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는 품격 있고 우아한 파스텔 색입니다

 

러시아는 무슨 색이 연상되느냐고 친구에게 묻는다. ‘빨강’ ‘회색’ ‘어두운 회색이라고 답한다.

 

30년 전 198910. 구 소련시대에 제32차 세계유엔협회연합회 총회 (WFUNA)에 참석하는 남편을 따라 모스크바에 갔다. 공항귀빈실에서 간단한 입국절차를 거친 후 어두컴컴한 거리를 지나 붉은 광장 앞 러시아호텔에 짐을 풀고 일행들과 모스크바강을 내려다보며 철의 장막으로 기억되는 소련에서 보내는 첫 밤의 흥분을 가누지 못해 술잔을 기울이던 오래전 생각이 떠오른다.

 

지난 달 9. 태풍 링링의 영향으로 모스크바행 대한항공 KE923편은 예정시간 11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륙하여 고생 끝에 모스크바공항에 도착한 것이 새벽 2시다. 숙소인 모스크바 강이 내려다보이는 래디슨 스라비안스카야 호텔에 짐을 풀고 나니 새벽 5시다. 30년 만에 다시 찾은 모스크바강을 내려다보는 감회로 밤을 홀랑 새운다.

 

30년 전 모스크바 가을은 금방 눈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시커먼 하늘과, 어두컴컴한 거리는 겨울이 밀려오듯이 을씨년스럽고 도시는 온통 잿빛 회색을 띄고 있었다. 소련이 러시아로 바뀐 지 4반세기가 지났는데 내 머릿속의 러시아는 아직도 우울한 잿빛 회색이다. 그러나 우중충하였던 내 기억속의 강은 간데없고 휘황한 조명을 받은 멋진 철교와 멋진 강이 보인다.

 

한 밤중에 마주한 모스크바 거리는 낮은 건물들이 주는 편안함과 밝고 깨끗함에 놀란다. 이른 새벽 날이 밝자마자 호텔 밖으로 나가보고는 더 놀란다. 건물들은 중세시대 궁중의 조각들을 그대로 살린 연노랑에 연 연두, 연 파랑에 연노랑과 같은 파스텔 투톤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한 블럭 거대하게 자리하고 있다. 가끔 눈에 띄는 러시아정교 사원들의 반짝반짝 빛나는 금색 돔 (dome)들이 도시에 생기를 준다.

 

모스크바 도심 어느 곳에도 서울에서 흔히 보는 높은 유리 건물이나, 돌출 시멘트건물, 요란한 광고판 하나 보이지 않는다. 법적인 제한으로 외관은 바꿀 수 없고 내부는 용도에 따라 현대식으로 바꿀 수 있다한다, 모스크바는 30년 전의 우울한 잿빛 회색에서 벗어나 부드럽고 따스한 파스텔화를 연상시키며 화려하나 천박하지 않고 우아하며 품위를 풍긴다.

 

30년 전 크레믈린 궁 앞의 국영백화점 을 찾았을 때는 물건도 손님도 없고 매장은 텅 빈 채로 초라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한 블럭을 다 차지한 러시아 궁궐스타일의 3층 초현대 건축디자인에 세계의 명품들로 가득하고 젊은 남녀 멋쟁이들이 두 손에 쇼핑을 가득한 채 밝은 얼굴로 백화점카페에 앉아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크레믈린 궁전 대극장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들어가고, 극장에 들어서자마자 코트를 맡기고 드레스와 양복으로 정장한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수도 없이 보아온 러시아의 전설 같은 이야기 백조의 호수를 크레믈린 대극장에서 관람한다는 감격과 함께 4막의 현대적인 무대장치를 보면서 발레의 종주국임을 실감한다.

 

내게 모스크바의 색은 문화와 전통이 살아있는 격조 높은 파스텔 톤이고, 백조의 날개 같은 눈부시고 우아한 백색이다.

   

이 성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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