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영의 세상이야기]326.고려 제일의 충신 포은(圃隱)정몽주

 

목은(牧隱)이색, 포은(圃隱)정몽주, 야은(冶隱)길재.

이들을 일컬어 고려삼은(高麗三隱) 이라하는데, 오늘은 이 삼은 중에 뛰어난 정치가이자 외교관이며 유학자였던 충신 포은 정몽주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난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위 《백로가(白鷺歌)》란 시조는 정몽주의 어머니가 평소 어린 아들의 영민함을 알고는 훗날 간신들의 무리와 어울리지 않도록 가르치고 훈계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유년시절, 정몽주는 아버지 정운관과의 친분이 있던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이색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성리학을 배우게 된다.

스승은 정몽주에 대해 “학문에서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항상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며 극찬하고도 모자라 ‘우리나라 성리학의 대가’라고 평가했다.

이후 정몽주가 성균관의 박사로 재직하며 유교의 경전을 강의하던 당시, 고려에 들어와 있던 경서는 북송학자 주희의 《주자집주(朱子集註)》밖에 없었으나, 정몽주의 강의에는 전혀 막힘이 없었다. 이후 송나라의 유학자 호병문의 《사서통(四書通)》이 전해지면서 정몽주의 이론과 서로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보고 학자들은 저마다 탄복하였고, 대사성 이색은 그런 정몽주의 학문을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석학’이라 칭하였다.

고려 말의 조정은 소위 친원파와 친명파가 극한 대립을 하고 있었는데, 날로 부강해지는 명(明)나라를 두고 점점 쇠퇴해지는 원(元)나라와 가까이 지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며 정몽주는 고려의 친명 정책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한편, 친원파의 수장이자 이성계의 정적이었던 이인임은 공민왕을 암살한 최만생과 홍윤의 일파를 모두 처형하고 공민왕의 아들 우왕을 옹립하여 정권을 잡은 뒤 친원정책을 견지하여 친명정책을 주장하던 신하들을 숙청했다.

고려와 명나라의 사이에 자꾸만 분란이 생기자 명나라의 태조가 발충관하여 장차 고려에 출병하려 할 뿐만 아니라 매년 보내는 토산물을 증액시키고, 지난 5년간 토산물을 약속대로 보내지 않았다며 사신의 볼기를 치고 유배를 보내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 상태에서 명태조의 생일이 다가오자 조정의 대신들은 저마다 핑계를 대며 사신으로 가기를 꺼렸다. 이때 친원파들은 정몽주를 사신으로 추천했다. 친명파인 정몽주를 제거하려는 음모였다. 더군다나 명나라의 수도 남경까지는 대략 90일 정도가 걸리는데, 명태조의 생일은 불과 60일 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다. 정몽주는 밤낮을 달려 명태조의 생일날 무사히 축하문을 전했다. 더 나아가 정몽주는 지금까지 밀렸던 조공 일체를 면제받고 유배되어있던 사신들을 무사히 귀국시키는 엄청난 공을 세우니 정몽주의 외교능력의 탁월함을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378년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가던 중 조상의 고향인 전주에 들러 종친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면서, 자신이 고려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속내를 내비친다. 종사관으로 황산대첩에 이성계와 함께 참가했던 정몽주는 이 말에 적원심노(積怨深怒)하였다.

명나라의 요구에 고려 조정은 당장 전쟁을 하자는 최영파와 외교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자는 이성계파로 나뉘었다. 이때 정몽주는 이성계와 의견을 같이했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가 창왕을 폐하고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옹립할 때에도 뜻을 같이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고려왕조를 없애고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세우려는 계략임이 분명해지자 정몽주는 더는 같은 길을 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성계와 같았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의 급진적인 성향도 다를 바 없었지만, 고려 왕조만은 지켜야 한다는 게 정몽주의 신념이었다.

1392년 3월,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몽주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 기회에 이성계일파를 제거해야만 고려의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있다고 판단한 정몽주는 우선 언관들을 시켜 정도전, 조준, 남은 등 이성계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당시 유배 중이던 정도전은 감금시키고, 그들의 추종세력들은 귀양을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아버지의 귀경을 재촉했다. 이성계는 부상당한 몸으로 급히 돌아왔다. 정몽주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병문안을 핑계로 직접 이성계를 찾아갔다. 이성계는 평소와 다름없이 정몽주를 맞았지만, 방원의 생각은 달랐다.

그날 정몽주와 이방원의 만남에 《하여가(何如歌)》,《단심가(丹心歌)》라는 시조와 함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방원은 술상을 차려놓고 《하여가》로 정몽주의 마음을 떠본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에 정몽주는 단호한 자신의 마음을 《단심가》로 표했다.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없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정몽주의 마음을 분명히 알게 된 이상 그를 살려둘 수는 없다고 판단한 방원은 자객을 시켜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였다. 1392년 4월 4일 정몽주의 나이 56세였다.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가 도당을 만들어 나라를 어지럽혔다.”며 다시 효수하고, 정몽주와 뜻을 같이했던 문신들을 모두 색출하여 유배를 보내니 이제 더는 그들을 견제할 만한 세력은 없었다. 그로부터 석 달 뒤인 1392년 7월 이성계는 공양왕을 내치고 왕위에 올라 새로운 나라 조선(朝鮮)을 열었다.

정몽주가 죽은 뒤 13년이 지난 1405년, 태종 이방원은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새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조선에도 정몽주와 같은 충신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정몽주의 충절은 선죽교에 흘린 피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전설로 남았고, 그의 학문과 이념은 조선의 사림파에게로 이어졌다.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고려 제일의 충신 정몽주의 의로운 죽음은 600년이 훨씬 넘은 오늘까지도 모두에게 큰 귀감이 되었고, 그 숭고한 정신은 절개의 상징이 되었으며 앞으로 수천 년이 지난 먼 후대에도 변함없이 계승되어질 것이다.

〈2018.05.17. 한림(漢林)최기영〉ericchoi11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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