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장이 따로 없었다(박경리 105)

 

    갑작스런 입원에 딸 김영주는 어머니 박경리의 종신(終身)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장례를 어떻게 치러야 할지, 당장 아득했다. 당신 유언을 들을 수 없게 되었으니 더욱 그랬다. 입원 즈음에 벌써 말문을 닫았기 때문이었다.

    기껏 영주가 기억해낸 것은 어머니 박경리가 딸을 앞세운 간접화법 말이었다. “나의 딸 영주가 말하기를 엄마가 돌아가시면 엄마의 모든 것이 통영으로 갈 것이라고 해요(진의장,바다의 땅. 채움 커뮤니케이션즈, 2014, 147).

    325일 뇌졸중 증세로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 입원이었다가 가족 요청으로 423일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그리고 55일 오후 245분에 영면했다.

임종의 숨을 거두신 후의 시간이 아직 여물지 않아서인지 선생의 안색은 평소와 다름없이 맑고 깨끗했다. 꼭 감은 눈자위의 누르스럼한 잔기(殘氣)에는 힘든 이승의 고달픔이 흐릿한 흔적처럼 남아 있지만 복스러워 뵈던 입매는 미련을 버리려는 듯 앙다물려 있고 표정은 착잡했지만 평화로웠으며 얼굴은 한창 젊은 시절의 날 선 품위와 노후의 넉넉한 고매함이 한 모습으로 어울려 강인하면서도 부드럽고 한없이 넓으면서도 가운데로 정기가 맺혀져 있는 옹골찬 인상을 보이고 있었다(김병익, “도저한 삶, 자존의 문학,”현대문학, 20086, 291)

    무엇보다 장지(葬地) 정하기가 화급했다. 급히 연결이 된 진의장 통영시장에게 탐문했다. 과연 만년에 내왕이 많았던 그이를 통해 사후 처리에 대한 당신 당부를 들을 수 있었다. 고향땅에 묻히고 싶다는 말이었다.

입살이 보살

    귀향 행차로 말하자면 반세기만이던 200411월에 이어 2005년 말에도 통영으로 나들이했다. 이때는 한강 가에 매달려 있던 거북선 복제품을 서울시로부터 선물 받아 통영에 안치시켰음을 기념하는 통영시 행사 배석이 명분이었다. 당신의 지극한 사랑인 이순신의 분신이 고향땅에 옮겨 자리 잡게 되었다는 진 시장의 전갈이 작가의 통영방문(20051116)을 다시 이끌었다. 과연 이순신 장군께서 살아 통영으로 오시는 것 같다는 말과 함께 박경리는 고향을 다시 찾았다.

    그때 미륵도의 양지농원에 딸린 팬션에 묵었다. 아침 산보를 하면서 이런 곳에 한번 살고 싶다!”고도 했다. 당포해전의 당포 바다도 눈길에 들어오는 곳이다. 진 시장이 집필실을 하나 지어 드릴 터이니 통영에서 만년을 보내도록 권유했다. 마침 함께 자리했던 농원의 창업자도 작가를 위해서라면 땅을 할양할 용의가 있다고 호응했다. 작가의 작품을 좋아한다는 통영초등학교 5년 선배 정창훈(鄭昌勳, 1921-2012) 변호사였다.

    고향 땅 한 귀퉁이가 좋긴 해도 글쓰기가 예전 같지 않다 했다. 게다가 전지(轉地) 집필 같은 호사는 당신 체질이 아니라며 사양했다. 그럼에도 통영 시청 문화행정은 작가의 고향 정착을 부추길 요량으로 집필실 마련 복안을 시정 과제의 하나로 삼아왔던 터. 그 참에 작가 위중이 급보로 전해졌다. 그 당장에 집필실 후보지라 여겼던 터를 영생처로 점지했다. “입살(口煞)이 보살(補乷)”이라고, “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 그대로가 된 셈이었다. 땅 주인이 약속했던 8백 평 땅이 장지(葬地)로 정해졌다.

