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4부는 일본 비판론(박경리 74)

 

    주말 산행(山行)에서도 더러 깔딱고개를 만난다.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정도로 힘든 고비의 고갯길이 있다는 말이다.

    작가에게 대하소설토지집필의 대장정에서 3부를 마치고 4부로 접어들 때가 바로 그 깔딱고개였다. “견디기 어려울 때 위안이었다.”는 말처럼 시는 당신에게 소설 창작의 어려움을 털어놓던 하소연 같은 심정 표출 장치였긴 했어도, 4부 착수의 어려웠던 심정 토로엔 시 짓기 간접화법이 성에 안찼다. 해서 4부가 끝난 해에 펴낸 시집(못 떠나는 배, 1988)에다 서문이란 이름의 직설화법 산문으로 그 어려움을 되돌아보았다.

4부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사명이라는 동아줄에 묶이고 말았다. 그 동아줄은 전신을 칭칭 감았고 날로 강하게 나를 죄었다. 4부의 시간이며 무대인 1930년에서 45년까지(집필사정으로 1940년대 전반은 5부로 넘겼다) 철저히 봉쇄되고 바닥까지 수탈당했으며 모든 것이 말살되었던 일제침략의 말기를 살았던 마지막 세대인 나, 작가라는 멍에를 질머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뭔가에 의해 쫓기는 기분이었다. 강박이었고 초조, 불안이었다,

4부는 일본이 기둥이다. 철저한 일본의 분석 없이 작품의 진행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며 민족주의의 한 측면인 에고이즘에서 빠져나가야 했고 냉정히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감정, 수만의 신경의 바람에 전율하는 풀잎일지라도 무디게 뚫고 나가야, 내면은 아우성이며, 포탄이며 전진(戰塵)이었다.

    말미암아 1979년에 3부를 끝내고 한 달 뒤에 4부를 착수하겠다던 실행 작심이 2년이나 지체되었다. 마침내 1981, 연재를 시작했다. 집필기간이 꽤나 길었음도 집필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말해주었다. 드디어 1988년에 끝냈다. 그 사이 연재 중단도 여러 차례, 연재 기간도 5부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길었다. 거의 8년에 걸쳐 씌어졌는데 분량은 가장 적었다.

일본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4부는 시간대로 말해 1930년대 이야기들이다. 이 시기 한중일의 동북아 역사에서 큰 사건이라면 군국주의 일본에 의한 1931년 만주사변에 이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이 침략전쟁에서 희대의 불상사로 1938년에 남경학살이 자행되었다. 한반도 땅도 날로 식민통치가 가혹가열해지던 시기였다. 그만큼 평사리 동네사람은 물론 한민족 백성을 옥죄는 일제의 정체에 대한 심층 공부가 급선무라 생각했다(박경리,일본산고, 2013, 71-72).

내 자신이 공평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다짐 때문에 내 스스로 나를 점검해본 것이다. 민족적 감정 때문에 사시(斜視)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염려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사시가 된다면 일본의 그 엄청난 사시에 대하여 논할 자격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바로 그랬다. 작가와 왕래하기 시작할 즈음이던 1980년대 초반, 틈틈이 나에게 들려준 것은 스무 살까지 체험했던 일본이지만 시각의 체계적 정리를 위해 일본 공부에 매달린다는 말이었다. 아예 몇 꼭지 적어놓았단다. 몇 달 지나 다시 만난 자리에서 일본론이 완성되었는지 묻자, 일본사람들도 꼭 읽어줘야 할 것이기 때문에 아예 일본말로 적으려 한다는 말도 흘렸다.

    집필은 그때까지 단행본 분량으로 정리되지 못했지만 생각의 체계는 어지간히 잡혔다고 생각했던지 일단 문화일보에 연재를 시작할 수 있겠다는 제안도 넌지시 던졌다. 언론계의 작가 우호인사 한 사람으로 오랜 교류가 있었던 김징자(金澄子, 1941- ) 논설위원이 이 일로 문화일보 사령탑과 교신했다(김명복, “우리 시대의 거울‘”, 박완서 외,수정의 메아리, 1995, 197-210).

작가의 반일 필봉

    박경리는 진작부터 철두철미 반일(反日)작가라고 공언해왔다. 작가의 이런 일본론이 아주 델리키트한 한일간 숙제 풀기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은 신문사 쪽 입장이었다. 대안으로 당신의 소설에서 일본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깔리든 그건 전적으로 작가의 것이기 때문에 신문사로서 부담감을 덜 느껴도 좋겠다고 여겼다. 작가도 그렇다면 정공법의 일본론 대신에토지 5의 신문연재를 응낙했다.

    199291일부터 문화일보에 5부 연재가 시작됐다. 그때 당신 품에 대충 열 꼭지 정도 초()를 잡아 놓았던 일본론이, 이미 4부에 담았던 당신의 일본생각에 이어, 5부의 문맥과 행간에 깔리게 되었다.

    진작 말했듯, 소설의 제목을 토지로 정한 것은 땅이 본디 사람 삶에 주어진 자연의 소여(所與)인데도 소유()가 개입함으로써 사람의 역사가 투쟁과 전쟁으로 점철되었음에 대한 총론적 암시로 삼았음이었고, 일제의 강점에 따른 한민족 반일감정의 유발증폭은 특히 식민세력의 한반도 농지 장악탓이었음의 시사는 각론적 설명이었다. 그 장악이라 하면 구체적으로 일제 말에 식민정책의 앞잡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재산과 일본인 및 일본 법인이 소유한 일반농지는 모두 282480정보로 남한의 총 경지면적 13%에 달했다는 사실이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작가의 이런 착안점은 소설을 통해 일본의 정체를 알 수 있게 하자는 뜻도 있었다. 특히 일제를 살지 않았던 한글세대는 구체적 체험과 연구 관찰이라는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다만 반일(反日)이라는 민족교육으로 길러진 지식과 근본적 이미지에 의해 일본을 단죄, 규탄하는 태도를 가지기일쑤라는 것. 작가의 의중은 이랬다.

도식(圖式)적인 교육을 떠나 생생한 역사적 사실, 역사적 입김에 접할 수 있다면 한글세대는 무조건 감정적 시비를 떠나 조목조목 따지고 넘어가는 사상의 강화(强化)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일본의 전후세대도 우리 한글세대에 대한 불만을 사실에 입각하여 반박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을 관찰하고 연구해야만 한다. 대로(大路)는 결코 일방통행일 수 없기 때문이다(박경리,위의 책, 71-72).

    대하소설토지에 깔렸던 박경리의 일본비판은 그 근본에서 일본이란 나라의 역사의식 부재라는 점이었다. 역사의식 부재는 그들 역사를 만세일계(萬世一系)라고 믿는, 터무니없는 몰()역사성을 믿는 일본민족의 함량미달 정직(正直)이고, 이게 특히 오늘 경제대국 일본이 처한 위기의 실체라 했다. 여전히 그들의 임금을 신으로 여기는 허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일본은 정직한 나라가 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 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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