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영의 세상이야기]312.거짓 없이 정직하게, 그리고 약속은 반드시 지키며 살라

 

무실역행(務實力行)사상이란 한마디로 공리공론(空理空論). 즉, 실천이 따르지 아니하는 헛된 이론이나 논의를 배척(排斥)하며 참되고 성실하도록 힘써 행할 것을 강조하는 사상인데, 겨레의 스승이자 민족의 큰 지도자인 도산 안창호 선생은 우리민족의 정신적 지표로 무실(務實)ㆍ역행(力行)ㆍ충의(忠義)ㆍ용감(勇敢)의 4대 정신을 강조했다.

‘무실(務實)’은 거짓을 버리고 참을 사랑하는 정신이자 실질을 존중하는 정신이며, ‘역행(力行)’은 빈말보다 실천을 강조하고 목표를 향하여 꾸준히 노력하는 정신이다. 또한 ‘충의(忠義)’는 충성되고 신의를 지키는 정신으로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개인적인 일이나 공적인 일이나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신의를 다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용감(勇敢)’은 매사에 굳은 의지를 가지고 진취적이며 능동적인 정신을 발휘하며 탐구와 진리에 사는 정신을 말한다.

『 1894년 16세의 도산은 청일전쟁으로 평양이 파괴당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해서 평양을 벗어나 그 해 서울로 올라와 선교사 언더우드가 운영하는 구세학당(救世學堂)에 들어가기 위해 미국인 선교사 앞에서 구술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선교사가 “자네는 어디서 왔는가?” 안창호는“평양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선교사가 다시 물었다. “평양이 여기서 얼마나 되는가?” 이에 안창호는 “약 팔백리쯤 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선교사가 “그런데 평양에서 공부하지 않고 왜 이 먼 곳 서울까지 왔는가?”며 물으니,
안창호는 선교사의 눈을 응시하며 반문하였다. “미국은 서울에서 몇 리나 됩니까?” 선교사는 “아마 팔만리쯤 될 걸세.”

안창호가 “팔만리 밖에서도 가르쳐주러 왔는데, 겨우 팔백리를 찾아오지 못할 이유가 무엇 입니까?

구술시험을 무사히 마친 안창호는 구세학당(현 경신중고교-종로구 혜화동 소재)을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

1902년에 도산이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한 이유는 선진국의 교육제도를 배워 조국을 교육으로 다시 일으켜 세워야겠다는 교육입국(敎育立國)의 일념 때문이었다. 도산이 미국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한 일은 미국의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일이었는데, 당시 25세의 나이에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도산의 생각은 미국의 교육을 제대로 알려면 기초부터 몸으로 배워나가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미국 교육법이 고등학교는 18세까지만 입학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었다.

그때, 도산을 아끼는 주변 사람들이 “동양인인 당신의 모습을 보아서는 백인들이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테니 그냥 18세라하고 학교를 다니도록 하는 것이 요령 있는 처신이 아니겠느냐”고 일러 주었다.

도산은 주변 사람들의 그런 조언에 대하여 완강히 거절하며 이르기를 “우리 조국이 망하게 된 것은 ‘거짓’ 때문이다. 거짓말하는 지도자들과 거짓을 가까이 하는 백성들 탓에 나라가 망하게까지 되었는데 그런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노라고 미국까지 온 내가 거짓말을 해서 학교를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설령 미국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될지라도 거짓말을 할 수는 없노라.”며 자신의 원칙을 확고히 하였다.

다행히 청년 도산의 이런 기개와 진실을 사랑하는 마음가짐을 들은 그 학교의 교장이 “18세까지의 법은 미국인들을 위한 법이며, 도산은 조선인이니 이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융통성 있는 법률해석으로 그를 학생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죽더라도 거짓을 말자”, “꿈에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자”는 것은 도산 자신의 굳은 다짐이었던 것이다.

도산은 청년들에게 “죽더라도 거짓 없어라.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하지 마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고 가르쳤다. 또한 “만약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동지에게 큰 해가 돌아갈 때만 거짓말을 해야 한다. 그럴 때도 침묵을 지키며 거짓말을 안 할 수 있다면 그게 더 좋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도산 선생은 위기에 처한 조국의 부흥을 위해선 먼저 산업을 일으키고, 자력으로 독립을 찾아 지킬 수 있는 지도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1908년 평양에다 중등 사립교육기관인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였는데, 당시 대성학교의 교훈(校訓)을 ‘정직하게 살자’로 정했다. 그는 특히 자아혁신, 자기개조를 통한 민족혁신, 민족개조를 강조하였으며 초대 교장으로 좌옹 윤치호를 임명하였다. 그러나 대성학교는 1912년 봄 제1회 졸업생 19명을 배출한 뒤 일제에 의하여 폐교 당하였다.

