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관 출범에 먹구름이(박경리 98)

 

    작가 지망생에게 집필공간의 필요성은 무엇보다 집필 장소의 확보가 먼저다. 신춘문예에 동화부문에서 뽑힌 신참은 이전처럼 집필에 매진하겠다는 뜻으로 오늘도 엉덩이로 버틴다.”했다(조선일보, 2021,4,5). 집필엔 우선 엉덩이를 붙일 장소가 필수라는 말이었다. 공간은 생활 움직임의 범역(範域)임에 견주어, 엉덩이를 올려놓을 장소는 고정이다. 그래서 누가 뭐래도 소설은 곧 노동의 산물인 까닭에, 엉덩이가 가벼우면 볼장 다본다.”고 원로 작가 최일남도 일갈했다.

집필 공간 필요의 절감

    박경리에게 문화관의 건립은 무엇보다 문학수업시절에 간절했고, 전업 작가로 투신한 뒤 더욱 간절했던 집필 장소를 사회적으로 마련해주려 함이었다. 선진국에선 진작부터 그런 장치가 운용되어 왔다는 사실도 주목했다.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 은일(隱逸, retreat)’창조(creation)를 돕는 장치로 장소적인 작가의 집에 더해 서로 오가며 어울리는 토론의 장’, ‘만남의 곳같은 공간적 시설을 운용한다했다.

    이런 외부적 선례에 더해 작가의 개인적 체험도 보태져 그런 시설 또는 장치가 무척 절실하다고 판단했던 것. 돈암동 전셋집에서 살고 있던 작가를 찾았던 지인은 박경리가 궂은 날씨에 빗물이 천정에서 떨어지는데도 한쪽 구석에 앉은뱅이 책상인가 소반을 앞두곤 그 위에서 글을 적던 중이었다고 회고했다. 치열하기 그지없던 그의 집필 의욕수를 엿보았다는 말일 수도 있었고, 형편에 닿지 않게 삶을 모사(謀事)하는 과욕수란 말일 수도 있었다.

    기실, 예술로 입신하려는 경우는 항상 과욕이라고 주위에 비치기 일쑤임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았다. 그런 일로 어떻게 먹고 살겠느냐, 걱정이 앞선다는 말이었다. 이처럼 예술쪽 입신(立身) 희망자들 대부분이 최저 생활의 필요 소득을 올리지 못하는 소득차질(income gap)’의 애로에 봉착한다. 때문에 이를테면 미국 뉴욕의 뮤지컬 배우 등 공연예술가의 경우 결혼적령기임에도 불구하고 열악 생활경제 탓에 독신자 또는 동성애자가 많다 했다(William Baumol and William Bowen, Performing Arts--The Economic Dilemma, MIT Press. 1966). 같은 맥락에서 글 농사 희망자는 최소한의 작업환경을 갖추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했다.

    예술가의 열악한 생존환경은 예술문화의 발생과 원만한 성장이 정상적인 시장체계 안에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성공한 예술문화는 사회적 효과가 지대함은 물론이고 해당지방의 민관(民官)조직에 미치는 경제 및 고용효과 등의 이른바 파문효과(ripple effect)’도 상당하다. 때문에 사회적 의미가 그렇게 지대한 만큼 그 생산 필요비용은 국가나 사회가 얼마큼 책임져야 한다는 논지가 정당해졌다

    박경리가 돈암동 전셋집을 떠나 어렵사리 정릉에 국민주택을 마련한 뒤로도 당신의 집필공간은 최소 필요(threshold)’ 쾌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신 집중을 계속할 수 있는 공간적 여건이 도무지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가족관계의 부대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는 말이었다. 바로 이 대목 관련으로 개인적 왕래가 잦았던 한 여류 문학평론가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작가의 그 시절 생활시간대를 연민의 눈으로 엿보았다(강인숙, ”박경리와 가족,“ 2020, 70-71).

딸이 전업 작가가 되자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어머니는 글을 쓰기 위해 딸이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딸이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을 어머니는 자기를 밀어내는 행위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밀어낼수록 불안해서 더 어머니에게 엉겨 붙는 아이처럼, 씨의 어머니는 더 자주 딸의 방에 쳐들어와서 글 쓰는 흐름을 흩트려 놓았다. 그 일은 종일 원고를 써야 생활이 유지되는 딸을 미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생각다 못해 딸은 어머니 방과 자기 방 사이를 벽으로 막아서 어머니가 밖을 빙 돌아와 자기 방에 올 수 있게 만들어보기도 하고, 뒷마당에 딴채를 지어 어머니를 따로 살게 하기도 한다. 그래도 소용이 없다.

     박경리의 문화관 건립 구상도 바로 이 개인 체험이 안겨준 교훈이었다. 국내에선 전무해도 선진 외국에서는 전례가 적지 않음을 연세대 원주캠퍼스 교수들을 통해 확인했다. 독일 베를린엔 반제하우스(Wannsee Haus), 프랑스엔 국립도서센터(Centre national du livre) 주관의 작가의 집(La maison des écrivains) 또는 민간단체인 아세트재단(Fondation Hachette), 미국엔 아이오아대학 주관의 국제집필사업(International Writing Program)이 유사 선행 보기라 했다.

