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미술쪽 관심(김병기 화백 일대 11)

 

    일본유학 중이던 1930년대 후반, 김병기가 열성으로 참여했던 일은 신극 쪽 무대장치였다. 평양 출신으로 보성전문에 다니면서 연극계에서 활동했던 주영섭이 일본 호세이 대학에서 수학하던 19346월에 신극장운동을 한다며 도쿄학생예술좌를 조직했다. 여기에 참여한 이는 와세다대·니혼대·호세대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인 김병기, 황순원(黃順元, 1915-2000), 김동원(金東園, 1916-2006), 이해랑(李海浪, 1916-89, 각주 1 참조) 등 열다섯 사람이었다.

    학생예술좌는 창작극 공연에 의미를 두고 193464일 창립극으로 유치진의와 주영섭의나루를 공연했다. 후자는 당시의 궁핍한 농촌 현실을 사실주의 수법으로 그린 작품으로 경향파적 성향이 드러난 작품이었다. 19376월에는 제 2회 공연으로 유치진 각색의 <춘향전>, 19386월에는 제 3회 공연으로 오닐(Eugene O'Neill)<지평선 너머>와 주영섭의 <벌판>을 츠키지(築地)소극장 무대에 올렸다.

    이 가운데 <춘향전>은 유치진 특유의 극작술로 고전극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서 리얼리즘에 입각한 로맨티시즘 극으로 재창조시킨 작품이었다. 당시 번역극을 공연한 것은 1936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오닐의 작품이란 점과 학생들에게 서양연극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19396, 4회 공연을 기획했지만 일본의 조선어연극 금지령으로 끝내 무대에 올리지 못했다. 그 무렵 19398월에 귀국한 주영섭 등이 연극을 통하여 좌익사상을 고취했다는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구속되었다. 이 여파로 19409, 연극단체 중에 가장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활동했다고 높이 평가받았던 동경학생예술좌는 동경에서 해체되고 말았다(각주 2 참조).

    김병기의 무대장치 작업은 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 1901-77)의 제자인 무대장치 전문가로부터 기술적 도움을 받았다. 20세기 전반에 전방위 예술 활동을 했던 무라야마는 1921년에 철학을 공부한다고 동경제대에 입학했다가 곧 미술과 드라마 공부를 위해 독일 훔볼트대학으로 유학했다. 가서는 칸딘스키의 작품 특징인 구성주의에 매료되었다가(각주 3 참조) 그게 현실과 유리된 데에 실망했다. 대신, 구체적 연관성을 보여줄 수 있는 공산품 오브제와 미술판화와 연계시키는 콜라쥬를 보여주는 MAVO(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기 전의 일본 미술 쪽 다다 그룹. 일본 다다운동의 선구자들이었다. 관동대지진 직전인 19237월에 결성되었다)라는 이름의 이른바 의식있는 구성주의란 독자 스타일을 전개했다.

    미술과 일상생활의 경계를 없애려는 시도였다. 좌익이던 그는 거기다 사회적 불공평에 대한 저항의식을 담았다. 귀국해서는 표현주의와 구성주의 미술을 소개했지만 자신은 현대 극장예술 특히 1920년대 프로레타리아 연극운동에 적극적이었다. 거기에 유럽의 독일표현주의, 다다 등 아방가르드 유럽예술 운동을 가미하려했고, 오락 연예는 반드시 사회정치적 문제점을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극과 영화에서 사회상과 정치상을 담으려 했던 최초의 인물이었고 좌익 연극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

    19305, 도모요시는 평화보존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석방되고 19315월에 일본공산당에 가입했다. 때문에 19324월에 다시 체포되었다가 극단 해체를 조건으로 19343월에 가석방되었다. 군국주의와 검열에 반기를 들었던 까닭에 19408월에 또 체포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새 극단을 만들었다. 그 하나인 Tokyo Art Troupe1960년과 1966년에 각각 중국과 한국에서 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전방위 예술가로서 연극비평에도 열심이던 무라야마는 당연히 유치진 등의 연극에 올렸던 무대장치를 만나고는 김병기의 작품성도 엿보았다. 그게 1935년경이었다. 이 인연으로 그때 도모요시는 집안 가족들에다 김병기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도 남겼다. “조선 화학생 가운데 추상작업을 할 만한 이는 김병기!”라고. 1938년 도모요시의 신협극단이 평양에서 공연할 때 앞서 말했던 일제 때 수재로 소문났던 김사량(金史良, 1914-1950, 각주 4 참조)이 고향을 안내할 정도로 가깝기도 했다.

    그때 무대장치가 추상화계열이었느냐의 물음에 김병기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주 사실적인 그림이었단다. 그렇다면 어찌 구상성에서 비구상성의 기미를 읽었는지, 참 궁금했다. 사람을 알아보는 감각인 지인지감(知人之鑑)’이 비범했었던가. 김병기 또한 무라야마를 일본 추상화 전개의 출발이었다는 게 그의 확신이었다(岩琦淸 , 村山知義의 우주, 도쿄, 讀賣新聞社, 2012).

