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만의 귀향(박경리 102)

 

    6.25 때 피난 왔던 고향 통영을 박경리가 다시 찾았던 것은 그로부터 무려 반세기 50년도 더 지난 시점이었다. 말 그대로 오래 미뤄진귀향이었다.

    직후 2004년 말, 매지리 당신 사저에서 아주 오랜만의 고향 방문 소감을 내가 물었다. 강구안 쪽 동문시장이었든가 새터 쪽 서문시장이었든가에 들어섰는데 시장통 아주머니들이 나를 알아보더라!” 그 한마디 사이로 환한 미소가 얼굴에 가득했다. 이어 동아일보 인터뷰 팀에게도 자랑했다(”황호택, “국민문학토지작가 박경리,”신동아, 20051).

통영에서 어시장에 들렀는데 장사하는 분들이 전부 악수를 청하는 거예요. 내가 너무 신기해 작가인 나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책을 읽었다는 거예요. 백화점이나 휴게소 같은 데 가서도 인사를 받아요. 음식점 구석에 들어가 밥을 먹고 있으면 뭐 한 가지가 더 나와요.

    그날 현지는 토속적인 표현으로 통영이 들썩했다!” 2004115, 작가가 고향 통영을 떠난 지 반세기가 넘는 51년 만의 귀향이었다.토지의 주무대 하동 평사리를 처음 찾았던 때(2002)와 마찬가지로 만년필과 호미 하나씩 두 자루 상징이라 싶었던 11월이었다. 귀향 인사는 피난민 이중섭의 신화가 서렸던 남망산(南望山)공원 안 시민문화회관 강연 자리였다. 거리 곳곳에는 작가를 환영하는 현수막들이 내걸렸고 8백석 문화회관 대극장은 그야말로 송곳 세울'(立錐)” 틈도 없이 꽉 들어찼다. 무명의 박금이로 떠났던 고향을 대작가 박경리가 다시 찾았으니 금의환향이 그 아니었던가.

고향생각 일제 합창

    그 시민공간에 누구보다 통영 문화예술인들이 대거 자리를 차지했던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마치 어제 일처럼, 아직 그 감격의 뜨거움이 식지 않은 듯 그 전말을 재생해내고 있었다. 여류 시인 김부기(金富琪, 1962- )도 바로 그 한 사람이었다.

    작가의 입장 순간, 참관 시민들의 박수 소리가 터지는 사이로 통영 예인 김홍종(金洪鍾, 1949- )의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민들도 따라 불렀다.고향생각노래였다. 본디 스페인 민요였는데 미국으로 건너가서Flee as a bird to your mountain(새처럼 저 산으로 날아가시오)영어 제목 성가곡으로 불렸다. 이후 이탈리아 태생의 트럼펫 명연주가 로소(Nini Rosso, 1926-94)Flee as a bird(새처럼 날아)제목의 독주곡으로 옮겨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우리는 홍난파 작사의고향생각으로 중고등 음악책에 실었던 그 가곡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고향 한번 떠나온 후에/ 날이 가고 달이 가고 내 맘속에 사무쳐/ 자나 깨나 너의 생각 잊을 수가 없구나/ 나 언제나 사랑하는 내 고향에 다시 갈까/ 아 내 고향 그리워라// 가을밤에 날아오는 저 기러기 떼들아/ 내 고향에 계신 부모님 다 편안하시더냐./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내 고향 생각뿐이라/ 나 언제나 사랑하는 내 고향에 다시 갈까

    이날 강연에서 작가는 통영을 떠나 산 지난 세월이 '생존투쟁'의 나날이었고 26년간은 소설토지를 쓰느라 또 10년간은 원주의토지문화관을 꾸리느라 힘들어서 고향뿐만 아니라 다른 어디도 못 가봤다. '기질 탓'에 고향을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이런저런 전말은 행사에 갔던 한 평론가가 잘 압축해놓았다.

반세기만의 귀향은 눈부시고 감격적이었다. 통영 시내 곳곳에 그를 환영하는 플래카드가 휘날렸다... 무엇보다도 압권이었던 플래카드는 박경리, 박경리, 박경리, 박경리...”라는 문구가 적힌 것이었다. 감격적인 텍스트였다. 누가 쓴 텍스트냐고 했더니, “진의장 시장님이 쓰신 것이라는 시청직원의 답이었다. (중략) 그날 통영시민회관의 대강당에는 시민들로 꽉 들어찼다. 박경리 선생이 무대 위로 올라오실 때 통영예총 음악협회 회원이신 김홍종 선생의 트럼펫 연주와 함께추억(고향생각)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합창으로 울려 퍼졌다. 대강당에 모인 모든 사람들과 박경리 선생이 함께 이 노래를 불렀다. 우리들은 선생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가슴 뻐건하게 울었다(김정자, “박경리의 생애, 그리고 통영,” 박경리 선생 3주기 추모 문학세미나 발제문, 2011.5.4.)

     박경리는 그 자리에서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던 초등학교 동기 그리고 선후배 등 모두 8명의 옛 안면들을 따로 만났다. 짧은 만남이었다.

통영초등학교 동창들을 거의 60년 만에 만났죠. 6·25전쟁 때 통영으로 피란 갔었죠. 매번 뭔가를 살짝 놓고 가던 신연이라는 동창이 나왔어요. 그런데 도저히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어요. 우린 서로 말을 많이 안했지만, 서로 눈빛보고 빙그레 웃는 그 모습에서 모든 걸 다 알고 느꼈지요." 작가는 통영 말투로 원주로 놀러 온나!”는 말을 남겼다(”황호택, “앞의 글”).