    그런 전례 또는 관행이 이 나라 지방자치단체에 있었던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통영시는 작가의 장례를 나라 주관의 국장(國葬)을 염두에 두면서 시 주관의 시장(市葬) 체제로 움직여 나갔다. 수구초심이라고 작가의 주검을 고향땅으로 모시는 것은 작가와 시장 사이 돈독했던 개인 정리(情理)의 표출이면서, 이 이상으로 출향(出鄕) 유명 인사의 주검자리 유치는 고장을 넉넉하게 해줄 유력 문화자산(cultural asset)의 축적이라 여긴 도시 리더십의 확신이 있었다.

    시장이 호상(護喪)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 실무를 위해 김상영(金尙瑛, 1959- )통영시 문화예술과장은 임종에 대비해서 이미 서울아산병원에 급파되어 있었다. 역시 문화도시 문화예술과장답게 그간의 경위를 기록(“닷새간의 일기”, 토지문화재단 편, 봄날은 연두에 물들어, 마로니에북스, 2009, 143-5)해나갔다.

어린이들의 목청이 5월 하늘을 찌르는 날 선생님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쉼 없이 달렸습니다만 천안삼거리 근처에서 발목이 잡혔습니다. 갓길과 버스전용차로에 단속된 친구들을 보고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한 절묘한 선택이 연휴 마지막 날 오후 세시였습니까? 4월 중순 투병중일 때 당신의 체온은 젊은 우리보다 더 따뜻했습니다. 확인이라도 시켜줄 듯이 양손을 내밀고 계셨습니다. 너무나 편안한 인상이었습니다. “고향에서 왔습니다.”라는 인사에 화답이라도 하시는 듯 했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무거운 마음으로 선생님의 나들이옷을 준비했습니다. 안동포에 고향의 흙냄새와 갯내음을 올올이 담았습니다.

이름 없는 독자들의 발길도

    나도 56일 오후 6, 문상차 아산병원 장례식장으로 갔다. 단구동 집 보존의 물길을 터준 김수학 전 한국토지공사 사장과 함께. 김지하시인이 옆에 서있는 둘째 아들에게 할머니 친구였다!”고 나를 소개했다. 상청을 둘러보니 알만 한 사람이 여럿 보였다. 최일남, 김병익 문학가들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

    띄엄띄엄 앉은 문상객들이 하나같이 슬픈 얼굴이었다. 역시 감수성 높은 문인은 슬픔을 넘어 거기에 어린 사람의 향기를 헤아리는 중이었다(최일남,앞의 책. 26)

모진 세월 다 보내고 생의 종장에 확인한 경지가 기막히도록 아름답습니다. “늙어서 이리 편안하고,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는 절창이 얼마나 도저하고 시원합니까.

    그런 이를 떠나보내는 상청의 모습은 역시 한 여류가 정감 나게 압축했다(강석경, “박경리 선생님을 기리며.”현대문학, 20086, 332). 국장이 따로 없었다는 말과 함께.

정말 선생님은 문학으로 만인의 가슴에 불꽃을 심으셨구나, 하고. ‘국민이라는 수식어가 요즘 너무 통속적으로 쓰이지만 선생님은 그야말로 국민의 작가로서 존경을 받았다는 것을 이번 장례식에서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과 총리의 문상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이름 없는 독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기에.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No.

Title

Name

Date

Hit

3232

글을 마침에(박경리 이야기 낙수 4)

김형국

2022.05.19

1961

3231

네 재산을 쓰라 - 무재 칠시(無財七施)의 회상 -2

여상환

2022.05.18

462

3230

51년 만에 다시 보는 추억의 사진

이성순

2022.05.17

1096

3229

이 생각 저 생각 (108) 천리구 5

최명

2022.05.16

1639

3228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493)

정우철

2022.05.15

591

3227

지하시인의 타계(박경리 이야기 낙수 3)

김형국

2022.05.12

2110

3226

네 재산을 쓰라 - 무재 칠시(無財七施)의 회상 -1

여상환

2022.05.11

545

3225

‘천사 섬’에 사는 ‘천사 청년’

이성순

2022.05.10

942

3224

이 생각 저 생각 (107) 천리구 4

최명

2022.05.09

1640

3223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492)

정우철

2022.05.08

610

3222

박경리⦁김영주 모녀의 유방암 투병(박경리 이야기 낙수 2)

김형국

2022.05.05

2037

3221

어떻게 살아야하나, New start의 재해석-3

여상환

2022.05.04

588

[이전] [6][7]8[9][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