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청풍의 주인공, 바람이 일어나다(김병기 화백 일대 6)

 

    “만절(晩節)을 보면 초지(初志)를 안다.” 만년에 보여준 처신에서 한 사람이 초년에 품었던 입지나 의욕수를 능히 짐작할만하다는 말이다.

    태경 김병기는 만 백세가 되던 2016년 봄에 개인전(2016.3.25.-5.1)을 서울 평창동 소재 가나화랑에서 열었다. 바야흐로 세계기록이 세워지는 바로 그 현장이었다. 신작 10여점이 함께 출품되었기에 전시회 이름도 회고전이 아닌 개인전이었다.

    뜻깊은 행사답게 전시회 타이틀도 둘이었다. 하나는 바람이 일어나다”, 또 하나는 백세청풍(百世淸風).”

    주제(主題)는 문청(文靑)시절부터 좋아했다는 프랑스 시인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각주 참조) 한 구절 바람이 일어나다. 살아야 한다.”에서 따왔다. 분단과 625 등 생사를 넘나드는 파고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던 당신의 백년 개인사가 절대가난 등 갖가지 질곡을 압축적으로이겨낸 끝에 나라의 체통이 당당해진 대한민국 현대사를 직접 목격하고만 감격의 말이었다. 특히 해방직후 북한 미술동맹 서기장, 625때는 남한의 종군화가단의 실무부단장을 지낸 전중세대(war generation)’의 독백이 이만할 수가 없었다.

    부제(副題) 백세청풍은 오롯이 개인적 성취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맑고 높은 절개가 오래도록 전해진다.”는 뜻의 사자성어는 한민족 핏줄 모두가 꿈꾸는 경지인 것. 서울 북악산 아래 옛 돌에 주자(朱子) 글씨로 새긴 석각(石刻)도 있고, 이 말을 좋아했던 안중근 의사가 그 서체를 따라 쓴 글씨도 있다.

    이 사자성어가 개인적으로 그럴싸함은 글귀 가운데 인간 세()”를 패러디해서 나이 세()”로 대신 읽고 나면 백 살을 맞은 청풍 김씨라는 말이 된다. 당신이 지금도 매일같이 맑은 바람으로 그림을 제작하는 일상을 말해주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연히 백 살의 나이에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는 자부심이 이만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2014년 말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가진 뒤로 2015년 봄부터 서울에서 제작한 10여점을 앞세운 전시회였다. 세계적으로 그림 제작의 최고령 기록은 피카소일 것이다. 93세로 타계하기 일 년 전까지 그림을 그렸다. 누구보다 피카소를 존경해온 이가 김병기인데, 그림 스타일은 몰라도 그림제작의 나이로는 그이를 저만치 물리쳤다.

    부귀를 들먹이긴 하지만 인간 복록에서 수복(壽福)만한 것이 없다. 한국현대미술을 일군 명인들 가운데 가장 장수하는 분이다. 마라톤 선수처럼 장거리를 달려온 덕분에 그동안 이중섭 단거리 선수나 김환기 중거리 선수를 따듯하게 보듬어서 그들의 미술이 이 시대 애호가들의 눈높이 사랑이 되게끔 말품을 팔아주었다.

    초등학교 한반이던 이중섭은 625 동족상잔의 비극을 그림으로 승화시켜준 리얼리스트였고, 도쿄의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에서 처음 만난 뒤로 미국 체류 중에도 줄곧 교유를 나눴던 김환기는 한국 전통의 풍류정신을 뉴욕의 세계미술 현장까지 끌고 간 경우라고 치켜세웠다. 그렇게 가까웠던 화가들을 현창하는 그의 빼어난 수사(修辭)에 감복했던 애호가들은 언뜻 그렇다면 김병기는 이중섭김환기 주연을 떠받치는 조연이 아니었던가, 그런 인상도 받곤 했다.

    백세시대가 왔다지만 한 세기를 헤아리는 건강 장수는 꿈같은 현실이다. 고인이 된 명인들의 탄생 백년을 기억하는 것도 인생백년이 그렇게 어렵고 그만큼 희귀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2016년에 탄생 백주년을 맞았던 이중섭과 유영국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했던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김병기유영국이중섭은 동갑이면서 일본 문화학원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문수학했다. 지우일 수밖에 없었다. 1965년에 미국으로 건너간 김병기가 1980년대 중반, 모처럼 서울 출입을 하자 그를 환대하는 밥자리를 마련한 이도 유영국이었다. 거기서 아주 뜻밖에도 침묵은 금, 웅변은 은이란 일본 속담을 신봉하듯, 과묵하기 짝이 없었던 유영국이 기어코 한마디 던졌다. “중섭이 처럼 일찍 죽지 못한 것이 통한!”이라고. 당신 그림 값이 중섭에게 턱없이 못 미친다는 한탄으로 언뜻 들렸다.

    화가가 그림 값을 말하는 법이 아니라는 소신의 김병기는 못 들을 말을 들었나, 귀를 의심했다. 그게 아니었다. 내남없이 그 시절 화가들은 그림으로 생활할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러한즉 이중섭의 요절을 아쉬워했던 눌변의 유영국의 그림 값 타령은 기실 반어법(反語法)빈말이었다고 태경은 믿었다. 그런 유영국이 살았더라면 이중섭 보다 두 배 이상 살아낸 김병기에게 상수(上壽) 덕분에 뒤늦게 세상 사랑을 더 받게 되었다는 참말을 건네지 않았을까.

 

각주: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는 아주 긴 장시(長詩)이다. 권위 있는 해설(김현 옮김, P. 발레리: 해변의 묘지, 1973)에 따르면 그의 시학(詩學)미의 부정이다. 왜 미는 부정인가. 말이 결핍되어 있는 상태를 말로서 표현해야 한다는 것. 곧 표현할 수 없음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미는 부정이라고 발레리는 생각한다.”했다. 발레리의 시학은 김병기 미학의 한 근거가 되었지 싶다. 이상(李箱, 1910-1937) 시의 난해성을 변호해온 그의 오랜 시각에 미루어 그렇게 짐작된다. 이상을 변호하는 말인즉 모르겠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중요하지 않은가. 이해했다 하면 그건 이미 기성(旣成)이 되고 만다. 예술은 아는 게 아니다. 납득하고 느낌이 예술이 아닌가!”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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