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생각 저 생각 (90) 내가 넘은 38선 (1)

 

    우도(友道)에 관하여 여러 회를 쓰다 보니 다음이 걱정되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하다 내가 넘은 三八線이란 책이 떠올랐다. 오래전에 출판된 책이다. 내가 그것을 읽은 것도 중학교에 다닐 때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 책을 다시 읽고 싶었다. 수중에 있을 리가 없다. 그래 김경미라는 내 제자 정치학박사에게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찾아보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고문헌자료실의 한 방을 前 人文大學 國文學科 白史 全光鏞 敎授 遺贈圖書가 차지하고 있고 거기에 있다고 했다. 백사는 소설가이고 국문학자인 전광용(1919-1988) 명예교수의 호다. 정년 하면서 소장하던 책들을 기증한 것이다. 대출은 되지 않고, 자료실의 옆 방에서 복사는 가능하다고 하여 어렵게 복사했다. 육칠 년 전의 일이다.

    책의 복사와는 관계없는 이야기다. 위에서 전광용 교수가 소설가라고 했다. 그의 대표적인 소설은 1962년에 발표된 꺼삐딴 리가 아닌가 한다. 꺼삐딴은 러시아어의 카피탄이고, 영어의 “captain”과 같다. 시대에 영합적인 한 의사가 주인공이다. 이 소설로 전 교수는 1963년에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전 교수의 정년은 1980년대 중반이다. 나와는 근 10년을 관악캠퍼스에서 같이 지냈을 터인데 개인적인 접촉의 기억은 없다. 나이 차가 컸기 때문일까? 38선을 넘은 사람은 많지만, 나는 전 교수와의 나이 차를 넘지 못했다.

   다시 내가 넘은 三八線으로 돌아간다. 복사는 책이 낡아서인지 복사기가 시원치 않아서인지 잘 안 되었다. 희미한 페이지도 많고, 아주 시커먼 페이지도 있다. 읽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도 귀한 책이라 더듬더듬 읽었다. 무슨 책인데 웬 잔소리가 이리 많으냐고 하는 독자를 위하여 책에 관하여 잠시 언급한다.

    그것은 일본 여인 후지와라 데이(藤原 貞)가 쓴 소설 같은 기록물인 흐르는 별은 살아있다(れゐ きている)를 번역한 것이다. 역자는 정광현(鄭廣鉉)이고, 단기 4284(1951) 4월에 수도문화사에서 출판되었다. 6.25사변이 발발한 다음 해다. 전쟁 중이었다. 역자는 머리글인 소개하는 말을 단기 4282(1949) 11월에 썼다. 또 추천사에 해당하는 권하는 말도 있다. 이것은 단기 四二八二년 입동날 合同通信社編輯局一隅에서 全弘鎭이 썼다. 전홍진은 합동통신사 기자였다. 짐작하건대, 역자인 정광현도 같은 통신사 기자가 아닌가 한다. 번역 후 2년이 지나 출판되었다. 어디서 읽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으나, 나는 정광현 씨가 6.25사변 중에 납북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책을 쓴 이는 북에서 남으로 38선을 넘었고, 번역한 이는 남에서 북으로 38선을 넘었다. 역사의 아이로니다. 책의 내용은 잠시 뒤로 미루고, 번역하여 출판된 경위를 먼저 이야기한다.

    역자인 정광현씨는 4281(1948) 여름에 일본의 ()이란 잡지에서 후지하라 데이 여사가 쓴 흐르는 별은 살아있다의 한 토막을 읽었다. 38도선을 넘는 대목이었다고 한다.

가슴이 뜨끔함을 느꼈다. 악질 군벌(軍閥)의 지독한 여독, 고난 속에서의 한없는 모성애(母性愛), 막다른 골목에 닿은 인간들의 추악과 애증을 여지없이 드러낸 인간군상의 정체를 여실히 볼 때 선뜻 일본인의 작품이란 생각을 잃었다. 이에 나는 얼마 뒤에 이 책의 원본(原本) 흐르는 별은 살아있다라는 책을 입수하였다.

