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에 시가 있고(김병기 화백 일대 7)

 

    만 백살의 개인전은 세상의 화제가 되고도 남는다. 미술관 출입과 인연이 없어 보이는 논객 맹산 김동길 교수도 화백의 개막전을 찾아 축사를 했다. 어쩌다 당신이 만났던 백세 인사들은 대부분 자리보전 중이었는데, 이번엔 두발로 꼿꼿이 서서 작업을 계속하는 이가 하도 경이롭다며 경축의 뜻으로 당신의 애송시 조조(曹操)<걸어서 하문을 나서다(步出夏門行)> 한 구절을 읊었다. “천리마는 늙어 마구간에 매여서도/ 마음은 천리를 치닷듯/ 열사(烈士) 비록 늙어도/ 큰 포부는 가시지 않았다오.”

    이어서 말했다. 전시회 이름 하나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 했지만, 청풍의 맑은 바람 정도가 아니라 그 기상이 하늘을 치솟는 용의 기세라 백세비룡(百歲飛龍)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침 당신 띠도 용띠라 했으니 하늘을 높이 나는 용이 분명하다고 치하했다축사의 끝머리에 태경이 꼭 백세가 되는 생일날에 당신의 사무실 회관에서 당신 남매가 즐겨온 냉면파티를 열겠다고 약속했다.

    과연 (2016) 49일 정오에 태평양시대위원회 회관에서 냉면과 빈대떡이 나오는 생일잔치를 배설했다. 여느 생일잔치처럼 케익 커팅이 있었다. 케익의 꾸밈이 무척 이색적이었다. 만 백세 또는 우리 나이로 치면 백한 살인데 거기에 필요한 축하 초가 도대체 과연 몇 개가 꽂힐 것인가 궁금하게 여기는 순간, 케익이 등장했다.

    꽂힌 초는 달랑 한 개였다. 그걸 보고 나는 무릎을 쳤다. 그 하나는 일백을 줄인 하나였다. 아니 백한 살이니 백 살은 거두절미하고 한 살 돌잔치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시회 개막식 날, 태경의 제자 한 분이 축하 인사에 그런 말을 했다. 나이가 깊어지면 오히려 아이의 순진무구로 돌아간다 했는데, 이제 돌을 맞았으니 앞으로 더욱 정진하기 바란다는 덕담이었다.

    물론 잔치 행사 시작 즈음에 맹산의 인사말이 있었다. 내용은 화백이 한국화단의 거목이 분명하다며 그날 아침에 당신의 칼럼 프리덤 워치에도 적었던 미국시인 킬머(Joice Kilmer, 1886-1918)<나무(Trees)> 시 한 수를 영어로 그리고 당신이 번역한 우리말로 암송해 주었다.

나무 한 그루처럼 사랑스러운/ 시 한 수를 대할 수는 없으리로다// 달콤한 젖 흐르는 대지의 품에/ 굶주린 듯 젖꼭지를 물고 있는 나무// 하늘을 우러러 두 팔을 들고/ 온종일 기도하는 나무 한 그루// 여름이면 풍성한 그 품 찾아와/ 로빈새 둥지 트는 나무 한 그루// 겨울이면 그 가슴에 눈이 쌓이고/ 비가 오면 비를 맞는 다정한 나무// 나 같은 바보는 시를 쓰지만/ 하나님 한 분만이 저 나무 한 그루를

    맹산의 칼럼 프러덤 워치에서 그리고 인사말에서 십 수 년 전에 앞서 세상을 떠난 화백의 아내가 평양 서문고녀 출신임도 상기시켰다. 그 서문고녀를 들먹인 것은 아마 당신을 포함해서 평양고보(이하 평고) 출신들의 옛 추억을 되살리는데 그만한 키워드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듣자하니 평고와 서문고녀는 학교가 아주 가까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 그때 10대 중반의 소년소녀에겐 두루 특별한 상념을 자아내는 지연(地緣)이 분명했을 것이다. 돌이켜보니 경북 사람들이 바닷가라며 하도(下道)라고 하대하는 경남 마산의 내가 다녔던 마산고는 마산여고와 지척 간이었다. 그때 일찍 이성에 눈뜬 동기들은 등교나 하교 길에 지름길이 아닌데도 일부러 마산여고 앞을 에둘러 오가던 경우가 있었으니 필시 평고생 가운데도 일찍이 서문고녀를 끼웃거린 조숙한 학생들이 적잖을 것이다.

    그런데 소년이 아니라 소녀가 문제였다. 서문고녀 출신인 화가의 아내는 한평생 남편을 다스릴경우가 있을 때마다 평고를 못 다니고 겨우 광성고보를 다녔다고 구박을 주었다 한다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맹산은 인사말에서 은근히 광성고보를 치켜세우는 말도 곁들였다. 광성은 기독교학교로서 믿음이 좋았던 반면, 평고는 머리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지는 몰라도 그 재주가 기껏 관청에 들어가 아전노릇 하는데 적잖이 쓰였다고 자복(自服)하고 있었다. 과연, 화백의 아내가 꼭 목격하고 들었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자복의 말에 더해 평고 출신의 걸출한 인물 맹산이 광성고보 출신 화가의 백수를 거창하게 배설하면서 받들고 있는 광경도 꼭 보았어야 했다.

    잔치는 김병기 화백의 인사말로 끝났다. “김동길 교수님이 그렇게 영어를 잘 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나도 시 한수를 낭독 하겠습니다. 양주동(梁柱東, 1903-77)의 시라 했다. “바닷가에 오기가 소원이더니 급기야 오고 보니 할 말이 없어 물결치는 바위위에 몸을 실리고 하늘 끝닿은 곳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인사말을 끝맺었다. “제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감사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감사하다는 말로 인사에 대신하겠습니다.”

 

추기:

지역감정이 자심하기론 북한이 남한 못지않음이니 김동길 같은 큰 인물이 어찌 대동강 발원지인 저 깊은 산골짜기 맹산군에 났는지 모르겠다고 김병기는 흘려 말했다. “양덕 맹산 흐르는 물은 감돌아든다고 부벽누하로다는 경기민요 양산도 타령을 통해 맹산군 말은 들어봤지만 우린 그곳이 어딘지는 몰랐다고 시침을 뗐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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