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잔치, 명절을 모르고 살았다(박경리 101)

 

    나는 박경리의 생일잔치에 두 차례 자리했다. 우리 생활문화에서 사람의 일대에서 빠질 수 없는 일흔의 고희 잔치, 여든의 산수(傘壽) 잔치였다.

    생일 축하방식은 세대 별로 다르다는 것이 내 관찰이자 체험이다. 이를테면 생일을 굳이 챙기지 않음도 내가 아는 경상도쪽 풍속이었다. 매일을 생일로 여기며 살아간다는 신념에 따라 특별히 생일상을 받지 않는다는 경우도 만났고, 부모 구존인데 생일상을 차림은 나이 자랑하는 꼴이니 이게 도리가 아니라며 사양한다 했다.

    박경리의 경우, 무엇보다 일신상의 변고가 많았던 탓에 예사 해의 생일상은 차리지 않았거나 못했다는 것이 내 짐작이자 당신의 간접 진술이었다. 당신 스타일이 그냥 격식을 싫어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었다(박경리,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 현대문학, 1995, 293).

홀가분해지고 싶고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기 싫다, 싫다! 철부지 아이같이 뇌까리다가 대상도 없는 투정을 부리다가 지쳐버립니다. 가족들 생일 같은 것 까맣게 잊고 살아요. 심지어 기일(忌日)이 든 달이면 그날을 잊을까봐서 가슴이 두근거리곤 합니다. 실은 남에게보다 내 자신에게 무성의하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것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도대체 이건 무슨 병인가.

    그래도 당신 어머니가 살았을 적엔 딸을 위해 생일날 아침 밥상에 미역국 정도는 올렸지 않았나 싶었다. 생일을 격식으로 챙기지 않는 집안도 약간의 상징적인 음식은 장만하기 마련이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렇게 미역국이라도 끓였다면 그날은 당신 집안 관습대로 음력 생일날이었겠다. 당신 생일은 1926년의 음력 1028, 양력은 122일이었다.

회갑과 칠순잔치

    예년의 생일치레는 건성이었을망정 회갑칠순팔순 같은 중요 고비의 생일은 친구 또는 당신 딸이 챙겼다. 회갑 잔치는 진주고녀 친구 둘이 차렸다고 읽었다. 딸 가족은 그때 전라도 해남에 옮겨 살 때였다.

    1986년의 가을이 아니었나 싶었다. “누구라면 알 만한 집안의 딸이었으나 그렇게 불리기를 싫어하고, 친구한테도 말없이 베푸는 데가 있었다던 친구가 자청해서 온갖 음식과 심지어 밥, 국까지 장만했다. 그 자리에 "서울 모 일간 신문사 문화부 여차장 두 분"을 초대했다고 고녀 동기생 최혜순이 적었다. 천주교 신자 최혜순이 축복 기도를 했다, “앞으로 더욱더 건강하고 더 좋은 작품을 서서 노벨문학상을 타게 해주시고 그녀의 보람이며 기쁨인 두 손자들이 훌륭하게 잘 자라 할머니의 여생을 한 없이 복되게 해주시고기도했다(최혜순, 박경리와 나의 우정, 1994, 74-75).

    장수사회로 진입하고부터 회갑 잔치는 건너뛰고 일흔의 칠순 잔치가 다반사가 된 시점에서 작가의 칠순잔치는 딸이 직접 주관했다. 19951220일 저녁, 이화여대 후문 쪽의 한정식점 석란(石蘭)이었다. 몹시 추운 날씨였다.

    친구 천경자 화백을 필두로 주로 동업 문인들에 언론인이 보태져 스무 명 정도 참석했다. 박완서, 최일남, 김원일, 김원우, 김성동, 이인호, 윤호미, 장명수, 김성우 제씨들이었다. 사회를 맡았던 연세대 정현기 국문학과 교수가 먼저 송축사를 했고, 이어 몇 사람이 인사말을 했다.

    한국일보의 김성우 논설고문은 시시비비 언론인다운 미니 인사말이었다. “이 자리에 선 사람이 무슨 말을 할 줄 선생은 다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말들이 모두 헛된 말인 것도 선생이 알고 있다. 그래서 이만 줄인다했다. 동아일보 문화부 고미석(高美錫)기자 말은 역시 여성다웠다. “나는 원로 파괴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선생을 모시고 있음이 자랑스럽다. 박경리 선생을 사랑하는 모임을 준비해야겠다,” 그리고 선생님 사랑해요로 인사말을 끝냈다.

    김원일(金源一, 1942- )의 말은 어린 시절 배고픔이 뼈저렸던 소설마당깊은집출신다웠다. 실감나는 먹자타령이었던 것. “이렇게 우리를 배불려 먹여 주시듯 10년 뒤 다시 이렇게 배불리 먹여달라!” 했다.

    핀란드대사로 내정되었다고 신문에 보도된 이인호 교수 차례였다. “주위 여성들이 이 교수가 앞장 서야 훗날 여성대사들이 나올 수 있다 해서 마지못해 맡았다는 말을 축하 인사에 섞었다. 이 교수의 큰 딸이 마침 동행했던 내 둘째 여식과 어울려 특히 천경자 화백의 인사말을 재미있게 듣고 있었다. 화백이 작가와 함께 어울려 조계사인가로 갔다가 머리 깍은 젊은 중들이 앉은 모습을 보았다. “동지 팟죽의 새알처럼 생겼다고 말하면서 서로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난다 했다.

