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명분의식

 

형식(形式)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다. 명분(名分)은 현실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원칙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형식과 명분이 내용과 현실의 목을 조르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결과이다. 물을 담기 위해서는 그릇이 필요하지만, 물이 없는 그릇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명분이란 포도덩굴을 잡아주는 시렁과 같은 것이다. 시렁이 포도덩굴의 균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포도덩굴이 시렁에 멋지게 감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내용과 현실을 위해 존재하는 형식과 명분이 사회적으로 큰 병폐가 되고 있다. 특히 조직사회의 관료화를 부채질하는 요소로 작용하는데서 그 병폐는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이런 병폐를 통쾌하게 지적해준 예를 들어보자.

어느 생산 공장에서 돌발사고가 일어나 수리를 하다 보니 잘 쓰이지 않는 부품의 재고가 모자랐다. 재고수준은 정확히 유지되고 있었지만 고장부위에 특정한 부품이 다량으로 소요되었기에 모자란 것이었다. 공장장은 구매부서에 발주하는 절차를 생략하고 직접 부품생산업체에 연락하여 긴급수리를 했다. 전 직원이 퇴근을 미루고 힘을 합쳐 수리를 마치고 난 뒤에 행정절차를 밟았다. ‘선조치 후절차’를 취한 것이다. 구매부서에서 항의가 들어왔다. 왜 절차를 무시하고 일을 처리했느냐는 것이었다. 공장장은 워낙 급해서 그랬다고 했다. 그러나 구매부서에서는 아무리 급하더라도 절차는 밟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 아니냐고 따졌다. 공장장은 정곡을 찔렀다.

‘절차를 밝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라면 재빨리 수리를 해서 생산휴지를 단축하는 것은 명제입니다.’ 위의 예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이런 경우는 조직체에서 수없이 일어나는 일이다.

형식과 명분의 개념을 벗고 몸을 드러내면 제도가 된다. 제도는 아무리 따져 봐도 일을 도와주는 기능을 담당할 뿐이지 일을 방해하는 기능은 아니다. 그러나 행정편의주의, 담당자의 편의주의로 흐르다보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관료주의다. 절차를 밟기 위해 일이 지연되고, 감사가 두려워 소신껏 업무를 처리하지 못하고, 규정집을 뒤져서 면책의 구실을 만들고, 전화 한 통화로 끝낼 수 있는 일에 문서가 오가고 하는 것은 모두 제도의 횡포와 허점에서 싹튼 병폐들이다. 형식과 명분의 무용론을 주장하자는 것은 아니다. 질서와 절차는 목적에 버금가는 부분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것이 내용과 현실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앞의 공장장 이야기를 현실에 맞게 구성해 보자. 절차를 생략하고 일을 마친 공장장이 뒤늦게 구매부서에 구매요구서를 보냈다. 구매부서로부터 전화가 왔다.

“공장장님, 설비사고로 고생 많으셨지요. 그러나 절차를 무시한 건 유감입니다.”

“아, 이거 대단히 미안합니다. 워낙 급한 일이라서 그렇게 됐습니다.”

“아무튼 잘 끝나셨다니 다행입니다. 앞으로 그 부품의 재고수준도 다시 검토해야겠군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전화라도 먼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의 경우와는 판이한 분위기가 될 것이다. 실익이 없는 제도나 규정만 시시콜콜 따지면서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풍토에서는 종업원들이 신바람나기 어렵다. 퇴근을 미뤄가며 수리작업에 땀을 흘린 직원들은 허탈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구성해본 경우에는 웃음과 격려 속에 절로 흥이 오르고 신바람이 날 것이다.


여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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