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생활의 서울 속개(김병기 화백 일대 5)

 

    그 길로 서울로 되돌아와서 20154월말부터 가나화랑이 마련해준 서울 평창동 소재 화실에서 작업을 이어갔다. 영구귀국의 작심을 천명이라도 하듯 2016년 연초엔 한국 국적도 되찾았다. 그리고 지난 1년 동안에 제작해낸 10여점에다 로스앤젤레스에 그렸던 미공개 작품들을 합해 그 성과물을 갖고 20163월 말, 당신이 만 백 살이 되는 시점에서 신작전이 열렸다. 대성황이었다. 언론의 호응이 대단했다. 백 살에 회고전도 아닌 신작전 같은 개인전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화백의 화실은 내 사무실과 지근(至近)이다. 내 집과도 멀지 않다. 어쩌다 명절 같은 날, ‘아점(brunch)’이라도 대접하는 자리가 생기면 서울대 시절의 제자인 김종학과 송영방 화백도 함께 청하곤 했는데, 그 자리에서 주고받는 대화에서 지난날의 기억은 스승이 제자들을 단연 압도했다.

    자연히 직접 대면하는 기회가 많아졌다. 당신의 국내외 그림 전시를 앞두고 전시 관계자나 사진작가를 만날 경우에 배석을 청하는 경우는 좀 공식적인 어울림이었고, 겨울철에 이어 더운 여름날이면 더욱 잦아지는 냉면집 순례는 방외의 어울림이 되었다. 냉면은 남도 출신인 내가 서울에 살게 되면서 사랑하게 된 음식인지라 아무래도 평양 출신의 권위 있는 태생적 입맛은 어떻게 즐기는지, 그 품평을 엿듣는 것도 배움이라면 배움이었다. 태경을 생전에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자리도 2022123일 북한산 북쪽 자락 일영의 한 냉면집이었다.

    본류 이야기를 진행하는 틈새로 잠시 태경의 냉면 이야기를 여기 옮기려 한다. 하나는 2000년대 초반 한국 측 문화교류 인사들이 북한을 다녀오면 항상 묻어나던 이야기가 있었다. 평양 옥류관 냉면 체험담이었다. 하나같이 본방 맛을 한번 제대로 즐기고 왔다는 감상이 따라붙었다.

    이 전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태경에게 물었다. 당신 대답은 아주 단호했다. 음식은 가정경제와 국가경제가 향상되는 도중에서 제대로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것인데 모든 것이 한국보다 저열(低劣)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그곳 냉면이 어찌 이곳 것에 당할 것인가. 해서 북한을 잠깐 다녀온 사람들의 말은 그리 신뢰할 것이 못 된다는 지적이었고 확신이었다. 그러는 사이, 내가 중국 상해를 다녀올 일이 있었다. 그곳 시내의 옥류관을 찾아 냉면을 직접 먹어보았다. 우리 기준으로 말하면 칡냉면이 그 아닌가 싶었다. 결론은 나도 서울 시내 등지에 정평난 냉면이 단연 윗길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또 하나는 평양 일대의 냉면집 풍경 이야기였다. 지금은 메밀반죽을 기계로 압착하지만 옛적은 기운 좋은 남정네가 압착기의 나무기둥을 잡고 매달려 아래로 힘을 주어야 국수를 뽑을 수 있었다. ‘중머리가 그 일 담당. 과연 국어사전에 중머리란 국숫집에서 부엌일을 하는 머슴. 평북 지방의 방언이라 적었다. 다음이 태경의 믿을 만한 증언이었다. 평양의 중머리는 대체로 그 많은 평양기생들의 기둥서방이기 일쑤였단다. 어째서 그랬든가 내가 묻자 태경의 우스개 대답이 돌아왔다. 중머리들이 기둥서방이 됨직 함은 아래로 타고 찍어 누르는 노릇이 비슷해서 그렇지 않았겠는가?!”

    다시 본류로 돌아가면 그렇게 자주 어울릴 기회가 생기면서 그렇다면 김병기에 대한 인간적 풍모 정도는 적을 만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가 뒤늦게 붓을 들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20166월말의 작심이었다.

    “너무 늦은 때는 없다는 내용의 고사(故事)도 내 마음에 닿았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회고전, 20163월의 가나화랑 신작전, 201610월의 일본 도쿄 개인전 등 화가 일대에서 기념비적 행사인 굵직굵직한 전시회를 직접 참관한 마당이면 직접으로 아니 피부로 부딪힌 태경의 면모를 그릴만도 하겠다는 정당성이 분명해진 것이었다.

    고사인즉 나이 여든의 노장이 밤나무를 심자 너무 늦게 심는 것이 아닌가?, 주위에서 웃었다. 하지만 10년 뒤에도 건강을 누리면서 밤 맛도 즐겼다는 것(정민, “팔십종수(八十種樹),” 조선일보, 2016.7.13).

    이런 일화도 소개했다. “홍언필(洪彦弼)의 아내가 평양에 세 번 갔다. 어려서 평양 감사였던 아버지 송질(宋軼)을 따라갔고, 두 번째는 남편을 따라갔으며, 세 번째는 아들 홍섬(洪暹)을 따라갔다. 아내가 처음 갔을 때 장난삼아 감영에 배를 심었고, 두 번째 갔을 때는 그 열매를 따 먹었다. 세 번째 갔을 때는 재목으로 베어 다리를 만들어 놓고 돌아왔다.” 일화에 등장하는 세 인물은 모두 조선조 전기에 평양감사를 거처 영의정까지 올랐던 문신들이었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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