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바람 속의 공동체

 

예부터 우린 민족은 정이 많았다. 자기 것만 챙기는 얄미운 부자를 풍자하는 이야기들도 있지만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례들은 언제 들어도 아름다운 미담으로 남아있다. 서로 모른 척하고 지낼 수 없도록 하는 이 정은 한국적 유대 관계에 있어서 끈끈한 접착제 역할을 해왔다. 이 정이 많은 심성은 사람들을 좋아하게 만들고 함께 어울려 일하고 더불어 놀기를 좋아하는 민족성으로 발전되어 왔다.

우리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은 서로의 공존공영을 도모하는 협동형 가치로서 상대편의 존재가치를 인정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상대방과 운명을 같이 하면서 살고자 하는 공동운명체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의 진정한 삶이란 남을 도와주고 도움을 받는 것으로 보는 홍익인간의 윤리적 이념이 우리 민족의 정신적 바탕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옹색한 소아(小我)를 버리고 커다란 대아(大我)에 사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 가치는 다름 아닌 협동심의 소산이다.

농경사회 유지에 가장 큰 힘이 되었던 두레도 농업사회의 환경과 이웃의 어려움을 모른체 하지 않고 꼭 참견하는 민족성이 만들어낸 당연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일상생활은 개개인의 능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서로의 능력과 힘을 합쳐 함께 누리는 생활이었다. 각자 자신의 논에 모를 혼자서 심는 것보다 함께 모여서 같이 하는 것이 더 신나고 재미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두레 논이며, 부녀자들이 모여 목화를 따는 일부터 옷감을 짜는 일까지 일의 흐름을 끊지 않고 담소 속에 그 일의 호흡에 맞는 소리는 주고 받으며 즐겁게 일했던 것이 두레 길쌈이다. 이 밖에도 일감의 종류에 따라 김매기 두레, 풀베기 두레 등 두레의 종류는 다양하다.
이 두레 조직은 차례로 돌아가면서 마을 내의 모든 일들을 순서대로 해낸다. 이 두레패들이 시작하는 아침은 어둠이 채 가시기 전부터 서둘러 시작된다. 꽹과리와 장고소리를 내며 머리에 패랭이를 쓴 남정네들이 나타나고, 뒤이어 아침상을 급히 치운 아낙들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치마 옆구리에 호미까지 꿰어찬채 소고를 들고 나타난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면 나이가 많고 농사경험이 많아 두레의 주관자가 된 좌상(坐上)이 상쇠의 쇳가락에 맞춰 일터에 나갈 사람들을 확인하고 곧이어 키 큰 장정들이 농기를 들고 꽹과리, 북, 징을 두들기며 앞서고 아낙들은 소고를 두드려 장단을 맞춰가며 뒤따른다. 힘차게 시작되는 농번기의 아침이다.

일터에 도착하면 근처 높은 곳에 기를 꽂은 다음 한바탕 놀면서 서서히 신바람을 돋구어 일심동체가 되어 일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다. 그리고 일렬로 늘어서서 소리를 메기고 받으면 일을 시작하고 일하는 중간에 논두렁에 둘러 앉아 새참과 막걸리를 먹으며 기운을 북돋아 다시 호흡을 맞추는 놀이마당을 잠깐씩 가진다. 해질 무렵 일이 끝나면 풍물을 치면서 앞장서는 사람, 소리를 하는 사람, 거기에 맞춰 어깨춤을 추는 사람 등이 어울려 하루의 피로를 흥겨움 속에 풀며 마을에 들어온다. 또 이 두레패들은 김매기를 마치고 돌아와 마을을 돌고 서낭당에 가서 농기를 세워놓고 호미걸이, 호미씻이, 풋굿, 파접이라 부르는 두레굿을 벌이기도 한다.
오늘날 농군들이 두레를 짜 김을 매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지만, 놀이마당 공연에 맞도록 다시 꾸민 두레굿은 종종 볼 수 있다. 이렇게 민속놀이로 재현되는 두레굿 놀이에서는 좌상의 지휘로 농악을 치며 꽹과리, 장고잽이는 삿갓을 쓰고 소고잽이는 홍창옷에 어사화를 쓰고 굿가락에 따라 춤을 춘다. 백중날, 농사가 잘된 집의 머슴을 두레장원으로 정해 황소 등에 태워 농악을 울리며 마을을 돈 후 주인집에 가서 술과 음식을 들며 즐기는 두레놀이를 하기도 하고, 두레패와 이무기놀이, 두레풍장굿 등을 펼치기도 한다.

