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설렁탕 배달원-1

 

나는 어렸을 적에 무척이나 몸이 약했었다. 여름이면 빠짐없이 학질로 고생을 했고, 겨울이면 어김없이 감기몸살로 해서 부모님의 속을 무척이나 태워 드렸다.

당시 친척 할아버지뻘 되는 분 중에 한학(漢學)을 깊이 공부하신 어른이 한 분 계셨다. 그 할아버지께서는 나를 볼 때마다 늘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아무리 머리가 영리하고 뜻이 커도 몸이 약하면 뜻을 이룰 수 없으니 세상사(世上事) 신외무물(身外無物)이니라’는 고사(故事)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일러주셨다. 그 말씀이 잠재의식에 박히었던지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격투기의 일종인 유도를 하게 되었다. 6.25동란으로 잠시 중단하였으나 수복 후에 다시 계속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련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했다. 처음에는 체력단련을 위해 시작한 것이 하나하나 새로운 기술을 익혀 가는 맛에 나도 모르게 깊이 빠져들었던 것 같다.

학교 선수 생활도 꽤 오래했다. 매달 열리는 시합을 통하여 기량을 겨루곤 하였다. 그 많은 시합을 치르면서 이기기도 하고 더러는 지기도 하여 일일이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는 시합이 하나 있다.

어느 해인가, 8․15 경축 무술대회 때였다. 서울시 예선전을 거쳐 최종 결승전을 서울운동장에서 하게 되었다. 이때 최종 결승에 오른 두 학교가 나의 모교와 S공고였다. 대항전을 할 때의 유도는 보통 5인 1조로 겨룬다. 처음 나가는 사람을 선봉(先峰), 그 다음이 2위, 중견(中堅), 4위, 주장(主將)의 순이다. 카메라맨들의 플래쉬 세례를 받으며 격돌이 시작됐다. 우리 팀에서 뼈가 하나 부러지는 부상자가 나오는 등 격전을 치른 결과 2대2 동점, 연장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10분간 휴식을 취한 후에 대표자전(代表者戰) 한판 승부로 우승을 결정짓게 되었다. 주장전(主將戰)에서는 내가 나가게 되었다. 상대팀 주장으로 육척거한(六尺巨漢)의 H군이 나왔다. 나는 체구가 작았기 때문에 업어치기와 목조르기를 전문기술로 닦아왔고, 상대방은 ‘허리띄기’가 일품인 역사(力士)였다.

일진일퇴,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체력에서 뒤지는 나로서는 시간을 끌고 있을 수가 없었다.「안뒤축걸기」기술로 밀어부쳤다. 이때 순간동작 과정에서 왼쪽 엄지발가락이 매트리스 이음새에 끼면서 몸이 비틀하고 중심을 일는 순간, 상대의 허리띄기 역공에 걸려 실패하고 말았다. 심판의「한판」선언과 함께 우승에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잘 싸웠다는 동료들의 위로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로 인해 준우승에 그쳤다는 자책감과 송구스러움이 가슴 아프게 저려오던 그 때의 쓰라린 기억이 오랜 세월이 흘러간 지금에도 오히려 뇌리에 생생하다.

그때의 패인(敗因)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선봉으로 나갔던 친구가 어깨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한 것을 보고 끓어오르는 적개심에 목조르기로 상대의 숨통을 끊어 놓겠다고 덤빈 것이 몸의 긴장을 더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 결과 평상심(平常心)을 잃게 되었고, 술(術)에서 기본이 되는 리듬과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래서 지금도 간혹 업무를 추진하다 과로하게 되면 ‘평상심(平常心)’하고 중얼거리면서 일의 템포를 조절하고, 그 당시를 생각하며 자계(自戒)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여기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그 날의 승패가 아니라, 그날 나와 겨루었던 H군에 관한 이야기이다.

