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의 시간(김병기 화백 일대 12)

 

    고등교육 학업을 받자면 출향(出鄕)이 전제된다. 대학은 고향 바깥에 있기 일쑤이기 때문에 그런 진학은 타지로 지리적 이동이 따른다. 김병기가 그렇게 미술을 공부한다고 일본을 건너간 것이 1933년이었다.

    거꾸로 졸업은 일단 귀향을 뜻했다. 1939년에 문화학원을 마친 김병기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시절의 생애주기에 따라 결혼을 했다. 아내 김순환(金純煥, 1918-95)는 평양의 신흥 부자이던 전주 김씨 동원(金東元, 1882-?각주1)의 딸이었다. 일본 짓셍(實踐)대학으로 유학 가서 이른바 주부수업을 착실히 받았던 규수였다. 짓셍대학(각주2)은 일왕 메이지에게 시가(詩歌)를 가르치던 여류가 세운 학교인데, 요리재봉남편 봉양을 역점으로 가르치는 학교라 했다.

    그 아내의 남편 섬기기가 어떠했던가를 물을 때마다 김병기는 아내의 비상한 입지(立志) 그리고 거기에 따른 성향으로 대신 말하곤 했다. 장차의 아내는 장로교 계통 학교인 숭현, 나중에 숭실로 이름을 바꾼 초등학교 6학년 때 직접 원서를 적고는 공립 초등학교로 전학했고, 이어 평양의 경기여고 격인 평양여고(서문여고)를 졸업했다.

    딸의 그런 학업의욕수를 알아챈 부모는 저런 딸이야말로 집안의 기둥이 되어 마땅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다. 남녀 형제가 자라는데 거기서 여식이 출중(出衆)하면 여느 집 할 것 없이 저 아이가 사내로 태어났어야 했다.”고 말하던 전통시대 한국가정의 의식이었는데, 이 말이 당신의 잠재의식으로 자리 잡혔던 까닭이었던지 결혼을 하고도 친정의 대소사를 챙기는, 전주 김씨 가문의 차세대 가독(家督)같은 아내였다. 이 탓에 아내 성품은 평양 사투리로 무척 갈개는”, 표준말로 좀 설치는스타일이었단다.

결혼 전야

    결혼 한해전인 1938년에 약혼식을 올렸다. 광성고보 친구 내외가 중매를 섰던 결실이었다. 처음 상견례는 양식 음식을 먹는 자리였다. 그때 왼손에 포크를 쥐어야 하는데도 태경이 엉겁결에 오른 손으로 쥐는 실수(?)를 범했다. 장차의 아내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오래된 사소한 해프닝이었지만, 대수롭지 않은 일에 신경이 쓰인 자신이나 식사예절에 엄격했던 여인인데도 아무런 내색을 안했음은 서로가 마음이 열게 되었음의 신호 같았다. 물론 그 사이 양가 집안의 들러리를 통해 양가의 물밑 양해가 이뤄졌던 상태였다. 당신 아버지 유방은 서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장차의 장인은 서울로 가서 김찬영을 만나 아들의 자립경제를 도울 용의가 있는지 직접 확인하기도 했다.

    드디어 약혼식이 만수대에 크게 지어진 장인 집에서 조만식 애국지사의 주례로 진행되었다. 그 자리에도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약혼여와 함께 아버지에게 인사드리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이른 아침에 도착해서는 아버지의 기침(起寢)이 늦기 때문에 바로 당신의 거처로 갈 수 없었다. 잠시 삼촌이 묵고 있던 조선호텔로 가서 시간을 보냈다. 거기서 약혼녀가 하도 사랑스러워 입을 슬쩍 맞추려 했지만 완강하게 거절했다. 이럭저럭 아버지에게 인사를 마친 뒤 그날 저녁으로 태경은 동경으로, 약혼녀는 평양으로 향했다.

    도쿄에 도착하고 얼마 뒤 약혼녀로부터 편지가 날라 왔다. 파혼하자는 내용이었다. 입을 맞추려던 행실은 소실을 거느린 당신 아버지처럼 품행이 방정하지 못함의 조짐으로 읽었기 때문이라 했다. 급히 답신을 보냈다. 긴자의 좋은 문방구 가게를 찾아 종이와 붓을 사서 우리말과 일본말을 섞어가며 사과의 답신을 보냈다. 세 번이나 보내자 겨우 없던 일로 치부하겠다는 회신이 왔다.

    결혼식은 일본인이 만든 공회당에서 열렸다. 주례는 주기철(朱基徹, 1897- 1944 각주3) 목사 결혼식에도 아버지는 참석하지 않았다. 한 달에 한번 또는 두 번, 집안 제사 참석을 위해 서울에서 평양을 다녀갈 뿐 본가의 아내와 자식은 전혀 거들떠보지 않았다. 어쩌나 내외가 마주치면 목침이 날아다닐 정도로 험악했다. 아버지의 이재(理財)에 대해 믿음이 없었던 어머니는 아버지를 상대로 금치산자로 묶으려고 소송을 내려고 까지 했다.

