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토지문화관 개관(박경리 100)

 

    드디어 지상 4(연면적 806) 문화관이 완공되었다.199969, 개관식 행사가 토지문화관 강당에서 열렸다.

    거기에 김대중 대통령이 참석했다. 우리 현대사에서 생존 예술가의 성취를 기념하는 자리에 대통령이 임석한 경우는 전례 없던 행보였다. 으레 대통령 참석의 외부 준공행사라면 어렵사리 완공한 고속도로 개통식이거나 거창한 중화학공장의 준공식인 것으로 알았음이 저간의 국민 인식이었다.

    견주어 연공(年功)이 깊은 한 소설가가 필마단기의 지극정성으로 문학을, 그리하여 문화예술을 현창하려고 마련한, 겨우 시골 초등학교 교사(校舍) 수준의 건물 개관에 대통령이 발걸음 했음은 이전 관행에 대한 아름다운 배반이었다. 해서 박경리는 우리 역사상 나라 최고 권력자로부터 두 차례나 찬사를 직접 들었다는 기록도 갖게 되었다. 앞서, 대하소설토지가 만 25년 만에 완간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직후 김영삼 대통령의 축하 조찬자리에 초대받았었다.

문화관 준공식

    당연히 김 대통령의 축사가 있었다. 그게 그런데 연설 비서관이 적은 의례적인 말씀이 아니었다. 남다른 독서력을 바탕으로 마음에서 우러난 거의 즉흥즉발적 내용이었다. 우리 현대사가 기억하는 대표적인 정치범으로 몰려 오래 감옥 생활을 해야 했던 시간에 당신이 독서에 몰두했다던 사실은 옥중서신을 통해, 나중에 따로 책으로 묶이기 이전에도, 이미 잘 알려졌던 것. 내가 현장에서 들은 대통령 축사는 마치 독후감 발표 같다는 인상이었다(각주 참조).

    『토지의 대표적 애련의 주인공 월선(月仙)이가 죽어가던 장면이 가장 가슴 아팠단다. 이 말은 그 행사에 참석한 이들 가운데 열성 애독자들은 십이분 공감하고도 남았다. 월선과 용이 사이의 첫사랑이, “... 그대 오직 그대만이/ 내 첫사랑 내 끝사랑/ 지금부터 달라질 수 없는 한가지/ 그대만이 영원한 내 사랑...“ 이라 노래했던 한 유행가(2011)의 제목대로, ‘끝사랑으로까지 치닫던 사연에 대한 말이었다. 슬프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웠다는 말이었는데, 작가도 이 대목을 감회롭게 듣고 있었다.

    이야기 순서가 뒤쳐졌지만 건축위원장으로 내가 표 나게 기여할 수 있었던 바는 토지문화관제자(題字) 글씨를 구하는 일이었다.열하일기역주(譯註) 등 우리 한문학 연구에서 큰 학덕을 쌓았던 연민 이가원(淵民 李家源, 1917-2000) 전 연세대 교수의 글씨였다. 경향에 내노라 하는 서가들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런 전업(專業)서가들보다 자락(自樂)하는 아마추어 붓글씨가 나름으로 격이 높다는 중평이었다. 연장으로 나는 퇴계 이황(李滉)14세손인 연민의 글을 가까이 보기를 좋아했다. 내가 대학교수라는 점도 좋게 작용했던 덕분에 서실도 직접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한두 번 왕래했음을 자랑했더니만 경주 괘릉(掛陵) 동네에 사는 만석꾼 집안 후예가 연민의 글을 구해달라고 청해왔다. 후예는 윗대가 경주고등학교를 세웠던 집안의 종손으로 단구동 작가 집 보존에 결정적 다리를 놓아주었던 김수학 전 한국토지공사 사장의 지기 이상렬(李相烈, 1924-2004) 이사장이었다. 선대의 비석을 개비하려는 집안 대사를 위해 좋은 글자가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기꺼이 그 중간다리가 되겠다 했다. 그 일로 성균관대학 후문 쪽인 서울 명륜동의 연민 댁을 두 서 차례 찾았다. 집안의 조상을 받드는 일엔 아마추어 서가에게도 약간의 윤필료(潤筆料)가 따르던 것이 우리 전래 예법이었고, 그 김에 토지문화관 제자도 간청했다. 박경리 또한 한문학 대가의 학문과 서예를 평가한다는 말은 내가 진작 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민 또한 작가를 존경한다며 기꺼이 글을 적어 주었다(사진 참조). 글씨는 사용한 뒤 서가의 청으로 원본은 돌려주었다. 연민의 서화, 서책 등 소장품이 일괄 단국대학교 연민기념관에 기증되었을 때 그 원본은 거기에 포함되었을 것이었다.

    드디어 문화관 앞에 넓적한 오석에 土地文化館(토지문화관)’ 문패글자가 새겨졌다. 그렇게 구비된 문화관은 공사 중에 부실공사 시비가 언제 있었던 양 버젓하게만 보였다. 작가에게 아주 단순하게 보이는 건물의 외양이 주위 산세와 잘 어울린다고 치사했더니만, 그 윗동네 회촌마을로 오가는 촌로들은 건물이 큰 절로 보였던지 가는 걸음을 멈추곤 두 손을 다소곳이 모은 채 손절을 올리곤 한다는 웃음의 대답이었다.

