판인데 동족 비판에 더 열을 올리는 지경이 천부당만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시각으로 일제시대를 살아냈던 상당수 백년의 인물을 살폈다. 이를테면 해방 직후 이른바 친일파를 척결한다고 생겨난 반민특위가 일제에 군용기를 헌납했다며 조선인 제일 부자 화신백화점의 박흥식을 그 1호 단죄의 대상으로 지목했다. 조사 결과는 정말 뜻밖에도 일제하의 종로경찰서가 그를 요시찰인으로 결정했다는 서류가 나왔던 것. 안창호가 1937년 대전 감옥에서 병보석으로 풀려날 때 그 보석금을 박흥식이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야기는 재밌다 

    지리도 그렇지만 역사도 사람이 만든다. 우리 현대사가 일군 성취는 4천년인가를 헤아린다는 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영광스런 대목이었음은 어지간한 연배의 사람들이 모두 실감, 공감, 통감하는 바다. 거창한 보기는 제쳐두고 보릿고개라는 연례⦁계절적 국민기근이 사라진지도 아직 반세기가 채 되지 않았다. 미곡 자급으로 보릿고개가 막 내렸다고 정부가 확인한 것이 겨우 1977년이었다. 

    이런저런 현대사의 성취들은 ‘사람’이 있어 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한국현대사는 다수 출현한 좋은 역군들이 엮어낸 역사였다. 일본 근대화는 19세기 중반 걸출한 인재들의 일시⦁집중 출현으로 점화⦁발화했다고 하던데, 인재의 동시다발 출현의 역사는 바로 20세기 후반 한국의 역사였다. 

    긍재의 백년의 인물은 그런 인재들을 집중으로 다루었다. 일본의 유서(類書)처럼 영어 등으로 번역되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게 사람이야기다. 이 책은 재미에다 공부도 된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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