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과(美人科)’ 인물이었다(박경리 103)

 

    예전에는 언행이 비범했던 여인을 일컬어 여중군자(女中君子)’라 했다. 글 읽는 이를 선비, 선비 가운데 벼슬길에 나갔던 이를 군자라 일컫던, 전래 남존여비의 발상법대로 남성 한정의 말이었음에도, 예외적으로 빼어난 여인 역시 군자라 불렀다. 여중군자와 함께 치마를 두름이란 뜻의 ()’자를 붙여 군군자(裙君子)’라고도 불렀다. 어머니 박경리의 사람됨을 묻는 말에 외동딸 영주는 한 마디 단답(單答)이었다, “어머니는 큰 선비입니다!”

    군자의 인물됨을 말할 때 신언서판(身言書判)으로 따졌다. ‘은 외모를 말함인데 내가 처음 만났을 적의 박경리는 한마디로 50대 후반 촌부(村婦)’였다. 텃밭에서 혹은 부엌에서 금방 걸어 나와 외객을 맞던 모습이 그러했다. 요즘 버스 칸에서 마주치는 여고생도 가볍게 바른다는, 여인들의 최소 화장이지 싶은 연지(臙脂)의 기미도 전혀 없던 진짜 백면(白面)이었다.토지작품에 감동을 받았던 끝에 성사된 만남이었으니 나는 큰 인물을 직접 대면한다는 생각만 가득했을 뿐이었다. 그때 그 만남 장면을 지금 돌이켜 보려니 그런 맨 얼굴 기억만 떠올랐다. 그 총중에 그리고 이후 내내 내 뇌리에 박힌 대표 모습은 당신의 눈길 쪽이었다. 총기(聰氣)가 가득 담겨 열기마저 느껴질 지경의 형형(炯炯)하고도 형형(熒熒)한 그 눈길. 그 눈빛이었다.

    그때 촌부의 행색이었을지언정 당신이 미인과(美人科)’라는 인상은 능히 직감했다. 호사가들이 젊은 여성의 미모를 평하는 어투 가운데 이를테면 평사낙안이란 말에서 따온 낙안(落雁)’이란 말도 있었다. 중국 고사에서 여인의 빼어난 미모를 보고 넋이 나간 나머지 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날개 짓을 잊어버려 그만 땅바닥에 떨어졌다던 그런 피부적미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기품(氣品)이 강하게 느껴졌던 인물이어서 내가 지금 미인과라고 분명하게 기억해내는 것이다.

박꽃 같다

   기품이 외부로 드러난 모습을 기색(氣色)이라 한다면 두 지인의 말이 특히 경청할만했다. 한 사람은 친구사이 화가 천경자, 또 한 사람은 문단 선후배 사이 작가 이문구였다.

   천경자는 당신 며느리에게 “(박경리) 첫 인상이 하얀 박꽃처럼 청결하고 아름답다했단다(유인숙,미완의 환상여행, 2019, 39). 화가는 문학작품에 종종 삽화도 그렸다. 국어학자이기도 했던 이희승의 시집박꽃(1947)도 그 하나였다. 박꽃은 특이하게도 밤중에 피는 꽃이다. 새벽에 시들어버리니 시골의 돌담을 끼고 살지 않으면 여간 사람 눈엘 뜨이질 않는다. 거기에 실린 박꽃 묘사의 시를 읽으며 박경리를 연상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박한 미인/ 초가지붕 마루에/ 흰옷 입은 아가씨/ 부드럽고 수줍어/ 황혼 속에 웃나니/ 달빛 아래 흐느끼는/ 배꽃보다도/ 가시 속에 해죽이는/ 장미보다도/ 산골짝에 숨어 피는/ 백합보다도/ 부드럽고 수줍어/ 소리 없이 웃나니/ 초가집의 황혼을/ 자늑자늑 씹으며/ 하나둘씩 반짝이는/ 별만 보고 웃나니

   그런 점에서 우리 현대문단의 동향에 파수꾼 같은 눈길을 주었던 소설가(이문구의 문인기행: 글밭을 일구는 사람들, 열린세상, 1994)의 박경리 이야기는 대명천지에서 마주쳤던 경우를 그린 것이어서 필선(筆線)이 아주 분명했다. 참대 잎사귀에 비유했던 것(이문구, “저 멀리 우뚝한 이정표,” 박완서 외, 수정의 메아리, 1985).

선생의 첫인상은 어떠했던가. “짐짓 물질에 빗대어서 말한다면 이파리의 선이 분명하고 잎몸에 윤기가 가득하면서 차고 시원한 참대 잎사귀 같았다... 대는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니면서 결이 곧고 품성이 굳은 것으로 천성을 드러내지만... 그런데 선생은 사진에 보이던 음영은 고사하고 오히려 불기불군의 기품이 만면하였으니, 그로 미루어보건대 댓잎사귀의 서늘함은 천성이라기보다 세월이 시켜서 체질화한 환경 극복 의지의 표면적인 처리였는지도 몰랐다(주석: 불기불군의 不羈재능이나 학식이 남달리 뛰어나 일반 상식으로 다루지 못함이고, ‘不群다른 사람들과는 비할 바 없이 매우 뛰어남이란 뜻이다).

