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 과수(寡守)로도 살아(박경리 63)

 

    서양 미망인은 기죽어 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예 제목으로 미망인은 유쾌했다고 선언한 희가극 <유쾌한 미망인>(The Merry Widow)은 재혼에서 맞닥뜨리는 익살스런 이야기를 담았을 정도였다. 우리 전래 인식과 개념은 전혀 아니었다. 남편 잃은 과부는 박복(薄福)과 불우(不遇)의 대표 상징이었다. 죽지 못해 살아가야 했던 인생이었다.

    맹자 이르되, 어진 정치는 반드시 먼저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곤궁 넷(四窮)”, 곧 홀아비()부모 없는 어린이()자식 없는 늙은이()와 함께 과부()를 돌봐야 한다고 타일렀다. 요즘은 남편 사별과는 달리, 뜻이 안 맞아 헤어진 젊은 이혼녀가 도처에 넘쳐난 끝에 돌싱’(돌아온 싱글)이라며 태연하다지만, 예전엔 결혼 초년에 남편을 잃은 젊은 과부는 죽지 못해 산다는” ‘청상(靑孀)’이라며 손가락질해댔다.

과부 신세타령

    박경리의 가정은 대를 잇는 곤궁이었고, 그 극상(極上)이었다. 전쟁 통에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 졸지에 가장(家長)이 되어 위로는 신랑에게 내침을 당한 소박대기 어머니, 아래로는 7년 옥살이 남편을 두었던 생과부 신세 딸을 거느린 기구함이었다. 당대 과수도 어려운 법인데 모녀 3() 곤궁은 사람 가족 운으로 이만한 불운이 드물었다.

    과수에겐 무엇보다 경제적 생존책이 화급(火急)과제였다. 생전에 문장이 되려면 한 우물을 파야 한다는 어떤 아버지가 있었다. “그런 아버지는 엄마가 서른넷일 때 어린 사 남매가 딸린 과부로 만들었다.” 그 맏딸이 사모(思母)의 동시(童詩)눈이 촉촉해져요를 적어 2021년 신문사 신춘문예에 뽑혔다. 경주에 사는 20년 생선장수 전력의 김광희(1957- )라 했다(조선일보, 2021.1.22.). 

종일 튀김솥 앞에 서서/ 오징어 감자 튀기는 엄마/ 밤늦게 팔에다 생감자 발라요.// 그거 왜 발라?/ 예뻐지려고/ 웃으며 돌아앉아요// 얼마나 예뻐졌을까/ 곤히 잠든 엄마 팔 걷어 봐요./ 양팔에 피어 있는 크고 작은 꽃들// 튀김기름 튄 자리마다/ 맨드라미, 봉숭아, 채송화./ 동생과 나를 키운 엄마의 꽃밭// 팔뚝에 가만히 얼굴을 묻으면/ 아릿한 꽃향기에/ 눈이 촉촉해져요.

    “종일 튀김솥 앞에서 팔뚝에 꽃밭을 가꾸던경우도 못되던 형편은 정말 눈뜨고 볼 수 없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갔었던 1960년은 도처에 동족상잔의 크고 작은 상처가 상존산재했던 시점이었다. 그래도 대학에 들었던 그 해 여름방학, 고향에서 선후배들끼리 군용텐트를 돛단배에 싣고 시가지 바로 건너편의 호수 같은 마산만()을 가로 질러 캠핑을 갔다. 한참 나중에 조선소가 들어선 곳이었지만 그때는 말 그대로 한적한 바닷가 모래밭이었다.

    거기서 일손을 빌렸던 집은 모녀 3인 식구였다. 초등학교 여학생이 언니라 부르던 여인은 20대 중반이고, 그 어머니는 50 전후로 보였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 여학생이 언니라는 부르던 이는 기실 그 엄마였다. 20대 전쟁미망인을 다시 시집을 보낼 참이었던지 모녀를 자매로 행세하게 만들고 있었다.