    태경의 일본 유학 학비도 전부 어머니 주머니에서 나왔다. 어머니는 둘째 아들을 하늘같이 알았다. 당신 남편을 봉양해 보지 못한 한을 남편과 닮은 아들에게 정성을 쏟았던 것. 아버지가 그리워 김병기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혼자서 서울 가회동으로 아버지가 살던 집을 혼자 찾아갔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집에 들어서기가 망설여졌다.

    결혼식은 아직 올리지 않은 약혼 시절에 졸업 작품을 제작해야 했다.

"졸업 작품으로 인물이 있고 그런 걸 그렸는데 당시 약혼 때니까 마누라를 하나 그리고 마누라의 머리 위에 풀 같은 것, 나뭇가지 같은 거 올려놓은 걸 그렸거든 이시이 하쿠테이가 그게 틀렸다는 거야. 나는 쉬르리얼리즘 영향 받아 가지고 쉬르리얼리즘이 전위법(轉位法)을 이용해서 마누라 얼굴같이 그리고 그 다음에 나뭇가지를 올려놨거든. 그런데 그게 틀렸다는 거야. 그래서 졸업 후에 내가 하쿠테이를 깠어. “그림 그리는 것을 꼭 이렇게 그려라하는 법이 없다 그랬어. 그런데 그 딸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자기 아버지한테 이야기를 했다나. 내가 졸업 작품을 냈는데 하쿠테이가 그걸 낙제 시켰어. (중략) 졸업은 했는데 청강생 이름으로 나왔을지도 몰라 (각주4)나는 문화학원을 다닌 것을 조금도 후회 안 해. 내가 조금 더 열심히 다니지 못한 것을 후회해요"(출처: 김철효, 2004)

 

 각주 1: 평남 대동 출신메이지대 법과를 중퇴했다귀국한 뒤 평양 숭실학교 등에서 교사로 일했다. 1911,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겪은 뒤 평양고무공장 등을 경영했다한편으로 세브란스의전 이사장으로 피임됐다또한 안창호의 직계로 흥사단 산하조직 수양동우회에 참여했다가 독립운동 가담이라고 촉 잡혀 투옥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미군정장관 고문으로 활약하다가 1948년 한국민주당 제헌국회의원에 당선했고국회부의장에 뽑혔다수양동우회 때 투옥되었다가 무죄 석방된 것은 친일파가 되기로 약속한 뒤끝이었다며 민족문제연구소는 2008그를 친일파를 단죄했다한데 그를 납북했던 북한이 재북 인사들의 묘에 묻었음은 이른바 친일파에 각을 세워왔음을 정권의 정통성으로 내세우던 그들의 생각은 달랐다는 말이었다일제 때 실업계에 일했던 인사들의 불가피한 처신이라 보았던가그쪽 비문엔 1951년 3월 사망이라 적었다.

각주 2: 도쿄에 자리한 사립 여자대학무려 80권 이상의 저서를 냈던일왕 메이지의 정부(情婦)라고도 소문났던 여류 시인 시모다 우타코(下田歌子, 1879-1936)가 1899년에 창립한 사숙이었다사숙은 1949년에 대학으로 승격했다재불 화가 이성자(1918- 2009)가 동기생이었다.

각주 3: 경남 창원시 진해구 출생. 1912년에 춘원 이광수가 그곳 웅천에서 강연을 했다거기에 감명 받아 춘원이 교사로 있던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를 다녔다. 1922년 3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했다내부 분란으로 담임목사가 사임한 평양의 산정현교회를 위해 장로 한 분인 조만식 애국자가 몸소 찾아와 청빙했고그래서 1936년 7월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했다그 무렵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한국 기독교계 특히 장로교는 신사참배가 교리에 위반되고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침해라며 강력히 반대해 왔으나일제의 강요가 심해지자 이에 굴복하는 개인과 교회들이 나타났다일부 예배당에서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요 국가의식임을 시인하기로 결의했다그래도 참배를 거부한 주 목사는 일본 경찰에 여러 차례 구금되는 사이교회 폐쇄를 위협받았다그렇게 단속(斷續)된 구금 끝에 1944년 4나이 47세로 옥사했다일제에 대한 그의 항쟁은 기본적으로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면서 일제의 식민지 통치 이데올로기를 무효화무력화시키려는 비폭력 항쟁이었다.

각주 4: 구술을 받아 적었던 이가 일본 문화학원에 문의한 결과, 1945년 이전의 학적부는 전쟁 중에 완전 소실되어 이전 졸업생들의 명부를 확인할 수 없다했단다그러나 앞에서 적었듯불탔다 해도 그건 미군의 폭격 탓은 아니었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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