    비유법이라 아니라 직설어법으로 당신 스스로 적었던 기색의 묘사는 어떠했던가.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던 당신 시어(詩語)도 있었지만 직설 표현은 역시 남의 입을 통해서였다.

해방 직후였다. 인천 남동공단은 그때 염전이었다. 거기서 광복의 기쁨을 맞았다. 조선인 마을에 국민학교가 있는데 거기에 모두 모이라는 거예요. 그때 내가 입고 나간 옷이 생각나요. 모두들 몸뻬 입을 때였는데 분홍색 치마에 하얀 모시 적삼 입고 갔어요. 동네 유지들이 동네 생기고 이리 예쁜 새댁이 오기는 처음이라고 했어요. 그때 더웠어요. 모두 만세 부르고(황호택, “국민문학 토지작가 박경리”, 신동아, 20051).

    아니면 당신의 소설어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자전소설이었던시장과 전장에 적었던 말. 감옥에 갇혔던 남편 때문에 1.4후퇴 때도 결국 피난을 못간 일가는 흑석동의 급조 시장에 나가서 옷가지를 팔아 겨우 목구멍에 풀칠하던 그 시절 이야기였다.

지영(작가의 분신)은 매일 옷을 싸가지고 시장으로 나간다. “예쁜 색씨는 다 범이 물어간다 했더니, 어쩌믄 그렇게 고와요”(시장과 전장, 2002, 512).

안 빗고, 안 지진 머리

    신문의 연재소설로 호구할 수 있을 정도로 전업작가의 입지를 굳힌 박경리는 그만큼 알 만한 사람에겐 눈에 뜨이기 시작했다. 1950년대 후반, 유학을 마친 뒤 독일 문학 번역 등으로 시중 화제를 몰고 다니다가 서른한 살에 짧은 생을 스스로 마감한 여류작가전혜린(田惠麟, 1934-65)이 살아서 박경리와 마주쳤던 날(1964228), 일기에 적었다. “멋있는 사람은 박경리 씨. 안 빗고, 안 지진 머리. 신경만이 살아 있는 듯 한 피부. 굵은 회색 스웨터 바람. 검은 타이트 치마. 여학생 같이 소탈했다.”

    전혜린이 본 30대 후반의 박경리 모습에 이어 한 평론가는 40대 초반의 박경리 모습을 적었다. 작가와 개인적인 왕래가 많았던 평론가였다.

박 선생은 자주 환하게 웃으셨다. 정말로 흡족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 웃음이 보기 좋았다. 영주 씨 말대로 박 선생은 웃는 얼굴이 아름답다. “어린이처럼 천진해 보이기때문이다(강인숙, “박경리와 가족,” 여류문학유럽문학산고, 2020. 85).

(40대 초반) 가까이에서 보니 피부가 너무 맑고 투명했다. 화장도 별로 하지 않았는데, 요즘 인위적으로 주근깨를 막 없애버린 피부처럼 어찌나 투명하고 결이 고운지 한참을 홀린 듯이 쳐다보았다... 그 피부에서 선생의 맑은 인품이 보이는 것 같아서 호감이 갔다. 선생의 초기 소설에 나오는, 이를 갈며 살고 있는 듯한 여인들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른, 밝고 유연한 분위기였다. 그 아름다움 앞에서 나는 두 손을 들었다. 내게는 미인숭배 경향이 있다(앞의 글, 90-1).

    작가를 따르던 후배 작가 오정희( “봄날은 연두에 물들어,”현대문학, 20086, 315)도 한마디 인상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높은 이마, 맑고 강한 눈빛에서 위엄있는 용모.”

    그 기색에 다시 그 기품은? 한 기자가 숱한 등장인물 중 작가자신은 누구와 닮았을까?” 물었다. 여성 주인공 대신 박경리는 최치수(토지속 최참판집 당주, 서희의 아버지)라고 대답했다. “자기존엄성에 상처를 받으면 광적으로 못 견디며 결코 잊지 않는 점에서 비슷하다했다(동아일보, 1994.8.25). 그런 자존심, 그런 기상이 토지라는 대작을 지어낸 원동력으로 작동했던가.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No.

Title

Name

Date

Hit

3232

글을 마침에(박경리 이야기 낙수 4)

김형국

2022.05.19

1961

3231

네 재산을 쓰라 - 무재 칠시(無財七施)의 회상 -2

여상환

2022.05.18

462

3230

51년 만에 다시 보는 추억의 사진

이성순

2022.05.17

1096

3229

이 생각 저 생각 (108) 천리구 5

최명

2022.05.16

1639

3228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493)

정우철

2022.05.15

591

3227

지하시인의 타계(박경리 이야기 낙수 3)

김형국

2022.05.12

2110

3226

네 재산을 쓰라 - 무재 칠시(無財七施)의 회상 -1

여상환

2022.05.11

545

3225

‘천사 섬’에 사는 ‘천사 청년’

이성순

2022.05.10

942

3224

이 생각 저 생각 (107) 천리구 4

최명

2022.05.09

1640

3223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492)

정우철

2022.05.08

610

3222

박경리⦁김영주 모녀의 유방암 투병(박경리 이야기 낙수 2)

김형국

2022.05.05

2037

3221

어떻게 살아야하나, New start의 재해석-3

여상환

2022.05.04

588

[이전] [6][7]8[9][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