처음에는 전국의 각 도에 1개교씩 세워 그 출신으로 각 군·면의 초등학교를 지도하고자 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특히 안창호는 ‘주인정신’을 교훈으로 삼아 독립정신 및 책임정신과 주체적 정신을 강조하고, 무실역행(務實力行)과 성실한 생활을 인격 양성의 기본철학으로 제시하였다.

대성학교는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남강 이승훈 선생이 평양 모란봉에 있는 쾌재정(快哉亭)에서 청년애국자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깨우침을 얻어 세운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와 함께 평안도지방의 민족교육과 애국계몽 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1915년 고당 조만식 선생이 오산학교의 교장을 맡았으며, 이 오산학교의 졸업생으로는 사회운동가 함석헌 선생, 한국 기독교계의 거성 한경직 목사, 백병원의 설립자인 백인제 박사, 시인 김소월, 이중섭 화백 등이 있다.

한편 일제 강점기 당시 우리나라는 독립운동의 방법을 놓고 우남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한 외교독립론, 단재 신채호 선생 같은 무력투쟁론, 그리고 ‘민족이 스스로 힘과 실력을 키우고 그 실력을 기반으로 할 때만이 자립할 수 있다.’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민족개조론 등으로 노선이 갈라졌다.

1907년을 전후로 일제는 각종 악법을 만들어 반일적인 성격을 띤 일체의 계몽 운동을 탄압한다. 이에 따라 사회 계몽 운동가들이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비밀리에 조직한 항일 비밀 결사 단체가 바로 신민회(新民會)다.

신민회는 안창호의 발기로 창립되었으며 중심인물로는 회장 윤치호, 부회장 안창호, 유학자 출신의 장지연, 신채호, 박은식, 청년장교 출신의 이동휘, 이갑, 평양지방의 자산가인 이종후, 이승훈, 그리고 안태국, 이동녕, 이회영 등이었다. 회원은 전국에 걸쳐 800여 명에 이르렀는데, 서북지방의 기독교인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고 신(新)지식인층과 신흥 시민들이 중심을 이루어 폭넓은 활동을 전개했다.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실력을 양성해야 함을 주장했고,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신민, 즉 신민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자신, 자신을 위한 신(新)사상, 신(新)윤리, 신(新)학술, 신(新)모범, 신(新)개혁을 주장한다.

또한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이란, 한말 통감부시대에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난 운동으로 1905년 11월에 을사조약으로 일제의 국권침해가 시작되자 각 곳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맞섰으며, 선각자들을 중심으로 각종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여 민족의식의 고취와 국권회복에 총력을 기울였다. 교육을 통해 민중을 각성시키고 인재를 양성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것이 국권회복을 위한 급선무임을 강조하였다.

교육구국운동은 1905년 이후 설립되기 시작한 각종 학회 등 애국계몽단체들의 활동을 통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당시 사립학교의 수가 2,300여 개에 달하였음에서도 알 수 있는데, 전국 각지의 사립학교들은 학생들에게 민족정신과 애국혼을 불어넣어 주는 교육구국운동의 중심 구실을 하였다.

평안북도 선천에서는 기독교계의 신성학교(信聖學校), 정주에서는 오산학교(五山學校), 평안남도 평양에서는 숭실학교(崇實學校)와 안창호의 대성학교(大成學校), 황해도 안악에서는 양산학교(楊山學校) 등이 교육구국운동을 위한 사학의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범 김구는 양산 소학교에서 ‘무너져가는 조국을 일으키려면 자녀를 교육시켜라.’, ‘한국인이 배일(排日)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등을 주제로 한 강연회를 열었으며, 참석한 모든 사람이 삭발하여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1909년 1월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강권에 못 이겨 순종이 평안도로 갔을 때 통감부는 각 학교에 태극기와 일장기를 가지고 나와서 환영할 것을 시달하였으나, 대성학교를 비롯한 사립학교 학생들은 태극기만 가지고 나가서 오히려 일장기를 가지고 나온 공립학교 학생들을 야유하였다. 대성학교를 중심으로 한 여러 사립학교들이 일장기 불게운동(不揭運動)을 전개함으로 결국 대성학교는 폐교의 위기를 맞게 되었으며, 안창호는 이 사건과 105인 사건 등으로 1910년 4월 <거국가(去國歌)>를 남기고 망명하게 되었는데, 이 〈거국가〉를 일명 <한반도 작별가>라 하기도 하며, 망명가들이 많이 부르는 노래라고 하여 한때는 〈망명자의 노래〉라고도 하였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가게 하니
일로부터 여러 해를 너를 보지 못할지나 그 동안에 나는 오직
너를 위해 일할지니 나 간다고 설워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거국가>의 내용은 문학사상으로 보면 개화기 국문시가의 특징을 지닌 우국가사의 하나이지만, 문학성보다는 역사적 상황과 관련된 민족지도자의 심정을 토로하여, 당시 우리 민족에게 힘을 주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시대배경이나 가사내용이 국난을 극복해가는 민족의 구국의지를 잘 나타내고 있으며, 외세와의 굳건한 대결의지를 보여주는 민족의 노래로 자주 불렸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 할 수 있겠다.