    선생은 딸이 오늘 이렇게 옷(검은 바탕에 붉은 수를 놓은 것이 통영 아기 누비포대기처럼 생겼다)을 해 입히고 잔치에 가자해서 솔직히 불편하고 울적했다. 최근 TV에서 보았는데 남한강가에서 불구 아이를 돕고 있는 사람들의 미담을 보았다. 나도 항상 저런 사람을 도와야한다면서 한 번도 그런 일을 못해보았고 그래서 또 후회하는 생활이라고 답사 말을 맺었다.

팔순잔치

    박경리 팔순잔치는 20051129일 낮이었다. “딸한테 열 명 정도 하객이 온다고 들었다던 작가는 백 명 가까이 신라호텔 3층 라일락홀에 모인 것을 보고 놀랐다. 정현기 교수가 선생의 반생 연보를 낭독한 뒤 하객들의 축수 말이 이어졌다.

    먼저 장명수(張明洙, 1942- ) 한국일보 논설위원의 인사말이었다. “기자시절에 선생의 글을 받기 위해 정릉 집으로 찾아갔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박완서 선생에게 간청해서 함께 갔지만 그래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 뒤는 박완서 선생도 더 이상 동행하지 못 하겠다 했다. 글을 제대로 얻지 못했지만 오래 건강하시길 빈다.” 했다.

    김성우 전 한국일보 주필은 박경리교의 총무원장다웠다. “선생의 문학세계를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다는 염결(廉潔)의 인사말이었다.

    진의장 통영시장은 작가를 반세기만에 고향으로 모셨음을 자랑했다. “선생이 충무공에 대한 흠모의 정이 깊은 줄 알고 바로 얼마 전 서울시장에게서 얻은 재현품 거북선이 서울 한강가에서 통영에 도착할 즈음 고향으로 모셨다. 통영 오기를 주저하다가 역시 선생의 충무공에 대한 흠모의 정 때문에 다시 모실 수 있었다.”

    외손주 둘도 한마디씩 했다. 큰 손주는 할머니는 문학이 곧 삶인 것을 나는 알고 있다했다. 둘째 손주는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비롯해서 알음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선생을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말해왔다. 나는 한 번도 그런 말을 지금까지 못했다. 이 자리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울먹였다.

    나는 공연히 말하고 보니 현학이 되고 말았다. “말하고 나면 항상 후회가 되는그런 발언이었다.

나는 선생의 칠순 생일잔치에 참석했는데 그때에 견주어 오늘은 큰 성황이다, 우리 사회가 반문화적이라 모두 말하지만 오늘의 행사를 보니 그렇지 않음을 알겠다. 선생은 모순 둘의 개인적 체화(體化). 한쪽은 촌부의 모습이고 하나는 최상의 정신적 예리함이다. 앞의 보기로는 손자들의 대학입시가 차질을 빚자 대학입시 이야기가 나오는 TV를 꺼버렸다. 평소의 말처럼 생명 속에 죽음이 있다는 반대 명제 일치의 연장으로 선생도 늙음 속에 건강이 함께 하길 빈다.

    이수성 전 서울대 총장이 말을 이었다. “노벨상을 받을만해서 존경하지만 그걸 받지 않아도 존경심에 추호의 차질이 없다. 자신의 처신을 생각할 때마다 선생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생각한다.󰡓이어 “(선생이) 노벨상을 아직 받지 못한 것을 보니 노벨상이 시시한 상인 줄을 알겠다.“고 정창영 연세대총장이 말을 받았다.

    사위(김지하 시인)가 한 마디 없을 수 없었다. “사위로서 구실을 못했고 한 번도 마음을 편하게 하지 못했다. 오늘 아들 둘이 할머니 옆에 앉아있게 한 것이 내가 해드린 (장모)대접의 전부라면 전부다.” 작가 답사는 두 가지 염치가 없어 죄송하다 했다.

하나는 8순까지 살아있는 것이 염치가 없고, 많은 작가들이 큰 업적에도 불구하고 살아서 대접을 받지 못했는데 나는 살아서 과분한 대접을 누리고 있음이 염치가 없다. 생일 같은 것을 모르고 한 평생을 살았다. 아무튼 고맙다(밑줄은 필자의 것).

    행사 끝머리에 청계천 복원의 필요성을 먼저 주창해 주었다며 서울시장 이름의 감사패 전달이 있었다. 청계천 복원에 온 시민이 감격했던 대역사(大役事)의 성공에 대한 인사치고는 한마디로 소홀한 대접이란 인상을 지을 수 없었다.

    서울시장도 아니고, 호텔이 자리한 서울 중구의 구청장도 아닌 실무자가 삐죽 전하던 그런 형국이었다. 그럴 바에야 패를 우송했더라면 좋았겠다 싶었다. 티가 없으면 옥이 아니라 했다. 팔순잔치는 군자의 보석이라는 백옥(白玉) 같은 모임이었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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