H군은 무척이나 가난하고 불우했었다. 어려서는 설렁탕집 배달원 생활로 간신히 생계를 이어왔다. 그 때 마침 경무대 경찰서에 있던 어떤 분이 H군의 건장한 체구와 성실성을 높이 사서 그를 유도에 입문시키고 학비도 대어 공부를 시킨 것이 오늘의 H군이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물론 H군은 설렁탕 배달도 열심히 해 가면서 정진했었다. 본인은 공부보다는 운동이 더 적성에 맞는 것 같다면서, 이것으로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피나는 수련을 쌓았다. 하체 단련을 위해 남산 신궁(神宮)터 돌계단을 토끼뜀으로 오르내리고 심장 단련을 위한「아령 들고 달리기」등 오직 유도를 위한 일념으로 정진했다.

그 후 그가 미국으로 갔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 소식이 끊기었다가 작년에 내가 보스톤에 갔을 때 소식을 듣게 되었다. H군은 미국의 명문 중에서도 손꼽히는 예일대학의 체육과 주임교수로 있으며, 전미유도심판위원회(全美柔道審判委員會) 위원장직을 맡아 맹활약을 하고 있다고 했다.

꾸준히 갈고 닦은 H군의 노력에 머리가 숙여졌다. 또한 어려서 설렁탕 배달을 했건, 우동 배달을 했건 개의치 않고, 동양인이라는 것도 가리지 않고, 유도 한 분야에서만은 자기네들보다 앞서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여 명문대학의 주임교수로 맞아들이는 그들의 대륙적(大陸的)인 풍토가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H군의 생애의 음미이다. 설렁탕 배달원에서 명문대학의 체육과 주임교수가 되기까지의 도정(道程)은 뼈를 깍고 살을 에이는 연마의 일생이었다. 기술의 정진을 위해서는 거의 미친 경지에 가 있었던 것이다. 자기의 허점을 철저하게 분석․보완하고 계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서 갈고 닦는 송곳이 마침내 두터운 벽을 뚫고 나오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나는 여기서 H군의 경우와 연결하여 우리 회사의 장래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 회사의 특징으로서 우선 규모의 방대성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우리 회사의 예산규모가 손익예산 1조 8,545억원, 기타 자본예산, 원금상환, 재고증가 등 총 2조 3,795억원이었다. 우리나라 총예산의 1/4보다 많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개발도상국은 산업의 발전 속도보다 이를 지원해 주는 금융시장 또는 재정지원 기능이 약한 것이 일반적인 통례이다. 더욱이 총예산의 35%룰 국방비로 계상해야 하는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만의 하나라도 당사가 부실화되어 나라의 부담이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철강업이 갖는 직 간접 파격효과를 감안할 때 이를 극복하고 구제할 방도가 없게 된다. 우리는 내외자 1조 5,200억원이 소요되는 광양제철소를 우리의 힘만으로 건설하겠다고 선언하고 대 역사를 펼쳐갔다. 장래에 대한 차원 높은 전망, 현상에 대한 치밀한 분석, 과거에 대한 엄격한 반성과 교훈의 도출 등 모든 면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도록 정밀․대담하게 관리해 나가지 않으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는 여건의 변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전에 일본경제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보면, 자기들이 지도하고 기술지원을 했던 포철로부터 도리어 자국시장을 잠식당한다는 뜻에서 당시「부메랑」원년이라고 선언하고 있으며, 무제한 기술협력의 시대로부터 선별기술협력의 시대로 돌입한다고도 선언하고 있다. 따라서 사실상 판매활동의 제약과 기술보호의 곤란 또는 불가능의 시태가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더욱이 환경변화에 대응해 나가는 일본 철강업의 경영전략을 보면 국제시장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이윤극대화 실현을 위해서 낮은 조업률, 높은 가격유지를 수단으로 하여 손익분기점을 최대한 낮추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 노력의 방향은 원료의 안정공급, 조업기술 향상, 설비의 합리화․신예화(新銳化)를 통한 원가의 최소화와「모니터링」시스템 등 강대국의 눈치를 살피는 외교의 강화, 고가품의 Share 확대 및 수요자가 요구하는 제품의 개발 등의 매출액 증대 노력으로 압축되고 있다. 특히 원가의 최소화, 매출액 증대라는 노력 방향 중에서도 양편 공히 신기술의 개발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네들은 판매 확충을 위한 제품의 고급화를 추진할 것이고, 당사로서는 이를 위한 신기술 보호가 벽에 부딪치게 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여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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