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전야(김병기 화백 일대 19)

 

    월남에 성공했다. 이제 광복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대한민국에서 미술적으로 구현해보고 싶었다.

    195015일에 ‘1950년 미술협회가 결성되었고 그 사무장이 되었다. 내무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張澤相, 1893-1969, 각주 1)이 좌익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자 갈 곳 없어 지하로 숨어든 좌익계를 보호하기 위한 보호막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예술적 재능은 한때의 이념적 편파를 언젠가 극복하고도 남을 것이라는 낙관적 확신에 근거한 움직임이었다. 검찰총장의 내락 또는 묵인도 받았던 일이었다.

    김병기와 김환기와 이쾌대(李快大, 1913-65)가 특히 앞장서서 뜻을 모아 펼치려던 새로운 재야 미술운동은 그 성격이 민족 미술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미술의 현대화를 추구하여 새로운 우리 미술을 재건·창조하려는 것이었다(각주 2). 우선 1950627일에 창립전을 열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그 이틀 전에 발발한 동란으로 전람회는 열지 못한 채 자동 해산되고 말았다(각주 3). 전시회가 제대로 열렸더라면, 그리하여 그들에 대한 사계의 이해가 보태졌더라면 김만형(金晩炯, 1916-84), 이쾌대는 결코 월북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태경의 확신이었다. “그들은 휴매니스트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나는 휴매니스트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반대했다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누구의 말대로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이며 상실한 것은 예술 자신이었다(각주 4)."

    김만형은 개성 출생(각주 5). 일본 제국미술학교를 다녔고 선전에서 특선도 했다. 광복 후 조선미술동맹에 가담했다가 나중에 전향했다. 그럼에도 9·28 서울수복 때 다시 북한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쾌대는 경북 칠곡 출신. 일본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41년 도쿄에서 이중섭, 최재덕(崔載德, 1916-? 각주 6) 등과 신미술가협회를 조직했고, 광복 직후엔 조선미술동맹 간부가 되었다가 거기서 스스로 이탈해서 1949년 제1회 국전에 서양화부 추천 작가로 출품하기도 했다. 6·25 전쟁 직후, 북한 체제의 남조선미술동맹에 다시 적극 가담했고, 인민의용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로 붙잡혔다. 남한에 처자식이 남아 있었음에도 월북한 그의 형 이여성(李如星, 1901-? 각주 7)을 좇아 포로 교환 때 그만 월북했다(각주 8). 2015년 후반, 그의 예술성을 기리는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시장에서 열리기도 했다.

 

각주 1: 우리 문화재 수집에 열심일 적에 태경의 부친 김찬영의 사랑방으로 오가며 서로 긴밀히 교유했던 인연의 사람이었다. 국무총리도 역임했다.

각주 2: 김병기와 함께 이 미술운동에 열심이었던 김영주(金永周, 1920-95)의 회고담(계간미술, 1987년 겨울호). 도쿄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던 원산 출신 김영주는 1946년 이후 서울에 정착하여 현대 미술을 제작하는 한편, 국전의 보수주의를 비판하는 등 미술평론에도 열심이었다. 1957년에는 김병기 등과 조선일보사가 주관한 현대작가초대전 조직에도 참여했다. 그런데 태경이 나중에 생각해보니 도쿄에서 공부했다던 김영주는 도쿄에 대해 잘 몰랐다. 자신이 도쿄에 대해 들려 준 이야기를 훗날 자신에게 다시 하는 것 등을 미루어 만주에서 청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믿어진다 했다.

각주 3: 이 모임에 유영국이 가담하려하자 미술계의 우익 좌장이던 장발(張勃, 1901-2001) 서울 미대 학장은 탈퇴를 종용했다. “좌익의 노이로제에 걸린이라 싶어서 6.25 전쟁 직전에 1948년 봄부터 일했던 서울대 미대 교수직을 던지고 나왔다. 출처: 박규리(유영국: 빛과 색채의 화가, 미술문화, 2017).

각주 4: 1922년에는 백조(白朝)’동인이었던 박영희(朴英熙, 1901-?)1925년 카프(KAPF)의 지도적인 이론분자였다. 그러다가 문학이 계급이론을 위한 시녀로 전락됨에 회의를 품고는 카프에서 탈퇴했다. 193414일자동아일보에 적은 글 속에 유명한 전향선언문구가 나온다. 6·25때 납북되었다.

각주 5: 조선미술동맹(1945)은 광복 직후 좌우익 미술인들이 함께 결성한 조선미술건설본부의 내분 사태에서 생겨났다. 1945915일에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좌익 미술인들끼리 조선프롤레타리아미술동맹을 창립했다. 조선프롤레타리아미술동맹은 1030일부터 조선미술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활동했다. 한편, 조선미술건설본부와 117일에 출범한 그 후신 조선미술협회를 주도한 고희동이 우익 성향을 드러내면서 좌익 미술계와 대립했다. 19462월에는 좌파 또는 무소속 성향의 미술인들이 모여 신세대 미술 건설을 기치로 조선조형예술동맹을 결성했다. 위원장은 윤희순, 부위원장은 길진섭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조선미술동맹은 조선미술가동맹으로 개편되었다. 조선미술가동맹은 기존 조선미술동맹 맹원 외에 조선미술가협회를 탈퇴한 김주경, 이인성 등이 가세했다. 19461110일에 조선미술가동맹과 조선조형예술동맹은 통합하여 조선미술동맹을 출범시켰다. 위원장은 화가 길진섭이며, 이인성과 오지호가 부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미군정의 좌익 계열 탄압으로 차츰 활동이 줄어들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 뒤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 길진섭 등 중심인물들은 월북해서 조선미술가동맹 체제에 흡수되었다.

각주 6: 경남 산청 출생. 서울 보성고보를 거쳐 도쿄의 태평양미술학교에 유학했다. 1936년부터 1940년까지 선전에 거듭 입선하였고, 일본에 머무르며 이과전, 신제작파전 등에도 입선하였다. 광복 후에는 좌익의 조선미술동맹 간부였다가 전향하여, 1949년 제1회 국전 추천작가로 출품했다. 그러나 19506·25전쟁 발발 직후 다시 남침 공산체제와 영합하다가 월북했다.

각주 7: 중앙고보를 졸업하던 1918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독립기지 건설에 나서는 등 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3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 도쿄 릿쿄대 정치경제학과에서 공부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1930년대 전반에조선일보동아일보에서 일하면서 약소민족운동연구에 열심이었다. 1948년 초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 교수가 되었다. 한편, 1934년에 제13회 서화협회전에 출품한 동양화가 입선했고 1935년에 이상범과 함께 2인전을 가질 정도로 조선화단의 중견화가로 인정받았다. 그는 조선의 예술가가 담배와 술과 여인과 불규칙과 무절제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고 현실 조선을 과학적으로 파악하는 예술가가 되어 민중을 위한 창작활동, 곧 프롤레타리아 예술을 제안했다. 한편 그의 문화론은 복식사 연구에서 잘 드러났다. 북한에서 이룩한 대표적인 학문적 성과가조선미술사개요였던 이여성은 숙청된 뒤 행적은 북한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사라졌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각주 8: 이쾌대의 월북 동기는 극적이지 않고 우연적이고 아이로니컬하다.” 조영복(“장엄한 역사의 서막을 알려준 화가의 손,”월북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 돌배게, 2002, 135-163) 참조.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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