또 다른 걱정의 시작

    끝은 또 다른 시작임은 토지문화관도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문화관 운영경비 조달이 당면 현안이자 두고두고 풀어야할 구조적 과제로 부상했다. 연세대 부속기관으로 흡수된 채 운영만 열심히 해보겠다는 당초의 계획이 무산되었기 때문이었다.

    기실, 운영비문제는 문화관 건설의 가능성 가닥이 잡히고부터 작가의 머리를 짓누르던 숙제였다. 1995년에 프랑스로 출국하기 앞서 정주영 회장을 예방했던 자리에서도 주변머리 없었던" 탓에 문화관 운영에 도움을 달라는 말을 끄내지 못 했던 작가였다(“정회장의 낡은 구두 한 켤레”,생명의 아픔, 2004, 225-30).

    주변머리 없는 성품뿐만 아니라 당신 나름의 결벽증이 재단(裁斷)한 출판사의 전비(前非)’도 기억났기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오랜 문단생활에서 출판기념회는 겨우 한번 가진 적 밖에 없었을 정도로 스스로 내세움을 몰랐던 작가에게 무엇보다 199410월에 토지완간기념행사를 갖겠다는 솔출판사의 제안은 당최 마뜩찮았다. 과연 그 진행도 도무지 작가의 스타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출판사로서는 사업인 만큼 선전효과도 필요한 것인즉, 사양을 하다가 꺾이고 말았다. 관례적으로 출판사에서 행사를 치르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현대그룹의 정몽준 의원의 주선으로 비용이 그곳에서 나왔고 그것도 막대한 금액이었으니 나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을 꾸민 출판사에 대하여 기분이 언잖아지곤 했다(박경리, “소년과 노년”,아산 정주영과 나, 아산사회복지재단, 1997. 161-64쪽 압축).

    문화관 운영이야 창업자, 그 후계자 그리고 재단이 맡아나갈 일이었을 터에 그건 그렇고 나는 다만 건물은 뒤탈이 없었을까가 문득문득 염려되곤 했다. 전통시대 때 살만한 집안에서 새집을 짓고 나면 1년 정도는 머슴으로 하여금 살게 했다지 않던가. 반드시 누수 등 뒤탈이 생기기 마련이라 시간을 두고 문제를 확인하고 대처해나가려던 옛사람의 지혜도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건물이 완공된 지 10년 정도 흘렀다. 그 사이 작가도 타계했으니 새삼 건물이 온전한가가 궁금했다. 당신 타계 전해이던 2007년 가을에 작가를 인터뷰하려던 동아일보 논설실장과 동행해서 토지문화관을 찾았던 적이 있었다. 주요 공간인 대강당 로비의 카펫에 물기 흔적이 보였다. 우기가 되면 누수가 꽤 심하다는 말이었다. 건물이 경사 가파른 산기슭에 자리한 탓에 물이 난다 했다. 이듬해 작가도 세상을 떠났으니 어쩌면 좋을 것이었던가.

    마침 대학에서 정년퇴직한 그 이듬해 2008년 봄부터 나는 중앙정부기관인 국가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 조직은 다시 국가발전을 환경보전과 경제성장 둘의 조화로 도모해야 한다며 녹색성장위원회로 개편되었고, 유관 국공립기관과 긴밀히 업무협조하게 짜여졌다. 거기에 마침 한국토지공사도 들어있었다.

    새 사장은 공사가 토지문화관을 지어준 사실을 잘 몰랐다. 아주 자랑스러운 일을 했다고 치하한 뒤, 10년 정도 세월이 흘렀으니 보수공사, 특히 방수공사가 필요하다고 설명설득했다. 사장은 내 제안을 즉각 받아 들였다. 20105월에 상당한 경비를 들여 산기슭 물길을 잡는 일 등 대대적인 방수공사가 펼쳐졌다.

    한국토지공사의 협조는 조직이 주택공사와 통합된 LH공사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본관이 세워진지 20년 정도 헤아리자, 입주 작가들의 불평이 생겨날 정도로, 겨울철은 방풍, 여름철은 냉방의 미비 등에 대한 보수보완이 필요해졌다. 2020년 봄, 마침 LH 사장은 내가 봉직했던 대학원의 졸업생이었다. 한 교실에서 오래 오갔던 인연을 근거로 보수공사의 참여는 쉬이 끌어낼 수 있었다. 사장은 재학 중에 내가 박경리 문하로 출입한다는 기미는 듣고 알고 있었다면서 적극 도와주었다. 보수공사는 6월에 시작해서 10월에 끝났다.

각주:

   김 대통령의 독서력은 김지하(회고록: 흰그늘의 길, 2, 학고재, 2004, 313-4)도 진작 평가했다. 1970년대 초 정치자금을 좀 얻을까 싶어 찾았던 김대중과 길게 대화한 적이 있었다던 그때 받았던 인상이었다. “그이가 독서가라는 점이었다. 비록 이류, 삼류 사상가의 책들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그이의 기억력이다. 총총했다. 인용이 정확했던 것이다. 문장 구사력도 괜찮았다.”

 

사진이가원 글씨의 土地文化館(토지문화관오석 문패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제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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