    예술업종 작가의 작업 공간 제공방식은 우리는 미술 쪽에서 진작 생겼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그러한데, 레지던시(residency)라는 말뜻처럼 예술가는 특정 장소에 '거주창작'하면서 재정적인 지원을 받고, 다른 예술가나 미술계 인사와 교류하면서 창작 활동에 간접적인 도움을 받는다. 또 시민들이 해당 예술가의 전시나 워크숍 등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견주어 문학 쪽의 레지던시 제공은 작가로 크게 입신한 박경리 등의 시도가 선구적이었다(각주 참조).

시집 갈 날 등창 난다더니

    ‘호사다마(好事多魔)’ 좋은 일에는 탈이 많다는 사자성어나, “시집가는 날 등창 난다는 우리 속담은 역시 빈말이 아니었다. 건설업체 선정시점에서 외환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1997년 여름 동남아세아 여러 나라에서 외채를 상환하지 못하는 금융위기가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있었고, 국내경제도 특히 대형 건설사인 한보건설이 부도 처리되었다. 결국 한국도 1997년 후반, 시중에서 ‘IMF사태라던, 외환위기가 몰아닥쳤다. 특히 금융권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건설업종이 큰 타격을 크게 받았다 했다.

    토지문화관의 건설공사는 처음부터 박경리 이사장을 비롯해서 이사들은 시공사로 현대건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토지완간 기념식에도 참석했을 정도로 작가에 대한 친애가 남달랐던 정주영 회장의 대표 사업체가 바로 현대건설이었던 점에서 정의(情誼)로도 문화관 건립은 현대에 맡겨야한다는 것이 이사회의 무언의 합의였다. 하지만, 들려온 주변의 염려성 소견은 초대형업체 현대건설이 큰 집 한 채 짓기에 불과한 40억 원 안쪽 공사비의 건축공사에 관심 갖겠느냐는 것이었다.

    정황이 그러한데도 토지문화관 공사는 꼭 현대에 맡겨야 한다는 확신이 더해졌다. 금융 위기의 먹구름이 몰려온 시국에서 대마불사(大馬不死)라고, “대마는 죽지 않는다.”는 바둑판 격언처럼 건설판도 바로 그럴 것이란 직감이었다.

    직접 현대건설 사장을 만나 정 회장과 작가 사이의 선연(善緣)을 상기시켜 참여를 통사정하기로 했다. 건축위원장이라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때 사장은, 나중에 부회장까지 올라 정 회장의 방북사업을 진두지휘했던, 김윤규(金潤圭, 1944- )였다. 바쁘다고 소문난 이를 어떻게 빨리 만날 것인가. 마침 내 옛 벗이 그룹에서 국제무역 담당인 현대상사의 사장이었다. 공군 간부후보생 동기이자 군복무 후반을 같은 부대에서 지냈던 정재관(鄭在琯, 1941- )은 무엇보다 친구들의 곤경을 잘 돕던 이였다.

    급히 약속을 잡아주어 창덕궁 옆 현대그룹 본사를 찾았다. 세상 화제에 오를 때마다 자주 TV에 비쳤던 모습대로 무척 친숙한 얼굴이었다. 몸짓이 대기업의 최일선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반응도 호불호의 감정을 싣지 않고 간단히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내가 그때 받았던 사장실 분위기는 언젠가 엿본 적 있었던 국무총리실보다 더 격식(formality)을 갖추고 있었다. 집무실 옆에 붙은 접견실 체험이 전부였지만, 현대건설은 외빈을 일단 들인 뒤 사장이 접견실에 들어섰고 전속 사진작가가 따라붙었다.

    그 광경을 만나자 내 은사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정주영 회장 등 재벌 일 세대들이 우리 역사의 오랜 적폐인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제도의 심리적 마지노선을 마침내 무너뜨려주었다 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를테면 이화여대 졸업생들은 의사, 판검사 등 ()자리를 장차의 배필로 손꼽는다던데 1970년대에 들어 언제부터인가 삼성, 현대 등 대기업 사원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말이었다. 마음속에서 오래 사라지지 않았던 신분차별의 폐습이 대기업의 승승장구로 단번에 무력화됐다는 풀이였다. 현대건설 사장집무실 풍경이 내게도 공상(工商)이 사()를 부러워할 게 없다는 증거물의 하나로 비쳤다.

 

각주

199669일에 개관한 토지문화관이 문인창작실을 재공하기 시작한 것은 2001년이었다. 인기작가 이문열(李文烈, 1948- )이 벌어들인 인세 등 사재로 경기도 남한산성 인근에 개설한 부악문원(負岳文院)이 창작 집필실을 개방한 것은 1999년이었다. 창작실 인프라는 토지문화관이 17, 부악문원은 4실이다(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9년 문학집필공간 운영지원사업, 2020). 2020년 현재 토지문화관은 한국토지공사가 건립해준 본관에 더해 창작실 전용은 작가가 사비로 2003년에 개관한 매지사’ 6, 역시 사비로 2006년에 개관한 귀래관’ 10실이 있다(2020 토지문화재단 소개 자료).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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