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구원이던 원주 단구동 집(박경리 65)

 

   통영 출신 박경리는 1980년 초여름 이래 원주 사람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1979년 한 겨울, 서울 정릉 집이 보일러 동파가 나서 잠원동의 대림아파트로 옮겨와 반년 정도 살고 난 뒤였다.

    원주 정착 앞뒤 경위는 지인들이 기록으로 남겼다. 우선 정릉 시절과는 확연히 달라진 단구동 생활방식의 정착이었다(장명수, “내 꿈속의 원주, 박경리 선생님,”수정의 메아리, 1994, 135-142쪽 발췌)

1973년 선생님의 외동따님 김영주 씨와 결혼한 다음해에 민청학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사위 김지하 씨는 감옥에 있었다. 선생의 신경은 어떤 때 자기 자신을 베일 것처럼 날카로웠다. 옆에서 보기에 아슬아슬한 때도 있었다. 80년 초여름 원주로 이사하시던 날 선생... 아파트를 떠나는 모습은 마치 새장을 벗어나는 새처럼 기대에 가득차고 자유롭게 보였다(밑줄은 필자의 것).

원주 살이의 하루하루

    이삿날, 진주고녀 친구들이 응원 동행했다. 그리고 소감도 적었다(최혜순,박경리와 나의 우정, 1994, 60-1). 무엇보다 이사 간곳에서 집 정리가 만만치 않았던 것. 뜰이 약 6백 평이나 되는 넓이라 그랬고, 남의 손을 빌리지 않는 집주인의 생활스타일이라 그랬다,

앵두, 자두나무는 다 뽑아 없애 버리고 정원수를 적당히 심어놓고 크고 작은 바위들을 이곳저곳에 배치해 놓고... 마당의 사람 다니는 데를 돌을 박아 깔았는데 이 작업은 정릉 집에서 해 온 일이라 이미 유능한 전문 기술자의 경지에 이르렀고 집 옆에 나지막한 모래흙 언덕이 있었는데 비가 오면 흘러내릴 염려에서인지 시멘트 가루를 물과 모래로 섞어 이겨서 돌 사이를 메꾸어가면서 쌓아 올렸는데 이 일 또한 전문 기술자 못지않게 어찌나 탄탄하고 보기 좋게 쌓아 올렸는지 보는 사람마다 감탄할 정도였다. 이 일이 워낙 힘이 드는 일이라 조금씩 해나갔는데 우리가 갈라치면 이 작업을 하고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냥 구경만 하고 있기 민망스러워서 멀찌감치 쌓아둔 돌이라도 날라다주면서 도와주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어쨌거나 그녀는 쉴 사이 없이 뭣인가를 했는데 글을 쓰는 일이야 본업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글 쓰는 사이사이 잔디의 잡초를 뽑는다든지 채소와 잔디에 물을 주는 일이라든가, 연탄재로 밭 가장자리 사람 다니는 데다가 깨뜨려 다져놓는다든가, 쓰레기를 모아서 태운다든지 풀 뽑은 것을 모아 음식 찌꺼기와 같이 퇴비를 만든다든지 해서 이 집안에서는 밖에 내다 버리는 것이 그다지 없을 정도였다.

    작가가 원주로 이사한 그해 1980년 말, 사위 김지하가 감옥에서 풀려났다. 이듬해 둘째 손주(김세희)가 났다. 박경리에겐 따님을 결혼시킨 지 7년 만에 맞는 평화였다.

    “마음 따로 몸 따로라는 말이 있다. 마음은 그러했지만 몸은 고달팠다. 새집 생활의 적응에 정원 가꾸기가 정말 만만치 않았다.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고 나중에 당신의 사세가(辭世歌) <옛날의 그 집>에다 새삼 적어냈을 정도였다.