밤을 도와 읽었다. 신문기자인 내가 이런 일을 겪었다면 어떻게 썼을까? 그것은 다만 직업적 의식에서 나온 것이지만 한편 내가 느낀 것을 제3자에게 읽히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 뒤 나의 여러 선배에게 이 책을 보였더니 소개해도 좋다는 동의를 하여 주었다. 나는 나의 무식과 천재(淺才)임을 돌보지 않고 붓을 들어 번역을 시작하였다. 더구나 만주에서 해방 후에 돌아온 소설가 박영준(朴榮濬)씨에게 이 중의 한 대목을 보였더니 씨도 , 不好를 말하기 전에 인간을 묘사한 대목 대목에서 두 번이나 울었다고 한다.”

    역자의 소개하는 말에서의 긴 인용이다. 그 후 역자는 수도문화사의 변우경(邊宇景)씨를 만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고, 출판 승낙을 받았다. 책이 그래 햇빛을 본 것이다. 역자는 소개하는 말의 끝부분에서 일본 문단의 기숙(耆宿: 나이 들어 덕망과 경험이 많은 사람)인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 1897-1973)가 원서 서문에 쓴 것을 인용했다. 참고가 될 듯하여 옮긴다.

그 무서운 운명을 감내(勘耐)하여 살아나온 인간의 한때의 모습이 남자, 여자, 어린애, 노인, 모두 소박하게 묘사되어 고뇌에 어린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중략)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빚어진 일이다. (중략) 우리가 사는 이 세계라든가, 인간의 존재라든가 하는 중요하고도 엄숙한 문제가 이 글의 배후에 직접으로 그림자가 되어있는 것 같다. (하략)”

    마지막으로 전홍진 씨가 쓴 권하는 말의 일부를 적는다.

곤경을 당하면 저도 모르는 힘이 생긴다. 저도 알 수 없는 이 힘은 가장 굳세고 가장 무서운 힘이다. 길게는 80 평생, 가지가지의 곤경을 겪어나가는 것이 사람이다. 그 중에도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갈래 길에서 허둥대는 일처럼 큰 곤경은 없는 것이다. (중략) 죽음이 닥쳐 올 때엔 아무리 담대한 사람이라도 선뜻하지 않을 수 없고, 떨리지 않을 사람이 없다. 이럴 때일수록 살아야겠다는 힘이 나온다. 이 힘은 물론 저도 모를 만치 강하고 날래다. 열 길 물속 일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 너나없이 곤경에 빠져보면 옳거니알게 된다. 사람으로서의 맛도 알게 되고 무게도 알게 된다. 고마운 것도 알게 되고 섭섭한 것도 알게 되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좋다고 본 사람이 이런 때엔 더러운 버러지같이도 보이고, 시시한 사나이거니 보이던 사람이 이런 때엔 성현같이 보이는 수가 있다. 말하자면, 곤경을 당해야 사람의 벌거벗은 참다운 값이 나오는 것이다. (중략)

이야기는 그 줄기가 대개 여기로부터 풀려 나온다. 주인공도 일본 사람, 쓴 이도 일본 사람, 그러나 한 개의 사람이 곤경 속에서 움직이는 모습은 너무도 뚜렷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쟁이 끝난 뒤에 일본 사람이 떼를 지어 물러가는 큰 흐름 속에서, 흐름의 그 자체를 유심히 보고 또 어떻게 흘러갔는가 하는 기록은 너무도 생생한 맛이 돈다. 여기서 슬며시 보고만 치우기보다는 나누어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하략)” [위의 여러 인용문에서 문장과 맞춤법을 약간 고치고, 한자를 한글로 바꾸기도 했음.]

    또 긴 인용이다. 곤경에 처한 사람의 행동에 대한 기록을 혼자 읽기가 아까워 여러 사람이 같이 읽었으면 하여 추천한다는 말이다. 실은 이 책이 원제목인 흐르는 별은 살아있다2003년에 다시 번역 출판되었다. 위귀정이 번역하고, 청미래란 출판사가 출판했다. 새 번역에 관하여는 다시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러나 70여 년 전의 첫 번역의 소개하는 말권하는 말을 장황하게 내가 인용한 것은 요즘의 독자들이 그 책을 구하여 읽기 어렵기 때문이다. 첫 역자와 소개자의 생각을 알리고 싶은 것이다. 내가 넘은 三八線을 처음 읽을 무렵에 내가 들은 이야기는 조선 사람은 그 많은 사람이 삼팔선을 넘었는데 기록이 없고, 하필 일본인 여자가 그런 기록을 남겼는가?”라는 것이었다. 어떤 기록이기에 그런가?

 

최명(서울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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