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포한의 한풀이’ 봉순이(박경리 60)

 

   첫사랑 열병은 남녀 누구나 성장과정에 겪기 마련인 통과의례라 했다. 박경리처럼 일제 때 중등교육을 받았던 사람치고 일본 시인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 1872-1943)<첫사랑>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도 없었단다.

이제 갓 말아 올린 앞 머리카락/ 사과나무 아래로 보였을 적에/ 앞머리에 꽂으신/ 무늬 빗이/ 꽃다운 그대인 줄 알았습니다.// 상냥하게 흰 손을 내밀어주며/ 사과를 건네주신 그대에게서/ 연분홍빛 가을의 예쁜 열매로/ 처음으로 사랑을 알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내쉰 작은 한숨이/ 그대의 머리칼에 닿았을 적에/ 한없이 감미로운 사랑의 잔을/ 그대와의 연정에 기울입니다.// 과수원 사과나무 그 아래에서/ 언제부턴가 생긴 이 오솔길이/ 누가 만들어주신 자국인지를/ 물으시는 것조차 사랑입니다.

   『토지엔 첫사랑에 인병 들었던 또 한 사람의 주인공이 있었다. 성씨는 알 길이 없고 나중에 다스릴 ()()” ‘기화란 기명(妓名)으로 살았던 봉순(1891-1925)이었다. 최 참판집 침모의 딸이었다.

무당놀이뿐만 아니라 광대놀음도 혀를 내두를 만큼 기막히게 잘하는 봉순이는 가널가널하게 생긴 모습이나 성미도 안존한 편인데 어떤 내부의 소리가 있었던지 광대놀음, 무당놀이라면 들린 것 같은, 한번 들은 것이면 총기있게 외는 것도 그러려니와 이 아이의 목소리는, 매우 아름다웠다. 아마도 그것은 숙명적인 천부의 자질인 성 싶고 슬픈 여정의 약속인 듯도 하다.

이년아! 사당 될라고 이러나! 무당 될라고 이러나!” 봉순네가 머리를 쥐어박고 등을 치면, 김서방댁은 언제나 역성을 들고 나왔다. 그뿐 아니라 심심하면 곧잘, “어데 우리 봉순이 노래 한판 안 할라나? 우리 명창 소리 한분 들어보자.” 추겨만 주면 봉순이는 반짝반짝 눈을 빛내고, “몹쓸 년의 팔자로다. 이팔청춘 젊은 것이 님 이별이 웬일이냐아.” 목청을 뽑는다. 이럴 때 어미에게 들키면, “이년아! 용천지랄 그만 못하겄나,” 봉순이는 매도 맞고 야단도 듣는다(토지 11, 통권 1, 2002, 78-9).

    참판댁 암종으로 서희(崔西姬, 1893- )에게 동무해주며 자라는 사이 숫종이던 길상에게 마음을 품었다. 그 마음의 불꽃을 짐짓 몰라주는 체 하는 이를 향해 길상이는 눈도 없이까?”

(열여섯 봉순) 윤곽이 서희처럼 또렷하지 않다. 살결은 서희보다 고운 것 같고 여식답게 나붓나붓하게 생긴 얼굴이다. 아지랑이가 낀 듯 화사한 봄빛이 배어날 것만 같은, 연연하다, 풍정이 있다. 나긋한 허릿매는 한줌이나 될까”(토지 14통권 4, 2002, 215),

   하지만 최씨 일가가 간도땅 용정으로 솔가할 때 봉순은 일행에 끼이질 못했다. 첫사랑의 실패였다.

   여기서 좌절하지 말라는 언사가 미당의 ‘18이었다. 그는 산문으로도 첫사랑 타령이 많았다. 시작(詩作) 속의 여선생이 짝사랑이었던지 아니면 산문 속 여인이 첫사랑이었던지는 확인 못했지만, 아무튼 첫사랑에서 쓴 잔을 마셨다. 해도 사람이 지복(至福)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누리려 함은 과도한 욕심이고, 대신 석복(惜福)’에 자족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여기저기에 늘어놓았다.

   “적당한 선에 멈추는 절제의 복타령이 석복인 것. 이를 교훈 삼아 마음을 다스렸다는 말이었다. 일설에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라 했다. 첫사랑의 성공이 만복의 근원인 부부됨을 반드시 보장해주지 않을 공산이고 보면 시인의 권고엔 일리가 있었다.