    박경리도 6.25 전쟁 직후의 과부 신세의 아픔을 적었다. “동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당시는 모두가 참 어려웠다. 그 중에서도 전쟁고아, 전쟁미망인들의 처지가 가장 참담하지 않았나 싶다. 과부라든가, 미망인이라는 호칭에 업신여김이 포함되어 있는 그 역사적 통념이 가셔지지 않았던 땅에서 살아가다보니 여러모로 괄시와 질시의 대상이 되곤 했다.

    괄시로 말하자면 남과 같은 품삯을 지불받고도 여자가 일을 부탁하면 일꾼들은 자존심을 상해하는 풍토였다. 그리고 질시의 비근한 예를 들자면 임자를 소유하지 못한 여자가 임자를 소유한 여자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과부란 인권 유린의 대상으로 예각(銳角)과도 같은 존재였단다. 해서 당신 처지는 어린 것과 노인을 두 팔에 껴안은 것 같은 심정만으로 가진 것 하나 없이 허허로운 벌판에 서야 했던 젊은 날, 옷깃을 세워도 목덜미에 찬바람이 기어드는 것만 같았던 어두운 젊은 날이었단다(”나의 문학적 자전,“원주통신, 1985, 87-103).

모녀의 구조적 경원

    과부 처지를 하대(下待)하다 못해 천시하던 시대였었는데, 여기에 맞선 가족의 내막은 안타깝게도 갈등의 내연이었다. 어찌 보면 유약한 사회조직에서 나타나기 십상인 역학(力學)과 닮아있었다. 조직 외부에서 충격이 올 때 그걸 되 물리치지 못하면 그 충격의 힘이 조직 내부로 향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알력과 갈등으로 비화한다 했다. 임란에 이어 호란을 겪는 사이에 사색당쟁은 더 가열되었고, 위정자는 인질로 잡혀갔던 백성들을 호로(胡虜)자식’, 또는 화냥(還鄕)이라 부르며 내쳤다.

    엄혹했던 생존환경에 던져졌던 과수집 식구의 고질적 내분이라면 무엇보다 작가는 당신 어머니를 태생적으로 경원(敬遠)함이었다. “자식을 점지해 달라고/ 외할머니가 부탁하여/ 덤불산제(山祭)를 올렸다는 것인데/ 그것이 영험으로 나타났던지라고 적었던 나의 출생서사시가 말해주듯,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게 애걸해서 자신을 낳게 했음이 경원의 단초였다

    이 불신의 불씨로 인해 살아생전 두 모녀 사이가 내내 삐거덕거렸음은, 누구의 잘잘못이기 이전에, 사람됨의 스타일 차이 탓이기도 했다. 정신을 높이 사는 딸이 보기에 어머니는 돈이 신앙이었다. 급기야 경원하기를 한 세상을 사는 동안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아본 일이 없다고 어머니를 싸잡았다. 이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점 혈손의 증언이 없을 수 없었다(김영주, “어머니”, 박완서 외,수정의 메아리, 1994, 175-183).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갈등을 보며 자랐다. 거의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는 삭막하고 황량한 나날이었다. 어린 나는 슬펐고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밉기까지 했었다. 어려서는 어머니가 글을 쓰기 때문이라고, 남달리 신경이 예민하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좀 자라면서 알게 되었던 것은 외할머니가 당신의 불행, 외로움을 어머니와의 갈등 관계 속에서 해소하고 계시는 것이었다.

    박경리의 가정사 내막을 추체험해보면 작가 가슴에 대못을 박았던 엄청난 비극은 그 어머니의 가슴 속에서도 못지않게 증폭되었을 것이었다. 6.25때 금이가 남편을 잃었음은, “사위는 장모 사랑이란 말대로, 그동안 남자 씨도 못 보았던 장모에겐 애지중지 사위의 잃었음이었으니 당신 피붙이를 잃는 참척에 다름 아니었다.

    뿐인가. 어른 남자 씨가 사라진 집의 남은 기쁨이던 아홉 살 어린 손자가 어느 날 갑자기 사고사를 당했으니 당신이 죽어야 했다는 처절한 울부짖음이었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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