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생각 저 생각 (109) 천리구 6

 

    도산에게 쓴 엽서 다음 페이지부터는 천리구의 미국유학생활에 관한 사진들이 있다. 사진을 순서대로 설명한다.

(1) 김동성이 미국서 가장 오래 머문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Gymnasium and Armory1910년 엽서 사진이다. 유럽의 고성과 같이 보이는 고색창연한 건물이다. 오래 전에 나도 이 대학에 간 적이 있다. 그러나 이 건물을 본 기억은 없다.

(2)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학년 무도회 사진이다.

(3) 오하이오 주립대학이 있는 콜럼버스 시의 North High Street의 그림을 담은 1908년 엽서 사진이다. 중앙에 전차가 보인다. 밤경치를 그린 것으로 건물과 배경이 어둡다.

(4) 강의실 사진이다. 큰 강의실에 수십 명의 학생들이 교단을 향해 앉았고, 오른 편에 강사의 모습이 작게 보인다. 뒷모습의 학생들도 모두 정장한 모습이다. 출처는 이 대학의 아카이브이다.

(5) Franklin Open Session이란 제목 아래 김동성이 콘웨이 헨드릭스 칼리지 재학 시절의 토론회에 참석한 학생들의 사진이다. 토론회의 이슈는 미국과 캐나다의 관계였다. 일곱 명의 학생사진 가운데 한 명이 김동성이다. 그가 학내 각종 현안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흔적이다.

(6) 두 장의 편지 사본 사진이다. 처음 것은 1946년 김동성이 뉴욕에 와서 콘웨이의 룸메이트였던 로이(Roy)란 친구에게 쓴 것이다. 감리교본부(Methodist Headquarter)를 통해서 주소를 알았다. 날자는 118일이고, 자기를 기억하느냐면서 가족의 안부를 묻는 간단한 편지다. 답장이 금방 온 모양이다. 답장에 대한 회신이 처음 편지의 아래에 있다. 날짜가 1116일이다. 안부를 받고 모친이 건강하시다니 반갑다는 이야기와 자기(김동성)도 모친과 같이 지내는데 연세가 83세라고 하면서 자기는 56세라고 했다. 또 헨드릭스 칼리지를 방문하고 싶으나 여의치 못하다는 것과 38선으로 분단된 한국의 이야기를 잠시 비치고 있다.

(7) 헨드릭스 칼리지의 학생회 잡지의 한 면 사진이다. 1909년 졸업 때 각종 상을 받은 졸업생(?)1910년의 인물(Who's Who in 1910)의 명단이 있고, 맨 아래에 요즘 우리나라의 여권사진만한 김동성의 사진이 있다. 미남이다. 사진 아래 D. S. Kim이란 이름이 있고, Korean Missionary to Benighted Hendrix Students란 설명이 있다. 생각건대 김동성은 유학생이었으나, 송도 한영서원의 왕영덕의 가르침으로 선교사의 자격을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Benighted란 말은 갈 길이 저문, 날이 저문이란 뜻이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갈 길이 먼 헨드릭스 칼리지 학생들을 위하여 한국에서 온 선교사란 의미가 아닌가 한다. 그만큼 그는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8) 다음 페이지에는 명함만한 크기의 오하이오 주립대학 미식축구 프로그램 석장 사진과 김동성이 그린 삽화가 있다. 1917년과 1918년 프로그램사진이다. 상대는 오하이오 웨슬리안, 위스콘신, 오벌린 대학 등이다. 삽화는 김동성이 오벌린 대학과의 표지그림을 보고 비슷하게 그린 것이다. 두 팔을 넓게 벌리고 바른 발을 높이 들어 볼을 차는 형상이다. 그렇게 찬 볼을 잡고 뛰면 터치다운(touchdown)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닌가 한다.

(9) 다음은 김동성이 미국 유학 당시 한국어 신문인 신한민보191745일자에 발표한 만평이다. 태극기를 두르고 쓰러진 애국자의 영혼을 천사가 붙잡아 일으키어 구름을 타고 천상에 올라가게 하는 그림이다. 삽화 중앙 위편에 세로로 高節亮風이란 넉자가 보인다. “높은 절개와 밝은 가르침은 만고에 남는다(高節亮風萬古存)이란 화의(畵意)를 전하고 있다는 설명이 있다.

(10) 다음은 Oriental Impressions in America(동양인의 미국 인상기)의 표지 사진이다. 1916년이다. 페이지를 넘기면 Mary MacMillan이 쓴 Foreword와 원서의 10-11쪽 사진이 있다. 그 옆 장은 매일신보1918226일자 3면에 실린 김동성의 연재물 米洲印象이다. 김동성은 1916년 미국에서 발간한 동양인의 미국 인상기가운데 다섯 꼭지를 영문에서 국한문체로 번역하여 4회로 나누어 매일신보에 실었다.

(11) 동아일보창간호 192041일자 3면에 실린 만평사진이다. 김동성은 미국 유학에서 귀국하자 19204월에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언론계에 첫발을 내딛었다. 만평은 동아일보란 글자가 박힌 수건을 허리에 두른 어린이가 까치발로 곧추 서서 손을 위로 뻗어 단군유지(檀君遺趾)’라는 휘호가 쓰인 액자를 잡으려 하고 있다.” 잡았는지는 의문이다.

(12) 다음은 동아일보19204113면에 실린 4칸 만화다. 밥상을 앞에 두고 먹을 생각은 안하고 동아일보만 열심히 드려다 보는 그림. 신문을 보며 길 가다가 발에 다른 사람이 걸려 엎드려져도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걷는 모습.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으면서 참지 못하고 신문을 보는 그림. 아기가 포대기에서 떨어져도 그걸 모르고 신문만 들여다보는 모습의 네 컷이다. 이야기그림이란 제목이 옆에 있다. 4칸 만화가 최초로 한국 신문에 등장한 것이라고 하고, ‘만화(漫畵)’라는 말도 김동성이 처음으로 썼다고 한다. 또 그는 만화에 대한 이론도 깊어 만화 창작 이론의 효시(嚆矢)”로 불린다고 한다. 동아일보엔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던 195521일부터 김성환(金星煥, 1932-2019) 화백의 고바우영감이란 4칸 만화가 실리기 시작했다. 인터넷에 보니 고바우영감1980911일부터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겼고, 그것이 다시 1992문화일보로 옮겼다. 2000929일에 마지막 회가 나갔다고 한다. 50년 만에 연재가 종료된 것이다. 다른 신문에도 4칸 만화가 있었겠으나, 고바우영감이 최장수였다. 기네스북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김성환과 같은 신문만화가들은 김동성을 대선배로 모셨을 것이다.

 

최명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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