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애수(哀愁)’와 성춘향이야기

 

대학학부 3학년, 그러니까 1959년 11월경으로 기억된다. 함께 갔던 친구들은 누구였는지 기억에 없으나 명동에 있는 중앙극장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애수’라는 흑백영화가 개봉되고 있었다. 애절한 멜로드라마라는 얘기만 듣고 관람하게 되었다. 사람이 많아 입석표를 사서 보았는데, 그 당시에는 중앙극장도 가건물이었기에 중간에 쇠기둥으로 두 군데에 받침대가 있었다. 그 쇠기둥에 의지하여 입석표를 사서 선채로 관람했었다. 큰 생각 없이 보게 됐으나 주연이 당대의 미남으로 손꼽히던 로버트 테일러와 비비안 리의 청순한 모습이 화면을 누비며 감동을 자아내고 있었다. 특히 우연히 만난 두 남녀, 비가 오는 데도 주연인 로버트 테일러가 다시 오는 것을 보고 맨발로 뛰어나가 포옹을 하는 순박한 장면에 발을 동동 구르고 감동스러워 했던 것이 어제련듯 아련하다. 이야기의 줄거리를 다시 더듬어 본다.

1939년 9월 3일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프랑스 전선으로 이동 중이던 「로이 크로닌(로버트 테일러)」 대령은 차를 먼저 보내고 워털루 다리에서 행운의 마스코트를 꺼내 보면서 회한에 잠긴다. 장면은 바뀌어 1차 대전 당시 25살의 젊은 대위였던 크로닌은 휴가차 런던에 잠시 들렸다가 공습경보가 울리자 전철역으로 대피하다가「마이러 레스터(비비안 리)」라는 발레리나를 우연히 만났다. 마이러는 다음날 프랑스 전선으로 떠나는 로이에게 행운의 마스코트를 선물하며 둘은 아쉬운 이별을 고한다.

그날 저녁 발레무대에서 춤을 추던 마이러는 우연히 둘러보다 객석에 앉아있는 로이를 확인하고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했다. 로이는 마이러에게 쪽지를 보내지만 이를 눈치 챈 심술쟁이 발레단 단장 올가의 방해로 만나지 못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 다행히 마이러의 친구 「키티」의 도움으로 둘은 운명적인 재회를 했다.

로이는 프랑스 전선에 투입되는 시기가 다소 늦춰진 틈을 타 그녀에게 청혼을 하지만 급작스럽게 계획이 변경되어 채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전쟁터로 떠나게 됐다. 마이러는 공연을 뒤로 하고 로이를 배웅하러 갔다가 발레단에서 해고되고, 이에 항의하던 키티도 같이 해고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후 마이러를 보러 온 로이의 부모님을 만나러 나갔던 자리에서 부모에게 인사를 마치고 잠시 있는 사이에 우연히 신문에서 전사자 명단을 보던 중 로이의 이름을 발견하고 거의 기절상태에 이르고, 로이 부모와의 면담도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결국 삶과 죽음이 갈리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펼쳐지는 명문가 출신의 장교와 가난한 발레리나의 애절한 러브스토리였다. 원체 뛰어난 인물의 주연이었던 만큼 운명처럼 만난 둘이 만난 지 하루 만에 결혼을 결심하지만 운명은 이들을 갈라놓고 결혼식도 치루지 못한 채 남자는 머나먼 프랑스 전선으로 떠나고 여자는 영국에 남아 힘든 하루하루를 보냈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졌다는 고통에 생활고까지 그녀를 옥죄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전사자 명단에 오른 그의 이름을 목격하게 되고 두 남녀의 어긋난 사랑과 회환, 이런 것으로 해서 절망과 좌절 끝에 생활고를 극복하지 못한 채 마침내 거리의 여자로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실로 우연으로 전사자 기록이 잘못되었고, 로이 크로닌이 살아서 돌아오게 되고 두 사람은 만나게 된다. 어쩔 줄 몰라 반가워하는 로이 크로닌과는 달리 좌절 속에 버려진 몸, 반갑기 이를 데 없으나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된 회한, 마침내 품에 안겨서 잠시 기쁨을 누리나 그 회한을 감당할 수 없어 마스코트를 남긴 채 그녀는 의도된 사고사로 죽고 만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로이 크로닌 대령은 회한 속에서 통곡을 하게 된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보게 된다. 만약에 주인공 로이 크로닌이 전사자 명단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면, 또는 전사했더라도 그 이름이 밝혀지질 않았다면 우리의 주인공 마이러 레스터는 생명을 걸고라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아름다운 미래를 꾸려가면서 몸이 부서지더라도 거리의 여인으로 타락하지 않고 생활고의 고통을 감내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로이 크로닌이 다시 등장했을 때 기쁨과 환희에 젖어 만인의 축복 속에서 멋진 출발을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여기서 우리는 비전과 신념과 미래에 대한 확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한편 우리 한국 사람들의 마음의 애인이요 누구나 신나하는 성춘향 스토리를 보자. 다 아는 얘기이나 다시 그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숙종대왕 즉위 초에 퇴기 월매는 자식이 없어 매일 기도를 하여 성참판과의 사이에서 딸 춘향을 얻었다. 춘향은 어릴 때부터 용모가 아름답고 시와 그림에 능하여 온 고을이 춘향을 칭송했다. 어느 봄날 사또 자제 이도령이 광한루에 봄 구경 갔다가 그 곳에서 그네를 타는 춘향을 보고 춘향의 아름다움에 반해 방자를 시켜 춘향을 데려오게 하지만, 춘향은 그에 응하지 않았다. 이도령은 그 날로 춘향의 집으로 찾아가 월매에게 춘향과 백년가약을 맺겠다고 맹세하고 춘향과 부부의 연을 맺는다. 그러던 어느 날, 부친의 남원부사 임기가 끝나자 이도령과 춘향은 이별을 맞이한다. 이도령은 춘향과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서울로 떠난다. 새로 부임한 변학도는 만사 제쳐두고 이름난 기생들을 불러 모아 연일 잔치를 벌이는데, 그 와중에 예쁘기로 소문난 춘향도 불려가게 된다. 변학도는 춘향이 기생의 딸이므로 춘향 또한 기생이나 마찬가지이니 수청을 들라고 명 한다. 그러나 춘향은 자신은 일부종사해야하니 수청을 들 수 없다고 거절하여 옥에 갇히게 되고, 화가 난 변학도가 춘향을 자신의 생일날 처벌하겠다고 한다.

