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리한 감성의 사람, 정주영(박경리 85)

 

    “감성의 고수!” 

    당대 보통사람들도 특히 감명을 받았던 정주영 회장의 한 행적을 두고 한 말이기도 했다. 세종임금 때 대왜(對倭) 개항장 하나인 울산 염포(鹽浦)의 허허벌판 경관 사진과 함께 거북선 그림이 박힌 500원짜리 우리 종이돈을 런던의 세계적 선박금융가에게 보여주며 무모하게도돈을 빌려 달라 했던 그 기발했던 1974년의 한 행적은 어제오늘 선박 건조의 세계 제1위 업체 현대중공업의 극적인 출발점이었다.

    당신은 낯가림이 심하다고 자책하곤 했지만 그만큼 사람 알기에 신중했다. 만난 사람 이야기에 대해 항상 말을 아끼던 스타일의 박경리도 아산 정주영(峨山 鄭周永, 1915-2001)을 기리는 책에 기꺼이 한 꼭지를 적었다(박경리, “소년과 노인,”아산 정주영과 나, 아산사회복지재단, 1997. 161-64쪽 압축). 적기를

어떤 일이든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건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공통된 특징이 있는 성 싶다. 나는 감성이 예리하고 풍부하다는 것을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으로 생각한다. 예리하고 풍부한 감성을 총체적인 것과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으로서 창조의 원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나 작가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자질인 만큼 비중을 감성에 두는 경향이 없지도 않지만, 창조는 예술가가 독점하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분야에서도 소수가 창조적 삶으로서 세상에 이바지 한다. 최선의 정치를 예술이라 하고 학문이나 과학조차 그 차원이 높아졌을 때 예술의 경지라 하기도 하는데 바로 창조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감성은 출발점이다. 순수하며 사물이 굴절되지 않는 빛과 같이 심성에 반영된다. 그러한 감성이 예리하고 풍부할 때 총체적인 것과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한 개인으로 내가 (아산에 대해) 느낀 것은 감성이 풍부하고 예리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느낌이며 바로 그 바탕에 의해 그분은 비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작가가 정 회장을 만난 것은 1993년 늦가을. 이인호(李仁浩, 1936- ) 서양사학자의 주선이었다(“타협 없는 삶의 풍성함과 외로움,”현대문학, 20086, 281-5). 경제와 정신성으로 대한민국을 버텨온 두 기둥이고 토지와 각별한 인연이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음에도 서로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두 거인이 만나면 무엇인가 꼭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만남을 설득했단다.

소년과 노년이 공존

    아니나 다를까 두 거인은 곧 서로를 알아봤다. “한강의 기적대표 상징 인물을 작가는 어떻게 알아보았던가.

그분의 방문도 뜻밖이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을 당대의 대재벌이 너무나 평범하고 소박한 촌부 같았기 때문이었다. 낯가림이 심한 아이처럼 섬세하고 흐미한 표정의 흔들림은 마치 소년과 노년이 공존해 있다는 인상이었다.

    정 회장이 문기(文氣)만만임은 진작 소문났다. 1970년대 말에 1백여 명의 문인을 초대해서 울산 각 곳에 자리한 그룹 산하업체를 보여주는 이른바 산업시찰 여행을 주선했다. 그 자리의 인사말인즉, 어렸을 적에 동아일보 연재의 이광수의 을 읽으면서 자신도 꼭 작가가 되려고 마음먹었다. 사업에 뛰어든다고 그 꿈은 일찍 접었지만 어렸을 때 품었던 문학에 대한 동경 때문에 지금도 문인들을 보면 부럽고 존경스럽다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문학이나 문인에 대한 정주영의 관심은 보통 이상이었다. 측근들에 따르면 소문난 작가들과 기회 있는 대로 어울리는가 하면, 널리 알려진 소설 줄거리는 훤히 꽤고 있었고 몇몇 시인의 시를 암송해 들려준 적도 여러 차례였다“(정규웅,글속 풍경, 풍경속 사람들, 이가서, 2010).

    나처럼 글 읽기를 권면해온 사람은 초등학교 졸업으로 어찌 문질빈빈(文質彬彬)해졌던가는 두고두고 궁금사였다. 가까이서 지냈던 한 손자 말이 그럴싸했다(정의선, “나와 조선일보,” 조선일보, 2020.3.19). 신문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생님이라면서 늘 새벽 4시에 일어나 신문부터 꼼꼼히 정독하시는 게 첫 번째 일과였다. 생전에 "신문대학을 나왔소!"라 말할 정도였고, 연장으로 손자들에게 신문에서 세상을 배우라했다.

