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구동 착발(着發) 감정이입(박경리 68)

 

    가까이 이웃 동네에 사는 전자공학박사는 일으켰던 첨단기업에서 손을 떼곤 좋은 말사회봉사에 정말 열심이다. 퇴계(退溪) 종손 집안으로 장가들었던 인연의 그늘이었든가 청하는 자리에 가면 무엇보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거동하기곧 감정이입(感情移入, empathy)의 중요성을 역설해왔다. 쉬운 말로 상대에 대한 공감(共感)적 배려 생활화를 강조해왔다.

    4부에서 5부로 이어지는 대하소설토지의 완성을 위해 용맹정진하는 박경리의 일상은 어느새 서러움, 슬픔, 아픔에 찌들린 사람에겐 정신구원인가 치유인가 힐링인가의 단초(端初) 내지 요람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특히 자의식이 강했던 여류들에게 효험이 있었다.

    세상에 알려진 대로, 이인호(李仁浩, 1936- )사학자는 현대한국에서 여성차별의 유리벽을 깬 이로 으뜸이었다. 최초의 여성대사(핀란드)에 이어 러시아사 전공의 연장으로 러시아 대사도 역임했으니 옛말로 하면 문무겸전이요, 요즘말론 학행일치(學行一致)였다. 해도, “산이 높으면 계곡도 깊기 마련이란 속설이 틀리지 않았던지, 개인적인 번뇌는 남달랐던가(“박선생님께 진 사랑빚,”수정의 메아리, 1995, 37-42; “타협 없는 삶의 풍성함과 외로움”,현대문학, 20086, 281-5).

당시 정신적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내게 박 선생과의 만남은 정말로 사막의 단비처럼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체험이었다. 염치 좋게도 나는 처음 뵙는 선생님께 며칠을 그 댁에 와서 쉬어 갔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일하는 사람이라도 누가 집안에 같이 있으면 전혀 글을 쓰시지 못하시는 선생님은 그 돌발적인 요청을 쾌히 승낙하시고 평소 잘 쓰시지 않는 방에 연탄을 갈아 넣으며 까지 나를 보살펴 주셨다.

  참여관찰’, 곧 바로 옆에서 눈여겨보았던 박경리의 정체는?

역사의 큰 흐름을 휘어잡는 통찰력, 흔히들 남성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그런 지성과 의지, 반면에 사람들 마음속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도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사랑어린 관심, 이런 것들의 배합이 바로 박경리 선생님을 대지로 때로는 어머니를 상기시키는 거인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토지의 완간 못지않게 우리가 축하해야 할 일은 그것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박경리라고 하는 우리 사회의 한 정신적 지주가 생겨났다고 하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토지완성에 매달리던 사이로 박경리가 원주에서 보여주었던 처신에 대해선, 정릉 시절엔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가까웠지만 이후 왕래가 끊어졌던, 한 문학평론가가 작가 주변 사람들 말과 글로 전해 듣는 바 있었다. 원경(遠景)으로 간접화법으로 접했을망정 거기에 드러난 작가의 원주 생활상은 아주 생기 넘쳤던 실감이었다(강인숙, “박경리 씨와의 봉별기,”여류문학, 유럽문학 산고, 2020, 104-6쪽 발췌).

원주가 선생님을 딴 사람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빗지도 지지지도 않은머리를 아무렇게나 묶어 올렸는데도 선생님 사진에는 지모신(地母神: Mother Earth; 모성생식력창조성 또는 대지의 풍부함을 상징대표하는 여신) 같은 넉넉한 분위기가 서려 있었고, 그 안쪽에서 빛을 발하는 사고의 깊이가 조화롭게 어울려 있었던 것이다. 온 세상을 적으로 생각하면서 이를 갈며 살던 전반기(정릉 시절)와는 거리가 먼 도통한 풍경이다... 원주에서 일어난 그 놀라운 변화의 원천은 손자들의 탄생과 경제적 안정,토지의 완성 같은 것에서 온 것이 많을 것이다. 정릉 시대에는토지를 잉태하고 키우는 일이 너무너무 힘에 겨워서, 온갖 정력을 모두 거기 쏟아 붓느라고 그렇게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쳐진 강파른 면을 노출시킨 것이 아니었을까?

    여성 혼자 살아가는 생활영역이었지만 여류들만 정신적 치유인가 자극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알만한 작가들이 적잖이 정체성 확인의 반향판(反響板 sounding wall)을 삼으려고 박경리를 찾았고, 거기서 얻었던 감화는 나중에 여기저기로 풀려나왔다.

    어쩌다 박경리를 만난 뒤 돌아가는 유명 작가를 나도 우연히 엿본 적이 있었다. 넓은 뜰에 저만치에서 작별하는 이가 누군지 물었더니 소설가 조정래(趙廷來, 1943- )와 시인 아내라 했다.

    그때 대하소설로 역시 크게 이름을 얻은 이가 선생을 찾아와선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가?” 내가 궁금해 하자, 당신도 나눈 이야기로 석연치 않은 궁금증만 더하게 된 듯 답했다. “선생을 벤치마킹해서 적었던 대하소설(태백산맥)3백만 권 넘게 팔렸다. 인기 대하소설토지를 진작 펴냈던 선생이야 말로 자기보다 훨씬 더 많이, 필시 수백만 권이 팔리지 않았겠는가?!”하더란 것. 그 즈음이었던가 지식산업사 출간의 박경리의 토지는 서점에서 볼 수 없게 되었고, 조정래는 인지 없는태백산맥이 나돌았다며 처음 펴낸 출판사와 법정분쟁 중이었다(매일경제, 2001628).

딸 가족의 '()원주'

    그런 말들 사이로 사위 김지하 시인에 대한 불편의 말을 한마디 느닷없이 내비쳤다. 누구에 대해서든 사람의 언짢은 거동은 여간 입에 담지 않았던 작가에게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시인을 찾는 내방객이 줄을 잇자 술심부름한다고 당신 딸이 앉을 틈이 없다니 이를 어쩌면 좋겠느냐, 한숨이었다.

    화가 나긴 정말 잔뜩 났음이 분명했다. “전라도 사람, 아내 부려먹기가 그러한가?!”는 말까지 했다. 내가 경상도 출신이니 동감을 얻을 참이었든가. 서울 등 타지 사람들이 경상도 남자는 아내를 거칠게 다룬다고 흉보지만, 그래도 경상도 남자는 아내가 바빠서 어쩔 줄 몰라 하면 체면 불구하고 돕겠다며 정지(부엌) 문지방을 타고 넘는다.”는 말까지 했다.

    아니나 다를까 김영주의 고생은 이래저래 소문났다. 이를테면 밤늦도록 손님을 치러야 하는데 남편이 한복 입기를 강요해서, 만삭의 임산부는 거추장스러운 옷 속에서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강인숙. “앞의 글”, 102). 소문으로서가 아니라 직접 보고 듣는 친정어머니의 안타까움은 하늘을 찔렀다.

그때 머리가 다 빠지고 철색(鐵色)으로 변한 딸아이의 얼굴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내 마음속의 깊은 피멍입니다. 그리고 언어가 지닌 피상적인 속성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절감하고 있습니다. 진실에 도달할 수 없는 언어에 대한 몸부림, 그럼에도 우리는 그 언어에서 떠나질 못합니다. 그게 문학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시절, 거부하고 포기한, 극한적 고독의 산물이토지였을 겁니다.

    그런 딸을 염려헸던 당신 처방은 그 가족들의 '()원주'뿐이라 믿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시인 가족의 전라도 해남 이사는 그런 맥락이었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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