   사람에겐 실패를 반전시키려는 본성이 있다. 이 맥락에서 산전수전의 선배들은 곧잘 훈수를 던진다. 이탈리아의 토르나토레(Giuseppe Tornatore, 1956- ) 감독의 자전 영화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 1988)> 한 장면도 그 기조였다. 영사기사 알프레도가 첫사랑 실연에 몸부림치는 젊은이 살바토레에게 활활 타오르긴 해도 사랑의 불꽃은 언젠가 꺼지는 법. 반드시 재만 남기 마련이니 그 열정이라면 하고 싶은 일에 매달리라고 간곡히 충고했다. 한을 승화 내지 초극(超克)하라는 말이었다.

봉순이 혹은 기생 기화

   봉순은 타고난 재질을 살려 소리를 배우려고 기방에 몸을 의탁한다. 일단 한풀이의 발전적 전개라 할만 했다. 첫사랑의 영역인지 굴레인지에서 한평생 벗어나지 못했던 월선과는 달리 봉순은, 평사리 동네 사람들의 시샘성 뒷소리는 접고는, “어디 한번 두고 보자!”식 전향적 대처였다.

   열두굽이 청승스럽게도 넘어가는구나. 봉순어매 딸 하나 두었지마는 사위는 뭇으로 생기겄네. 바느질쟁이, 목수 잘 사는 것 못 봤다마는 봉순어매는 딸 덕에 호강하겄구마(토지 11통권 1, 2002, 88).

, 하동 고을에 명기 하나 났고나. 인물이 절색이요 노래는 명창이라. 우리만 보고 듣기 아깝네. 하기사 양반 댁에서도 집안이 망하면 딸자식이 기생 나간다 하더라마는, 진작 그 길로 나가는 기이 좋겄구마(토지 14통권 4, 2002, 216),

   기실, 우리 현대사에서 등장했던 판소리 여창(女唱)들의 일대가 적어도 그 단초에서 봉순이 행각의 재래(再來)이기 일쑤였다. 인간문화재 반열에 올랐던 판소리 명창 박녹주(朴錄珠, 1905-79), 김소희(金素姬, 1917-95) 등이 기방(妓房)을 통해 소리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비슷하게 남의 소실인 전자를 짝사랑하다가 스토커수준으로 매달렸던 소설가 김유정(金裕貞, 1908-37)처럼, 기화 아니 봉순에겐 정석(鄭石)의 진한 연모가 있었다.

   애정 행각도 괄목상대할 만 했다. “꿩 대신 닭이 아닌, “닭 대신 꿩이었던가, 서희와 인연을 맺지 못했던 하동 이부사댁 도련님 이상현은 일본유학하고 돌아와 유랑하다가 같은 고향 출신이던 기생 기화와 몸을 섞었다. 거기서 딸 하나 양현(良絃, 1922년생)을 낳았지만 제대로 키울 형편이 아니었다.

다정다감했던 그 감성은 어디로 갔는가. 사무치게 깊었던 그 숱한 한은 어디로 갔는가. 너그럽게 이해하고 푼수를 알며 물러나 앉을 줄 알았던 그 조신스러움은 어디로 갔는가. 욕심 없고 거짓 없던 그 천성은, 아니 연연(軟娟)하고 그 풍정(風情)이 사내들 마음을 사로잡던 기생 기화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 그에게서는 양현을 향한 모성마저 없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이 여자를 이렇게 만들었나. 마약의 심연으로, 다정다감이 유죄요, 다정다감함의 단죄인가(토지 33, 통권 11, 2002, 296-7).

최초엔 길상을 잃었고, 다음엔 상현으로부터 버림받았고, 잃어버렸기 때문에 스스로를 버린 기화는 버림받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잃었고, 마지막 희망을 버렸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물에 대한 인식을 망각한 것이다(『앞의 책, 317).

   봉순은 결국 아편으로 망가진 몸을 섬진강 물에 던졌다. 나는 섬진강을 만날 때마다 그녀가 뛰어 들었다던 하동군 화심리(花心里) 물길을 찾아 의전생(醫專生)으로 자란 딸 양현이 흰빛보랏빛 과꽃다발을 던지던 장면(토지 51통권 17, 2002, 200-1)이 수주 변영로(樹州 卞榮魯, 1898-1961)의 명시 후렴과 겹쳐 생각나곤 했다. <논개>하고는 둘이 한때 진주를 오갔던 기생 동업이었던 사실 말고는 더 말할 만한 서로의 인연이 없었던 데도 뜬금없이 그랬다.

    “!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 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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