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본중심(物本中心)의 삶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화가 가진 위력은 실로 대단하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힘의 논리가 통용되고 있고, 힘은 풍부한 경제력에서 나온다는 것이 현대사회의 논리다. 그래서 경제력 싸움을 ‘총성 없는 전쟁’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경제력을 키워주는 힘은 정신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급속한 성장기에는 재화가 재화를 낳고 물자가 물자를 낳는 현상이 일어나지만, 거품경제 시대가 끝나면 고도의 정신활동 즉, 지적생산성(知的生産性)이 성장을 좌우하게 된다. 기술패권주의가 등장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물질만능, 황금만능의 물신숭배(物神崇拜)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정서가 황폐해지고 가치관이 전도되어 생기를 잃을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에서는 계층 간의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리고 한번 물신숭배(物神崇拜)에 빠진 사회는 거기서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다. 현재 우리 사회에 번지고 있는 물본중심의 사고는 급속한 성장이 가져온 후유증이다. 성장의 대가로 어차피 한번은 치러야 할 홍역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홍역을 얼마나 슬기롭게 극복하느냐에 따라서 지속적인 성장의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물질에 경도(傾倒)된 의식의 틀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물질보다는 정(情)으로 살아온 민족이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 정서를 한마디로 나타낸다면 정한(情恨)이라고 한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이웃 간의 정, 상하간의 정, 동기간의 정, 사제 간의 정, 친구간의 의리를 중요시했다. 가까운 사이에 약삭빠른 이해타산이나 계약적 삶을 사는 사람을 무척 싫어했다.

60년대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꾸며보자.

아이들이 마을 앞에서 놀다가 돌을 던져 어느 집 유리창을 깼다. 요즘 같으면 당연히 변상하고, 당연히 변상 받으면 그만이다. 변상했으므로 미안할 것도 없고, 받을 걸 받았으므로 의가 상할 리가 없다. 그러나 그때에는 사정이 달랐다. 집주인이 나와서 아이들을 혼내고 부모까지 싸잡아서 좋지 않은 소리를 한다. 물론 변상을 받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는 것이다. 아이의 부모들이 뒤늦게 알고 너무 심하다 싶어서 유리창 값을 들고 찾아가서 변상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엉뚱한 방향에서 싸움이 일어난다.

“이 사람아, 아이들이란 너나없이 장난이 심한 법이라서 내가 교육상 한 마디 한 걸 가지고 자네가 돈을 들고 오다니….”

“하도 화를 많이 냈다기에 내가 돈을 가지고 온 거니까 받아두게.”

“예끼 이 사람아, 자네와 나 사이에 그렇게 밖에 안 되었던가, 섭섭하네 그려. 자네 자식이나 내 자식이나 다 내 자식같이 생각해서 그런 걸 가지고 돈을 들고 오다니! 나 이제부터 자네를 다시 봐야겠네.”

이런 풍경은 서구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아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고, 우리나라 젊은이들도 익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농촌에 가면 이런 일쯤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계산적인 삶, 계약적인 삶보다는 정과 의로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생활상이었다. 역시 이럴 때 서로 감탄하고 신바람이 나는 것이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이다. 모든 것을 물질로만 따지고, 결국은 사람의 가치조차도 물질적 기준으로만 평가하는 풍조는 우리가 하루빨리 버려야 할 병폐이다.

지금까지 살려야 할 한민족의 우수성과 퇴치해야 할 한국병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어느 민족이든 그들의 고유한 정서와 익숙한 습관이 있다. 바람직스럽지 못한 부분은 고치고 다듬는 노력을 기울여야겠지만 고유한 원형질은 이어나가야만 진정한 생기와 저력이 발휘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식성에 맞지 않을 때는 소화불량을 일으키듯이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그들의 정서와 습관에 맞지 않을 때는 부작용을 일으킨다. 민족의 특질을 우수성으로 승화시키는 노력이 국제경쟁력에서 이길 수 있는 첩경이다.

그러면 우리 민족의 특질은 무엇인가. 곧 신바람 문화이다. 음악을 전공한 미국인에게 우리의 굿거리장단을 훈련시키기보다 아무런 음악적 소양이 없는 우리의 어린이들에게 그것을 가르치기가 더 쉽다는 사실은 민족의 원형질이 얼마나 질긴 것이며, 얼마나 핏줄 같은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남의 장점은 잘 거두어 익혀야하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고유한 정서에 용해시켜 소화해야 하지 그냥 날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래서는 결코 남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엄청난 문화적 충격(Culture Shock)속에 갈등과 혼란만 가중될 것이다.

 

여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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