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작가의 위광 그늘에(박경리 82)

 

    옛적에 좋은 비문에 대한 사례는 집한 채 값이라 했다옛날 어른들이 그랬듯내 선친도 묘 자리를 찾고 정하고 다듬는 일은 가세(家勢)를 기울일만한 대사로 여겼다개인적으로 초치한 지관(地官)을 극진하게도 받들었다이런 전례(前例)를 생각해서라도 나도 작가에게 성심껏 인사를 차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윤문에 대한 사의로, 4부 집필에 전전긍긍하던 작가를 위해 작은 기력이라도 보탤 방도는 무엇이었던가궁리 끝에 먼저 고급 만년필을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1990년에 일본 도쿄를 갈 일이 있었다소문을 듣고 찾아간 곳은 긴자 거리의 이토야(伊東屋문방구점이었다,

    내 기억으로 이를테면 교보문고 등에 고급 외제만년필의 국내 시장이 열린 것은 2000년 이후였다명색이 나도 글쟁이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유명 만년필 브랜드는 진작부터 좀 꿰고 있었다과연 일본 백년 노포(老鋪)는 명품 만년필을 잘 갖추고 있었다까닭은 몰라도 만년필은 몽블랑(Montblanc), 라미(Lamy), 펠리칸(Pelikan) 등 독일제 브랜드가 우세했다그 가운데서도 새끼 사랑이 지독하다고 소문나서 친근감을 느꼈던 펠리칸 새 이름을 딴 만년필을그 브랜드 가운데서 값이 꽤 높은 최상품으로 골랐다.

글쟁이의 벗 만년필

    글을 원고지에 적던 시절에 만년필은옛 선비의 문방사우(文房四友가운데 하나인 붓처럼글쟁이들의 긴밀한 벗이었다필기구가 한결 다양해지기 전만해도 글쟁이에겐 만년필은 자별한 애완품이었다.

    대학에 들었다고 한결 우쭐해진 이에게 맞춤한 선물도 만년필이었다나도 그런 선물을 받았다가 대학생활을 위해 처음 내려선 서울역에서 남대문을 바라보는 사이로 상경 직전에 선물 받았던 미제 만년필 파커(Parker)21은 그만 쓰리 맞았다.

    원주로 가서 만년필을 선물했다만년필을 쥐고 살았던 이답게 한눈에 알아보고 어찌 이런 명품을 구했는가감탄이었다고급만년필은 쥐자마자 손바닥 안에 가득 퍼지는 파악(把握)의 충족감이 그만이었다던 어느 문필가의 느낌 그대로였던가고가의 것을 그냥 받아서 되겠느냐고도 했다유명 필자에게 만년필을 맡겨 한참 잘 쓰고 난 뒤 되돌려 받는 관행도 있다 했으니 나중에 돌려주면 기념으로 갖겠다고 얼버무렸다.

    『토지집필이 막바지였던 1993년 10월 27일이었다대미(大尾)까진 3분의 정도 남았다 했다당신 서안(書案)이던 교자상 위에 놓인 만년필을 엿보았다촉끝이 비스듬하게 닳아나간 채였다갱지로 만든 원고지 위에선 아무리 강한 촉끝도 마모는 시간 문제였다.

    드디어토지대하소설 집필이 끝났다작가는 만년필을 나에게 돌려주겠다는 말을 건넸다그제야 작가를 기억할 그만한 징표가 별로 없는데 내가 어찌 갖겠느냐고 에둘러 반응했다과연 대하소설이 완성되고 나자 저자의 오랜 집필 생활을 함께 했던 만년필도 유명세를 탔다지면에 모양새를 갖춘 만년필 인물(?)사진이 실렸던 것(시사저널, 1994년 8월 25일자토지통권 21, 나남, 2002, 396). 옛 내방가사 <조침문(弔針文)>이 노래했던 부녀 침선(針線)의 바늘처럼토지대장정에 만년필이 대공(大功)을 세웠다는 말도 나올 법 했다.