    원주로 옮겨왔음에 대한 당신의 변이 없을 수 없었다. 우리 사회의 정서가 서울로 올라가는 상경(上京)은 자연스럽고 당연한데 견주어, 어떤 이유에서건, 지방이나 고향으로 내려가는 경우는 낙향(落鄕)이란 이름으로 부득의(不得意)했다고 여겨지기 일쑤라서 더욱 그랬을 것이었다(박경리, “다시 Q씨에게 2”,생명의 아픔, 2004).

어떤 분은 내가 글쓰기 위해 원주로 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건 내게 사치스런 것이었습니다. 나는 인생만큼 문학이 거룩하고 절실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구동의 뜨락은 꽤 넓었고 그것이 내 세계의 전부였습니다. 삶은 준열하고 나날의 노동 없이는 내 자신이 분해되고 말 것만 같았고 긴장을 푸는 순간 눈을 감은 채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모든 것을 거부하고 포기했으며 오로지 목숨을 부지한 것은 가엾은 내 딸, 손자의 눈빛 때문입니다(밑줄은 필자의 것).

문학과 피붙이가

    문학보다 사람 생명이, 글쓰기보다 피붙이의 안온(安穩)이 더 소중하다 했다. 해도 문학은 박경리에겐 바로 당신 생명줄이었다.

작가생활 40년 가까이 되지만 후반기 20년 동안 나는 거의 외부와 단절된 상태로 지내왔습니다. 여러 가지 그것(원주 이사)에는 이유가 있었지만 첫째는 자투리가 아닌 두루마리 같은 시간을 갖고 싶었고 토지라는 방대한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하는 데 그것은 필수적인 조건이었습니다.

노동글쓰기는 삼발이 같은 것이었다. 글을 쓰다 막히면 밭에 나가 풀을 뽑고 그러다 보면 생각이 떠오르고 막혔던 것이 뚫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연의 이치, 사람 살아가는 이치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으며 불평등은 인간의 소위로서 자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삶의 궤적은 한 치 오차 없이 동등하다는 것, 자연의 공평함과 오묘함, 실로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내 세계, 나와 더불어 살았던 많은 생명들의 세계, 이미 그것은 내 소유에서 떠나버렸다”(박경리 생명 에세이, “천지에 충만한 생명의 소리”,생명의 아픔, 2004, 53-63).

    그러기 때문이고도 하고 그럼에 불구하기도 해서 원주 단구동은 집필 공간으로 더 할 나위가 없었다. 당신 주변으로 오가는 후배 작가를 만날 때마다 아파트 생활을 속히 청산하고 손바닥만 한 텃밭이라도 딸린 단독주택에서 살라는 권면이었다(윤흥길, “위대한 모성의 특별한 영혼에 바치는 헌시,”현대문학, 20086, 306-11). 정릉 집도 단독주택이라 화초 한포기라도 심을 공간이 있었고, 단구동 집은 바로 문전옥답 같은 뜰을 거느린 집이었다. 생활공간, 집필공간이 바야흐로 당신의 킹덤(왕국)으로 꽉 짜여 졌으니,

선생은 원주로 가실 때 대문에 빗장을 지르고, 어느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글을 쓰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선생 댁 대문은 사실 늘 열려 있었다. 선생 댁을 가고 싶어 하는 몇 사람이 모여 전화를 하면 선생은 언제나 그래 와서 점심 먹어라고 반겨주셨다. 일이 밀렸으니 다음에 오라고 하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정릉 시절의 그 얼음 같은 거부감은 원주의 지열에 녹아내린 듯 했다. 선생은 서울에서 이런 일 저런 일로 내려오는 사람들뿐 아니라 느닷없이 독자라고 찾아와 인생 상담을 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일에 지장이 많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집에 대부분 혼자 계시므로 방문객들과 직접 부딪칠 수밖에 없는 사정도 있었으니, 대문 밖에서 기자들을 돌려보내던 정릉시절을 생각하면 그런 불평조차 신기하게 들렸다(장명수, “앞의 글”).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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