조선 중엽 이후 널리 퍼졌던 향약도 우리 민족의 공동존재에 대한 강한 운명의식을 보여준다. 최민홍 교수의「한철학」에도 나와 있듯이 향약에는 마을 사람들이 뜻밖의 화재나 수재를 당했을 때, 도둑이 들어 재물의 손실을 보았을 때, 질병이나 초상을 당했을 때, 생활이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이 있을 때, 남의 무고를 입어 억울한 입장에 놓인 사람이 있을 때 온 마을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도와주는 정신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에서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들이 교황청에 보낸 한 보고서에도 ‘조선 사람들은 힘으로 뭉치면 약하지만, 정으로 뭉치면 로마 병사보다 강하다’라는 기록이 있듯이 이웃이 어려움을 당하면 십시일반(十匙一飯)의 마음으로 남녀노소, 빈부귀천 가릴 것 없이 서로 나서서 도왔던 환난상휼(患難相恤)의 민족성, 네일, 내일 가리지 않고 함께 하는 한 울타리안의 ‘우리’라는 상호 공존의식은 우리 민족의 삶의 뿌리를 깊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두레와 같이 형성된 협동조직이 아니더라도 농업용수를 대기위한 물꼬트기, 홍수를 피하기 위해 방죽을 쌓는 일, 길을 닦는 일 등 다른 어느 민족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진하고 끈끈한 이 협조정신은 이기심 없는 신바람의 마당 속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날 수 있었다.

신바람 속에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절묘한 협동작업이 있다. 바로 세 사람 또는 여섯 사람이 마치 한 사람이 하듯이 호흡을 맞춰 하는 가래질이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은 흙을 파서 옮길 때 작은 일에는 호미나 괭이, 삽을 쓰고 큰 일에는 가래를 써왔다.
이 가래에는 세 사람이 붙어 일하는 외가래와 여섯 사람이 함께 일하는 육목가래가 있다. 외가래는 두 사람이 가래에 달린 끈을 당기고 장부되는 사람이 가래자루를 잡고 동작을 맞춰야 되고 육목가래는 작은 가래를 나란히 두 개를 붙인 것으로 네 사람이 가래줄을 당기고 두 장부가 가래자루를 잡고 동시에 움직여야 흙을 파서 던질 수 있다. 육목가래는 그만큼 흙이 멀리 던져지기 때문에 큰 공사때 사용되었다.

독일의 안드레 에칼트(Andre Eckardt)는 그가 쓴「한국 체험기」에서 유럽 사람들은 흙공사를 할 때 혼자서 삽질을 하는데 비해 한국 사람들이 한 사람이 삽을 잡고 두 사람은 각기 거기에 달린 끈을 잡아당기면서 일하는 것을 보고 한국 사람들의 협동심을 높이 찬양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외가래나 육목가래나 모두 듣는 사람도 흥겨운 가래질소리와 가랫 장구를 해가며 그 장단에 맞춰 힘든 일을 재미있고 쉽게 해냈다. 먼저 한 사람이 가래를 잡고 흙을 뜨면서 선창을 하면 나머지 몇 사람이 같이 당기면서 후창을 한다. 되풀이되는 그 가락에 맞춰 몇 사람이 하나처럼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속도가 차츰 빨라지는데도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일이 척척 진행된다.
이 가래질은 절묘한 삼박자의 원리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한쪽이라도 호흡을 맞추지 못하면 흙이 제대로 떠지질 않는다. 어떤 규정이나 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움직임을 내 움직임처럼 감각적으로 느끼고 호흡을 맞출 줄 알아야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잡아당기고 떠미는 힘과 방향이 서로 다르면 이 삼각형의 역학논리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분업이 아닌 마음과 몸이 한덩어리를 이루어야만 가능한 오묘한 한국적 협동의 특징이 내재되어 있는 노동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어쩌면 대립된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일과 놀이를 가락과 몸짓을 통해 일어나는 신바람 속에서 조화를 이루게 하고 있다.
고대 제천의식에서 형성된 신바람이 저변에 흐르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은 신명이 나야 모든 일에서 서양의 분업주의, 합리주의가 따라갈 수 없는 초인적인 능률을 발휘한다. 이 신바람에 휩싸이면 자기의 이익만 생각하는 소아적인 틀에서 벗어나 보다 큰 공동체 이익을 위해서 기꺼이 힘을 다하는 커다란 자아가 나타난다. 생활공동체로 묶여진 여러 사람들이 마음을 합하고 호흡을 맞추면 저절로 신이 나고 거기다 풍악소리라도 곁들여지면 흥은 고조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과 놀이가 함께 어우러지는 신바람 나는 삶의 장면이 연출된다.

여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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