조각가도 누린 작가의 위광

    큰 인물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사람은 전자의 위광(威光)에서 수양산 그늘같은 음덕(蔭德)의 씨임을 받는다사전의 말로 위광은 알 만한 사람들의 심리에 외경·칭찬·신복(信服등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했다큰 인물의 선호를 받는다고 알려진 이는 그가 펼쳐온 작업세계의 가치도 더불어 인증(引證)받는 이른바 후광효과를 누린다이탈리아로 유학한 뒤 창작활동을 의욕적으로 펼쳐가던 이영학(李榮鶴, 1949- ) 조각가에게 작가의 위광 그늘에 들 수 있게 내가 자리를 마련했던 것은 조각가에겐 장차 중요 경력이 될 것이었고문학애호가들에겐 작가의 초상조각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영학의 작품세계를 개인적으로 진작 평가(김형국, “아침논단스페인의 소한국의 소,”조선일보, 1985.7.16)했음을 계기로 자주 어울렸다그때 조각가가 매달리던 작품세계는 호미 등의 농기구망치 등의 공기구 폐품을 금방 날아갈 듯 생명력 넘치는 날짐승 새로 태어나게 만들던 작업이었다(박완서, “모두 모두 새가 되었네,” 이영학의 새(도록)까치, 2001). 이를 보고 당대의 구안(具眼)이던 신흥사 조실 무산 조오현(霧山 曺五鉉, 1932-2018) , “장도리에 돌쩌구대못박으니 이영학의 새는세상 밖에서 울도다고 노래 붙였을 정도로 호평했다.

   이영학은 이들 창작조각에 더해서 제대로 배웠던 인물조각으로 이 나라 명인들의 모습을 재현하고 싶어했다사계에서 솜씨를 인정받자면 두루 알려진 명사들 모습을 먼저 작품에 담는 것이 방도라는 말에 내가 그 사이 왕래해온 명망 인사 두 사람을 먼저 거명했다. 1호가 장욱진, 2호가 박경리였다.

    장욱진 초상조각은 1990년 3월 1일에 완성했다완성된 당신 작품을 만나려고 화가는 내 집으로 발걸음하기도 했다화가는 대만족이었다.

    다음은 박경리를 섭외하는 일이었다토지집필에 부심 중인 작가와 시간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드디어 제작 도구를 갖추어 싣고 석고작업을 하려고 나선 조각가와 함께 원주를 찾았던 날은 1991년 10월 3일이었다완성 작품을 갖고 작가 집을 찾았던 날은 약 반년 후인 1992년 3월 24일이었다브론즈와 무쇠로 각각 제작한 작품을 보곤 무쇠가 마음이 든다 했다.

    작품에서 작가가 받았던 느낌은 당신 할머니가 느껴진다 했다그 말에 나는 조각가와 피사체 인물을 다독일만한 선례(先例)의 말을 늘어놓았다초상조각도 특출했던 이탈리아 조각가 마리니(Marino Marini, 1901-80) 일화로갓 제작한 인물조각을 놓고 제삼자 지인이 조각 모습과 실제 인물이 별로 닮지 않았다고 딴죽을 걸었다이에 마리니는 염려할 것 없다장차 언젠가 작가도 죽고 피사체도 죽고 훈수하는 당신도 죽고 나면 이 조각이야 말로 후세 사람들이 그 인물에 대해 말할 확실한 근거가 될 것이라 응수했다.

    박경리상 조각으론 이영학이 처음이었고원주 단구동 자리에 들어선 박경리문학관은 심정수(沈貞秀, 1942- ) 그리고 원주 매지리의 토지문화관통영의 박경리 기념관하동의 박경리문학관러시아 상트 페트르스부르크 국립대학에는 권대훈(權大勳, 1972- )의 작품이 자리 잡았다이영학의 작품성 조각은 토지문화관에 더해 서울 구기동 소재 삼성출판박물관 등에도 수장되었다.

    이영학은 이탈리아 유학 때 교황 요한 23세와도 절친했던 인물조각의 대가 만주(Giacomo Manzù, 1908-91)를 사사(師事)했다마리니도 그랬듯이탈리아 조각가는 누구보다 교황의 인물조각으로 그 명성을 얻었다는 소문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장욱진박경리의 인물조각은 호가 났다작품 제작의 요청이 줄을 이었다김수환 추기경이 다녀갔고이어서 중광 스님이건희 회장김종학 화백 등이 그의 수유리 작업실을 드나들었다마침내 이 나라의 큰 인물 110명의 초상조각을 만들어 이름을 떨쳤다(이영학((()연미술, 2007). 그러는 동안 그가 명인들을 만나면서 생활의 잔재미를 함께 나누던 이야기가 좋은 산문으로 그려지기도 했다(박완서, “음식이야기,”호미, 2007, 186-200).

 

 사진작가를 앞에 두고 흙 작업 중인 이영학원주 단구동, 1991년 10월 3(사진김형국)

  

 

               

 

  

김형국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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