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越南) 전후(김병기 화백 일대 18)

 

   바로 얼마 뒤 배편을 마련했다. 짐짝을 싣고 그 사이에 몰래 숨겨 당신 어머니를 대동강 출발의 배로 한강 마포나루까지 데려다주려 했다. 탈출극은 진남포에서 그만 들통이 났다. 어머니는 감옥에 가야했고, 김병기도 미술동맹의 서기장 자리에서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정상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던 것.

내 인생의 비장한 계기가 된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때가 1946년인데 이후 로 평양 집에 연금(軟禁) 당했다. 나와 교류했던 많은 사람들도 내가 반동분자로 찍히니까 찾아오지 못했다. 그때 러시아 부부가 나를 위해 유일하게 밤새워 손잡고 울어주는 거다. 서로 말로서 의사교환 방법은 없는데 손으로 정을 통했다. 알고 보니 이 부부는 우크라이나의 교사 출신이었다. 널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우리는 발령이 나서 내일 아침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안타까워했다. 나는 나대로 슬퍼서, 그들은 나를 동정해서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밤에 서로 흐느꼈던 울음을 잊을 수가 없다. 다음날 아침은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우리 집은 서울 평창동 주택가보다 더 높은 언덕에 자리했기 때문에 집 앞까지 차가 올라오지 못했다. 수염 달린 하졸이 짐을 들고 밑으로 내려가고 그랬다. 우리 부부도 울고 그 사람들도 울었다. 동네 사람들이 러시아인이 가는데, “로스케(각주 1)가 돌아가면 다 좋아하던데 김 선생은 우네?!” 동네사람들이 웅성거렸던 일들이 기억이 난다. 그러는 사이에 걱정하지 말고 잠자코 있으라는 공산당 본부의 명령이 떨어졌다. 내 옆집에 사는 자가 김일성의 외종조부인 강양욱(康良煜, 1903-83)목사였다(각주 2). 내 장인도 평양의 유명 장로였으니까 서로 잘 알았다. 원래 옆집은 이일영(李一永)이라는 부자 목사 집이었는데 공산당이 들어오자 그 큰 집이 눈치가 좀 보여 강양욱에게 넘긴 것이었다. 우리 장모는 강양욱 부인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시간이 흘러 김병기 신상 문제를 다룬다며 오자(五者)회담이 열렸다. 김일성, 최용건(崔庸健), 강양욱, 김창만,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은 또 한 사람이 모였다. 거기서 김병기는 재능이 있으니까 죽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남한에 보낼 수도 없으니 두었다 쓰자고 합의했다. 문화부장이었던 김창만이 제일 많이 힘을 써준 걸로 알았다.

러시아 부부가 떠나고 얼마 뒤 연금 상태로 움직이지 말라는 것을 김병기가 어겼다. 1946년 가을인가 집을 헐값으로 넘기고 해주로 이사 갔다. 평양에서 해주로 간다는 것은 명백하게 월남하겠다는 의사 표현으로 여겨질 만 했다. 감시원들이 뒤따라 붙었다. 감시원은 태경의 형님 인쇄소에서 일하던 직공들이었다.

   해주에서 솟을대문이 있는 큰 한옥 집을 김병기 형제가 각각 16만원씩 내서 32만원을 주고 샀다. 감시원이 그걸 보곤 남으로 내려가려는 게 아니고 해주에서 그냥 살려고 하나보다?!”로 여겼다. 바깥채는 김병기가, 안채는 형님이 살았다.

   해주 시절의 이야기를 하나 덧붙이자면, 문석오(文錫五, 1904-73)라고 도쿄미술학교를 나온 이(각주 3)가 해주에서 주물 공장을 하고 있었다. 주물을 떠가지고 평양으로 운반하는데 태경의 아내 친구, 이쾌대, 조규봉(曺圭奉, 각주 4), 김정수(金丁秀, 각주 5) 이렇게 네 사람이 조각 작품을 실은 트럭 한 코너에 그때 남한 밀무역의 거점이었던 황해도 청단(靑丹)에서 사서 집에 쌓아 두었던 미제 알사탕 도롭푸스(drops. 각주 6)’도 함께 실었다. 그걸 평양으로 내다 팔았다. 이 모두가 해주에 정착해 열심히 살고 있음을 은근히 과시하려 함이었다.

   해주에서 한 해 겨울을 보내고 1947년 봄에 월남했다. 그때 당신 서모가 서울집에서 강도에게 피격되어 별세했다는 소식을 장인이 해주로 알려주었다. 태경의 아버지는 중풍으로 이미 몇 년째 와석 중이었고, 아주 어린 여동생도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도 돌보고, 아버지가 가졌던 고미술도 제대로 보관해야겠기에. 비보를 들은 다음날로 바로 내려갔다. 해주집 사랑채에 송 영감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 영감이 남으로 가는 비밀 루트로 인도해주었다. 이미 이종사촌 오영진 등이 이 루트로 남하했다(각주 7).

   그러나 이 월남 루트가 나중에 탄로 나서 형님이 당국에 구속되었다. 감방에 어린 소년이 들어왔다. 함께 공산주의를 이야기 했다. 그때 그 나이의 한국 사람이 그랬듯, 형님은 공산주의자에 가까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년은 프락치였다. 형님이 공산주의자가 분명하다며 풀어주도록 주선해 주었다.

