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여성 도착하다 2_ 말 한마디

 

“성순아!! 나는 네가 졸업 후 더 공부했으면 좋겠고, 이왕이면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면 좋겠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남편에게 묻는다.“ ”여보! 우리 결혼식에 김인승 선생님 부부가 오신 기억나요?” “아니! 갑자기 그 옛날 일은 왜 묻는데. 언제 이야기인데. 잘 생각이 안 나네.” “ 난 두 분이 참석한 걸 분명히 기억해요. 사모님이 멋진 코트를 입으신 거까지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오래된 결혼 앨범을 펼치기 시작한다. 내가 생각한데로 희끗한 머리의 노신사와 깃에 털이 달린 멋진 코트를 입은 사모님이 커다란 선물을 들고 YWCA마당으로 들어서는 뒷모습이 여러 사람들 중에서도 눈에 띈다.

2017년 마무리와 2018년 새해맞이를 호젓이 걸으며 또 생각하며 조용히 보내고 싶었다. 평생 내가 버틸 수 있었고 큰 힘이 되었던 ‘여성’이라는 두 글자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신여성’ 전시장을 찾아 나섰다. 살얼음이 살짝 깔린 고궁을 조심스레 걷다가 여성이라는 단어에 이끌려 찾은 전시장 한 벽면을 가득채운 김인승의 1942년 작 대형 유화작품 2점과 마주하고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발을 뗄 수가 없다. 은발에 키 크고 멋쟁이며 온화한 인품을 가진 선생님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귀에 들리며 지난 55년 전으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60년대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새해가 되면 지도교수님댁을 찾아 세배를 다니곤 했다. 그런데 김인승 학장님은 지도교수도 아니었는데 왜 내가 세배를 가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학생회 임원이었기에 선배들을 따라 혜화동 학장님 댁을 몇 번 찾았다고 기억된다. 그 때 학장님은 내게 미국유학을 권하셨다. 그 후 대학원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인사를 갔더니 “내가 미스터 김도 잘 알고 또 좋아하는 사람이라 잘 되었네. 그렇지만 언젠가 내가 이야기한 기억이 나는데 빨리 공부를 하고 왔으면 좋겠네.”

내게는 작가로서의 자세와 교육자로서의 태도 그리고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방법을 일깨워준 선생님들과 선배가 있다, 그러나 대학시절 하늘같이 생각되던 학장님이 직접 내게 ‘미국유학을 가라’는 한마디는 내 일생을 바꾸는 시작이다. 결혼 후 연년생의 두 아이들과 남편을 두고 미국유학을 가게 된 계기도 학장님 한마디의 영향이 큰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선생님이 미국에 가신 후에는 까마득하게 잊고 지내고, 가끔 전시장에서 선생님의 소품을 볼 수 있었던 게 전부였는데 이렇게 선생님을 뵙듯 대형작품을 보면서 예전으로 돌아간다.

김인승 선생님은 인물화를 주로 그렸으며, 우리나라 당대의 미인을 그리는 화가로 유명하다. 소문에 의하면 그 첫 번째 미인 모델이 사모님이라는 이야기는 미술계에 알려져 있다. 그 다음 모델이 유나화랑을 운영하던 지금은 고인이 된 유덕화 대표, 다음이 지금은 캐나다에서 화가로 활동 중인 이화여대 조소과 졸업생 이정자까지는 내가 기억되는 선생님의 미인 모델이다. 선생님은 이화여대 퇴임 후 1974년 미국으로 이주하고 1970년대 이후에는 종전의 인물화 대신 주로 장미와 모란을 그려 '장미 화가', '모란 화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스승의 한마디 말이 한 사람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됨을 잘 알기에, 나도 제자들에게 ‘여성‘을 예찬하는 한마디 말로 이어간다.


이 성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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