안창호의 금새를 잘 알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때 도산을 자기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일제의 정책에 대한 지지를 조건부로 도산내각을 세워주겠다는 흥정까지 했다는 일화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 어느 날,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도산에게 사람을 보내 왔다.

“통감께서 안 선생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인들의 우상이었던 도산이 일제의 정책에 대하여 지지를 해 준다면 쉽사리 본인들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무슨 일로 나를 만나자는 것이오? 나는 이토를 만날 일이 없다고 가서 전하시오.”

도산은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계속 사람을 보냈다. 그래도 도산이 자신을 만나기 싫어하자, 이번에는 이토 히로부미는 도산에게 총리대신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직접 만나서 내 생각을 말해야겠다.’

다음 날 안창호는 이토 히로부미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도산을 본 이토 히로부미는 벌떡 일어나 반기며 안창호의 두 손을 붙잡고 말했다.

“도산 선생! 이렇게 훌륭한 분을 만나다니 큰 영광입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연설을 한다는데,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통감께서 50년 전에 일본을 위해 일본에서 하던 일을 나는 오늘 대한을 위해 대한의 땅에서 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 안선생의 애국심은 정말 대단하오. 우리 일국도 대한제국이 하루 빨리 훌륭한 나라가 되기를 바라고 있소. 대한제국이 훌륭해 지면 동양인들끼리 힘을 합해 서양세력을 막을 수 있을 것이오.”

이에 도산은 “동양문제라면 저도 할 말이 있습니다. 동양에서 일본을 머리라 치면, 대한은 목이요, 중국은 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머리와 목과 몸이 서로 믿지 못하는 바람에 아예 동강이 나고 말았습니다.”

도산의 말에 이토 히로부미는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그 이후에도 이토 히로부미는 도산을 이용하기 위해 여러 질문을 했으나, 결국 포기하고 감옥에 갇혀 있던 우리 애국지사들 몇몇도 풀려 나오게 되었다. 』

흔히들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고 하는데 도산은 평생을 나라를 구해보겠다는 일념하나로 사랑하는 자신의 가족들보다 민족전체를 사랑하는 큰 분이셨던 것이다.

도산의 비서실장으로 우리나라 최고령 독립유공자이신 구익균 선생은 이렇게 회고한다.

“도산은 사랑하는 아들들에게 연필 한 자루도 사주지 못했으며, 사랑하는 부인에게 치마 한 감, 저고리 한 채 사줘 보지 못했다. 그러나 도산을 찾아와 어려움을 호소하면 기꺼이 자신이 차고 있던 시계라도 풀어주는 분이셨다.”

《우리 가운데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이 인물이 될 공부를 안 하지 않는가.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자가 되라.》

나는 오늘 도산의 칼럼을 쓰면서 수없이 많은 후회와 반성을 했다. 내 자식에게 “늘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내 자신부터 더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과 오늘의 국가적 위기로부터 국민들을 이끌어보겠다며 소위 민족지도자를 자청하며 나서는 수없이 많은 인사들이 도산 선생의 만분지 일 만큼이라도 진실로 정직하게 살고 있는지 의문스러울 따름이다.

안창호 선생은 지도자는 물론이거니와 일반 국민들의 이 약속 준수가 국가의 신뢰와 사회의 신용을 향상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고 가르쳤다. 그가 설립한 대성학교에서 민족지도자 양성을 위한 가장 중요 방침으로 생도들에게 ‘약속’의 준수를 통한 건전 인격수련을 강조한 것도 안창호 선생의 이 ‘약속’에 대한 확실한 믿음에서 출발한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도 말고 약속을 지키지 않기 위해 거짓을 행하는 것이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 주범이라고 이를 불구대천지원수(不俱戴天之怨讐)라고까지 한 도산 선생의 가르침은 ‘약속’과 ‘거짓말’에 대해 오늘의 많은 정치인들이 어떤 태도와 의식을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쳐준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도 훌륭한 민족지도자 도산 안창호의 가르침을 새겨 우리 후손들에게 길이길이 물려줘야만 한다. 거짓 없이 정직하게 그리고 약속은 반드시 지키며 살아야함이 바로 도산께서 우리 후손들에게 남긴 메시지이다.

< 2018.01.04. 한림(漢林)최기영 > ericchoi11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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