    작가는 아산에 대한 소식은 그간 텔레비전으로 만나고 있었다. 내가 원주를 찾았던 날이 1992324일로 아산의 대통령 출마가 가시화되었던 시점이었다.

환경문제가 심각하다. 10년 전에는 그런 말을 하면 아무도 듣지 안했는데 지금은 많은 사람이 같은 인식을 갖고 있다. 한번 만났으면 정치에 뛰어들기보다는 그 정력과 재력을 갖고 환경보호에 매진했더라면 그는 진짜 세계적인 기업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인데 진작 만나지 못해 아쉽다. 대통령이 되느니보다 그 재력으로 환경운동을 한다면, 물론 양립이 어렵지만, 세계적 인물로 역사를 남는다. 환경문제는 지구경영에 속하기 때문이다.

    정주영의 원주 단구동 방문이 두 번째이던 199410월의 토지 완간기념행사는 나도 아산을 직접 대면한 시간이었다. 이전에 원경(遠景)으로 만난 적은 있었다. 1992123, 대선에 출마한 아산을 상대로 예와 같이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관훈클럽 초청토론회가 열렸다. 그때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 자격으로 어느 누구보다 그의 인물이 궁금해서 나는 아산 출연만 보러갔었다.

그 거침없던 말솜씨

    박경리의 지적대로 한마디로 감성의 화신이었다. 즉문즉답(卽問卽答)이 그렇게 화끈할 수가 없었다. 짓궂은 질문 하나는 당신이 대선에 출마했다는 소식을 듣고 북한 김일성이 정치는 대기업보다 훨씬 꾸리기 어려운 거라 걱정이라 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였다. 거창한 질문을 어떻게 답하는가가 궁금하던 그 순간, 속사포 같은 답변을 내놓았다. ”그 사람은 사람을 죽이는 정치를 했지만, 나는 장차 사람을 살리는 정치를 할 것이기에 그런 어려움은 있을 리 없을 것이다!“고 한마디로 잘랐다.

    1994105일 낮, 대하소설 완간 기념행사의 위원장으로 아산의 단구동집 도착을 기다렸다. 영접차 대문 앞에 섰는데, 당신이 차에서 내리는 걸음새가 불편했다. 급히 다가가서 부축하려 했더니 손을 휘휘 젓고는 또박또박 혼자서 그 경사길을 걸어 올라갔다. 거실에 자리하자 반기는 작가가 내놓은 쌀 튀밥을 집어서 어석어석 씹기부터 했다. 박경리가 가장 좋아할만한 순박 정경 그대로였다. 온갖 맛있는 것을 만났던 이도 어릴 적 그 입맛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엿보았단다.

    세월이 흘러 토지 완간 행사도 끝났던 1994년 가을, 프랑스에서 토지에 대한 세미나가 있으니 작가가 와서 얘기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거길 가려고 서울에 올라왔을 때였다. 완간 기념회를 후원해 주었음에 대해 인사하는 것이 좋겠다는 주변의 의견이 완강했다(박경리, “정회장의 낡은 구두 한 켤레”,생명의 아픔, 이룸, 2004, 225-233)

한국 제일의 재벌 총본산은 저의 기를 꺾었고 난생처음 경험에 촌뜨기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회장실에 계시는 정 회장 역시 촌사람 같아서 적이 마음이 놓였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일어서려는데 별안간 정 회장께서 여비에 보태 써라 하시며 돈을 주시지 않았겠습니까. 회장실에서 나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저도 돈 많습니다.” 엉겁결에 그런 말을 하며 고사했습니다만 나이 드신 분을 무안하게 해서는 안 된다 싶어 그만 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제가 어줍잖게 토지문화관을 맡으면서부터 기금관계로 정 회장을 찾아 뵐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변머리 없고 비위가 약한 저로서는 지옥문을 통과하는 만큼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아산의 타계도 텔레비전으로 접했다. 현대 산하에서 일하는 하위직 직원들이 하는 말을 우연히 엿들었다(박경리, “앞의 글”).

울산조선소를 건설할 무렵 정 회장은 버려진 쇠붙이를 줍고 다녔고 낡아서 해진 구두를 신고 다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서도 감명을 받았지만 말하는 직원의 표정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했습니다. 친애하고 자랑스러워하듯 그 소박한 표정, 그러니까 순박한 상사에 대하여 표현하는 하위 직원, 참으로 아름다운 한순간의 풍경이었습니다.

정 회장께서 돌아가시고 보니(토지문화관 기금 후원) 말 안 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세상으로 가신 회장님. 저승에서는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가는 신선이 되십시오. 너무 많이 일을 하셨습니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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