   형님은 나중에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소련군의 한국여자 강간 현장을 목격한 뒤였다. 625때 월남한 형님은 감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위암에 걸려 당신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형님의 아들과 딸은 나중에 프랑스에 정착했다.

각주 1: '루스키(Русский)‘은 러시아인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 본디 비하의 말이 아니었다. 이를 러일 전쟁 당시 일본 군인들이 일어 식으로 음역하여 '로스케(露助)’라 부르며 러시아 군인들을 조롱하는 말로 삼았고 나아가 러시아인 전체를 비하하는 뜻으로 확대되었다. 이 말이 일제 강점기 당시 한반도에도 전파되어 러시아인 비하의 표현으로 널리 사람 입에 오르게 되었다.

각주 2: 일본 주오대학 예과를 거쳐 1923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장로교 목사로 194511월 기독교도연맹 중앙위원장이 되었다. 1972, 국가부주석에도 올랐다.

각주 3: 문석오는 1932년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백선행(白善行)여사흉상을 제작했다. 그녀가 평양시민에게 공회당을 기부한 것을 기념하려고 제작된 흉상은 평양에 처음 세워진, 그리고 한국인 조각가의 손으로 제작한 첫 번째 동상이었다. 광복 이후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활동했고, 분단 이후는 북조선예술동맹의 부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김일성과 천리마의 동상을 다수 제작한 공훈예술가였다.

각주 4: 조규봉(1917-97), 인천 태생에 도쿄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했다. 서울에서 최초의 조각가 단체인 조선조각협회에 참여, 19468월 인천시립예술관 개관기념미술전에 출품한 뒤 바로 월북했다. 1946년 말 모란봉에 세우는 해방탑 제작에 참여했고, 19499월에 창립된 평양미술대학 조각학부 교수가 되었다. 그는 북한 조각사에서 대기념비 조각 창작의 시대였던 19601970년대에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각주 5: 김정수(1917-97)는 경남 창원 출신. 1938, 일본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 조각가 윤효중의 대화숙미술제작소에서 미술창작사업을 하다 해방을 맞았다. 1946년에 월북했던 그는 문학수 등과 함께 평양미술대학의 교원이 되었다. 대기념비 제작에 많이 참여했고, 조각 관련 저술도 여럿 집필했다

각주 6: 특히 6.25전쟁을 경험한 세대에겐 꿈의 사탕이었다. 체리 맛은 분홍빛을 띄게 하는 식으로, 해당 과일 맛과 색깔로 만들어진 사탕이 깡통에 담기거나 기름종이에 싸여 있었다. 지금도 미국 내외에서 챰스(Charms)란 상품명으로 판매되고 있다.

각주 7: 국토가 분단된 뒤 공산치하에서 남한으로 넘어오는 루트는 해주에서 청단으로 걸어와서 거기서 배편으로 인천에 닿는 해상루트, 강원도 원산에서 경원선을 타고 철원으로 왔다가 거기서 연천동두천포천으로 걸어 내려오는 도보구간 등 아홉 개의 월남루트가 있었다(윤태옥, “9개 루트로 150만 명 월남, 돈 받고 안내해준 ‘38활개,” 중앙선데이, 2022.7.9). 이런 경로를 따르자면 안내책의 도움을 받아야 했는데, 월남민들이 귀중품을 많이 소지했음을 알곤 안전호송보다 오히려 해코지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김병기가 이용했던 루트의 청단은 토성과 해주를 잇는 협궤철도 토해선이 통과하는 교통요지로 6.25 전쟁이전까지 38이남이기 때문에 한국철도가 운행을 했다. 조선시대도 교통요지였던 인연으로 황해도 곡산부사 정약용이 1798년에 이곳을 지나면서 지은 시 새벽에 청단역을 떠나며(曉發靑丹驛)”(검정 일산 휘날리며 물가 고을 들어서니/ 나무다리에 조수 빠지고 어부 모습 보이네/ 바다 하늘에 먼동 트자 구름 노을빛 달라지고/ 가을로 접어든 들판에는 풀과 나무 황량하다)도 전해온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No.

Title

Name

Date

Hit

3324

이 생각 저 생각 (130) 천리구 27

최 명

2022.10.17

5699

3323

510. 김동길 박사님,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인승일

2022.10.16

272

3322

東吉 선생님 영전에 드립니다

여상환

2022.10.12

1574

3321

김동길 칼럼 ‘새로운 이야기들’을 마치며

이성순

2022.10.11

1455

3320

이 생각 저 생각 (129) 산남 김동길 선생과 나

최 명

2022.10.10

2734

3319

(마지막 글) 자유민주 한국제단에 일신을 건 망백(望百)

김형국

2022.10.06

3229

3318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최우람 ‘작은 방주’전

이성순

2022.10.04

2233

3317

이 생각 저 생각 (128) 천리구 25

최 명

2022.10.03

1697

3316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513)

정우철

2022.10.02

557

3315

6⦁25전쟁 전야(김병기 화백 일대 19)

김형국

2022.09.29

2004

3314

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

이성순

2022.09.27

833

3313

이 생각 저 생각 (127) 천리구 24

최 명

2022.09.26

1648

[이전] 1[2][3][4][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