한편 한양으로 간 이도령은 장원급제하여 암행어사로 다시 남원에 내려오게 된다. 이도령은 변학도의 횡포와 춘향이 겪은 일들을 모두 듣게 되지만 자신의 신분을 속이기 위해 거렁뱅이 행세를 하며 넋 나간 사람처럼 행동한다. 춘향은 그런 그를 원망하기는커녕 여전히 변치 않는 사랑을 보여주며 월매에게 그를 극진히 대접해주라고 부탁하기까지 한다. 드디어 변학도의 생일잔치 날, 남루한 행색을 한 이도령이 들어와 자신이 시를 한 수 지을 테니 술 한 잔만 대접해 달라고 하며 변학도가 백성을 핍박하는 것을 꼬집는 시를 지어낸다. 변학도는 그 시를 보고도 이도령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춘향을 불러내라 명령하고, 곧 암행어사 이도령이 출두한다. 변학도와 그 무리들은 포박당하고 춘향은 어사인 이도령을 알아보게 되고, 둘은 기쁘게 재회하게 된다. 춘향은 굳은 절개로 인해 칭송받고 이도령과 함께 행복하게 산다.

이름난 시이기에 함께 살펴보고자 여기 기록한다.

금준미주(金樽美酒)는 천인혈(千人血)이요,

(황금술잔에 담겨있는 맛좋은 술은 천명 백성의 피요,)

옥반가효(玉盤佳肴)는 만성고(萬姓膏)라.

(옥쟁반에 담긴 맛있는 고기는 만 맥성의 기름이라.)

촉루락시(燭淚落時)에 민루락(民淚落)이요,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들의 피눈물이 떨어지고,)

가성고처(歌聲高處)에 원성고(怨聲高)라.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곳에 원망소리고 드높아진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보자. 만약 이몽룡이 죽었다는 확실한 소식이 춘향에게 전해졌다면 희망을 잃고 좌절과 절망 속에서 변학도의 수청요구를 거절할 수가 있었을까? 춘향인들 미래가 없는 삶을 기대할 순 없었을 터라 다른 대안이 없고 희망도 없는 가운데 변학도의 수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여기서 우리는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가 희망과 비전과 미래에 대한 확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된다.

구한말에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이광수와 3·1 만세운동의 지도자 33인 중에서도 말년에 약간 명을 제외하고 대부분 친일행각을 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우국지사들이 말년에 변절을 했던 것은 폭압에 시달려 견딜 수 없는 고통은 물론이거니와 일본의 패망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고, 또 외로이 투쟁하는 독립투사나 나라의 지도층에 대해서 국민들이 열성적인 지원과 존경과 신뢰를 보내주는 것을 소홀히 했던 것에 원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430년 동안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탈무드」에 매달려서 하나님의 자손이라는 선민의식을 잃지 않고 한결같은 신앙과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고 산 것이 오늘날 우뚝한 이스라엘을 만든 원동력이라고 본다. 따라서 지도층에서 해야 될 가장 중요한 덕목은 민족의 길을 제시하고, 확신과 신뢰를 주고, 희망과 열정을 가질 수 있도록 격려하고 계속 길을 터주는 길라잡이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할 것으로 본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기까지 한 축을 이루었던 지도자 여러분들이 여생을 바쳐서 이끌어나가야 할 덕목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삼가 원로들의 분발을 기대해본다.

 

여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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