    그렇게 김병기가 열성으로 신극 쪽 무대장치에 매달리고 있던 중에 아버지가 서모(각주 5 참조)와 함께 도쿄로 왔다. 그리고 거리를 오가는 도중에 우연히 도쿄학생예술좌의 연극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그걸 본 아버지가 태경을 심하게 꾸지람했다. 자신이 한 우물을 파지 못해 어중재비가 되었는데 아들마자 미술공부에 전념하지 않고 배우가 되려느냐?!”며 호통을 쳤다. 무대장치인데도 그걸 연극배우 곧 딴따라’(연희인演戱人을 지칭하는 인도 말이 그 어원이다. 물론 그 사회에서도 연희인은 천인이었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黃秉冀)로부터 내가 전해 들었던 말이다)로 진출하려는 몸짓이라고 확대해석했다. 기실, 태경의 아버지 유방도 희곡을 집필해개벽(開闢)잡지(각주 6)에 기고했던 전력에 대한 반면교사적 나무람이었다. 이 이전에도 유방은 문학동인지창조창간호 표지화의 제작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 정식으로 동인인 되고는 동인지 제 8(19211)의 표지화도 그렸던 미술과 문학 양방면에 관심을 갖은 청년이었다(각주 7 참조).

 

각주 1: 증조부가 조선 철종 임금의 사촌 동생이었던 덕분에 넉넉한 가정에서 자랐다. 일본 니혼대학에 다닐 때 도쿄학생예술좌에 가입하자 아들이 연극배우가 되는 것을 반대한 아버지가 집에서 쫓아내다시피 했다. 1946, 역시 일본대학을 다녔던 친구 김동원 등과 함께 극예술회 창립에 참가하며 우익 연극인들을 이끄는 인물로 부상했다. 나중에 국회의원을 거쳐 예술원 회장도 지냈다.

각주 2: 학생예술좌는 기관지()도 펴냈다. 거기서 “70 여명이란 많은 좌원이 이 예술좌의 문을 거쳤고”, 귀국한 회원들은 국내 극계에 투신하여 자못 그 장래가 기대되었으나 19398, “연극을 통하여 좌익사상을 고취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예술좌 관계자들이 검거되고 말았다(출처: 이두현, 한국연극사, 2014),

각주 3: 구성주의(Constructivism)는 러시아 혁명을 전후하여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일어나, 서유럽으로 발전해 나간 전위적 추상예술 운동. 구성파라고도 했다. 일체의 재현이나 묘사적 요소를 거부하고, 순수형태의 구성을 취지로 하며, 따라서 회화나 조각의 영역에서는 기하학적 추상의 방향을 지향했다(출처: 두산백과)

각주 4: 6.25때 북한 인민군 종군작가. 그때 최후 방어선이던 내 고향 마산 뒤쪽까지 당도했다. 그리고 적었다. “바다가 보인다. 거제도가 보인다. 바로 여기가 남해바다이다. 진해만을 발아래 굽어보며 마산을 지척 간에 둔 남쪽하늘 한끝 푸른 바닷가의 서북산 700고지 위에 지금 나는 우리 군대 동무들과 같이 진중에 있다.미제와 그 괴뢰들이 철옹성같이 가로막았던 38선을 가슴 답답히 앞에 두었을 때는 그렇듯 까마득한 외국의 남방 땅처럼 생각되던 사시장철 대나무 숲이 푸르던 마산 땅에 우리 영웅적 OO부대는 잘도 당도하였다. 바로 그 바다가 그 옛날 우리들의 리순신 장군이 왜적들의 함대를 전멸시킨 영웅의 바다다.”

각주 5: 진남포 태생. 아버지 김찬영이 병원에 입원했을 적에 간호를 했던 인연의 연장이었다. 그 시절 간호부는 선각 여성으로 치부되었다. 피부가 백인들처럼 해맑은 아주 빼어난 미인이었단다. 길거리를 가다가 서모와 마주친 사람들은 그 미모를 다시 보려고 뒤돌아보다가 서로 부닥치곤 했단다. 아버지와 함께 서울 장교동(청계로 2가와 3가 사이)에 한참 살았을 적에 장교동 미인으로 호가 났다.

각주 6: 개벽19206월 창간되어 19268월 폐간되기까지 발매 금지, 정간, 벌금 등 총독부의 온갖 압박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발간해서 통권 72호를 기록했다. 당시 전체 신문 잡지 구독자 수가 10만이 채 되지 않는 상황에서 개벽은 매호 평균 8천부가 판매될 정도로, 놀랄만한 대중성을 갖고 있었다.

각주 7: 서양화를 배우려고 한국인으로 최초로 유학을 갔던 도쿄미술학교의 1915년 양화과 졸업생 고희동(高羲東, 1886-1965)에 이어 두 번째로 1916년에 김관호(金觀鎬, 1890-1959) 그리고 세 번째로 1917년에 졸업한 이가 유방 김찬영이었다. 도쿄미술학교에 졸업 작품으로 남겼던 자화상 말고는 뚜렷한 작품이 남아있지 않은 유방의 미술작업은 10년 정도 활동했을 뿐이나 폐허, 창조, 개벽, 영대같은 문학지에 미술관련 글은 물론 시, 산문, 희곡 등을 기고하기도 했다. 못지않게 당신이 매달렸던 일은 전형필(全鎣弼, 1906-62)에 못지않은 고미술 수장이었다. 고미술을 수집하고 있을 때의 유방은 김덕영(金悳永)으로 통했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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