영구 귀향 종용

    큰 배의 출입은 때가 무르익어야 한다. “몇 해 전에도 통영시에서 준비한다는 소리를 듣고 안 가버렸어요.”

    사람 삶엔 가 있다 했다. 조선 유교가 그렇게 받들던 주자가 관서유감(觀書有感)’ 시 한 수로 진작 정감 나게 비유해놓았다.

지난 밤 강가에 봄물이 불어(昨夜江邊春水生)

큰 배 한 척 터럭처럼 가볍게 떠올랐네(蒙衝巨艦一毛輕)

전에 힘들여 옮기려고 애썼는데(向來枉費推移力)

오늘은 강 가운데서 스스로 떠다니네(此日中流自在行)

    큰 배의 항구 출입은 도선사(導船士)의 좋은 유도가 있어야 한다, 귀향선 박경리호엔 진의장(陳義丈, 1945- )의 길 놓기가 있었다. “진의장 시장을 안 지가 30년 됩니다. 하동세무서장으로 있을 때 처음 만났어요. 사람이 관료 같지 않았어요. 소설가 김승옥(金承鈺, 1941- )씨와 함께 1년에 한 번쯤 원주에 찾아왔어요. 그림도 그리고 시도 쓰는데 관료 중에 그런 사람이 드물죠. 고향 사랑이 대단한 분이죠. 통영시가 지금까지 개발 위주로 행정을 폈기 때문에 진 시장은 복원하겠다고 하더군요”(황호택, “앞의 글”).

처음 뵈었을 때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담배를 연신 태우면서 장장 3시간 동안 말씀을 하시는데 참 아름다우셨다. 63세의 나이였는데 50대 초반 정도로 보이셨다. 진주고녀 출신 큰 누나를 거명했더니 한해 선배 언니로 기숙사에서 같이 지냈다며 그렇게 반길 수 없었다(진의장,바다의 땅, 멈추지 않는 나의 꿈, 채움, 2014).

     20037, 보선(補選)을 통해 통영시장으로 당선되었다. 당장 공작한 것이 오래 미뤄진 작가의 귀향이었다. 드디어 200411월 성사였다.

어릴 때 아버지를 그렇게 미워하셨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외도를 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지금은 아버지를 이해한다고 하셨으며, 그리고 당신의 성격이나 기질은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셨다. 통영도 마찬가지다. 말씀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한데 무슨 계기가 되면 더 먼저 달려오실 분이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어떤 오해로 서로 미워하다가 오해가 풀렸을 때 더 진한 사랑으로 만나듯이 선생께서 통영으로 달려오실 것이다. 50년 만에 원주에서 통영으로 와 주신 것이다. 오시던 그날 아침 선생님의 모습은 마치 소풍 가는 어린 학생들의 그것과 같았다. 전날 밤은 거의 뜬 눈으로 새셨다고 하셨다. 계속 흥분되어 말씀하시던 모습은 재잘대는 어린애 같았다. 저런 분이 거대한토지를 쓴 작가인가. 아니면 내면의 저런 천진성 때문에 그런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인가. ”세병관은 옛날보다 더 위대한 것 같다. 그리고 산양면의 아름다움은 나를 위로해 준다했다(진의장, 앞의 책, 147-151).

     그림그리기가 타고난 천업(天業)이란 말을 입에 달고 지냈던 이답게 현직 시장 시절에도 진의장은 산양면 양지농장 안에 꾸며진 팬션에 화실 하나를 갖고 있었다. 이 인연의 연장으로 박경리가 고향 통영에 돌아왔을 때도 호텔이 아닌 그 팬션 숙소에서 묵었다. 저 멀리 산자락 아래로 이순신의 초기 승첩이던 당포해전(15926월초)의 당포(唐浦)바다(통영시 산양면 삼덕리)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경관이다.

    기실, 박경리의 고향사랑이 지극함은 진의장은 진작 통감했다. 1988, 그때 하동세무서장이던 그를 만나러 하동까지 내려왔던 것. 사연인즉 한양여자전문대학(오늘의 한양여자대학교) 교수이던 여운(呂雲, 1947-2013) 화가가 술친구 진의장의 화실을 찾아와 통영 바다 그림을 한 장 청했다. 대학 소식지에 박경리의 기고를 청했던 자리에서 통영 바다 아름다움에 대한 작가의 자랑 말을 듣곤 그걸 대리만족할만한 그림을 답례품으로 구하는 길이라 했다. 작가를 처음 만났던 자리에서 바다가 그렇게 그리우면 가까이 동해 바다를 보셔도 좋지 않겠느냐?” 말했다가 동해바다가 어찌 통영바다 같겠느냐?!”는 일갈에 혼이 났다는 말도 곁들였다(진의장, 앞의 책. 142-69; “서울 개인전 연 진의장 전 통영시장,”한겨레, 2021.7.21). 전남 장성 출신이던 그를 통해 그렇게 전해진 통영바다 그림을 보고 즐기던 박경리는 그 화가 당사자를 만나보고 싶어 했다.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도 공무의 다망함 때문이었던가 원주로 발걸음할 기색이 없음을 알고는 당신이 직접 하동으로 발걸음을 했던 것.

    작가에게 진의장 시장은 통영으로 영구 귀향을 종용했다. 고향땅 공익을 대변하는 시장 자리에서 권한과 책임을 갖고 전했던 지방민심의 일환이었다. “노루 사슴이 놀다가는 곳입니다. 여기 집을 지을 지어 드릴 테니 이제부턴 통영에서 편히 쉬십시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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