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포한의 포로 월선이(박경리 59)

 

   소설은 사람이야기다대하소설이란 이름답게토지의 길고 긴 이야기 속엔 수 많은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1부에선 지주와 작인 등 전통시대 농촌공동체 구성원들이 주역들이고, 2부엔 상인독립운동가가 보태지며, 3부에선 운전수의사교사문필가신여성 등 일제 치하에서 생겨난 새로운 직업군들이 등장한다.

    어느 삶이든 책이 한 권 안 될 인생은 없다했다세상에 하나같이 굴곡지고제가끔 기구한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은 없다던데 소설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특히 그랬다삶이 그렇게 제각각일 지라도 예외 없이 하나같은 공통점은 있었다대소고하귀천 간에 한()에 절은 삶을 살아냈음이었다.

첫사랑에 인병 들어

    그렇다면 아주 드물게 영어 쪽은 은수저(silver spoon)’라 부르고 우린 더 높여 금수저라 일컫는경상도 지방말로 포시랍게’ 한 평생을 살다간 사람도 한 많은 삶이었던가박경리의 해석이자 신념은 모두가 그렇다는 것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기 마련인 생명체의 숙명 때문이라 했다이 발상은 궁극엔 나지 말거라 죽기가 고통이다죽지 말거라 나기가 고통이다(莫生兮其死也苦 莫死兮其生也苦)“던 원효대사의 타이름에 맞닿는다작가가 이 말을 직접 옮겨 적기도 했다. 생명을 받지 말아라다시는 나지도 죽지도 말아라“(토지 2부 1통권 5, 2002, 201).

    본질이자 원론은 그러할지라도 작가는 일상의 실감 수준에서도 한을 말하고 있었다우리 일상에서 한은 비근한 말이다간단히 풀면 사람 삶이 구하고자 하는 바의 차질에서 생긴 마음의 응어리작가가 구사했던 말에 인병(人病)든다는 말도 그런 가락이다아마 경상도 쪽에서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지 싶은데, “사람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마음 병이 인병이다.

   『토지엔 인병이 들어 죽어갔기에 애독자들의 안타까움 한숨소리마저 들렸던 애련의 주인공으로 누구보다 먼저 떠오르던 이가 있었다. ‘미인박명의 대명사 공()씨 성의 월선(月仙, 1868-1917)이었다.

    어린 날그녀는 한 살 터울들인 소작인 집안 이용(李龍, 1866-1930), 참판댁 최치수(崔致修, 1867-98)와 더불어 한 마을에서 상하를 가리지 않던 소꿉동무였다그 사이 아랫것들 끼리 눈이 맞았다용과 월선이 서로 첫사랑이었다.

    그런데 첫사랑이라면 그 화신은 아무래도 감성의 주인공들인 시인이기 쉬웠다과연 우리 현대시학의 천재는 첫사랑에도 무척이나 조숙했던 천재였다. <첫사랑의 시>가 바로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 1915-2000)의 노래였다제목은 첫사랑이지만 사실은 짝사랑이지 싶었는데 아무튼,

초등학교 3학년때나는 열두살이었는데요./ 우리 이쁜 여선생님을너무나 좋아해서요./ 손톱도 그분같이 늘 깨끗이 깎고,/ 공부도 첫째를 노려서 하고,/ 그러면서 산에가선 산돌을 주워다가국화밭에 놓아 두곤날마다 물을 주어 길렀어요.

    용과 월선의 첫사랑 싹은 천재 시인보다 더 빨랐다. “아마 그때 월선이는 일곱 살쯤 되었을 것이다용이는 꿈을 꾸듯 어린 날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토지 1부 4통권 4, 2002, 129-30). 그 사랑의 싹을 그린 정경이 수묵화나 수채화의 담채(淡彩)처럼 아련했다.

가만히 있어내가 저눔을 잡을 테야.”

치수는 소곤그리며 두 팔을 벌리고 살며시 발을 떼어 놓았다얼굴을 빨갛게 상기시키며 계집아이는 꿩이 있는 것을 모르고 치수의 거동이 수상하여 그 모습에 눈을 팔고 다가오다가 그만 돌부리에 채여 넣어졌다그와 동시 재빨리 기기 시작한 꿩은 푸드득 날아올랐다.

이 계집애죽여버릴 테야!”

치수는 악을 쓰며 엉겁결에 일어선 계집아이에게 달려가 주먹으로 가슴을 쥐어박았다계집아이는 다시 뒤로 나자빠지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죽여버릴 테야죽어버려!” 연신 악을 쓰며 발길질이다.

용이는 울면서 치수의 팔을 잡았다. “이놈아넌 뭐야왜 울어!”

이번에는 용이 가슴을 쥐어박았다용이는 우는 대신 하하하고 웃었다.

상놈이 우찌 양반을 때릴 것꼬.” 타이르던 어미 말을 분하게 여긴 용이였었는데 계집아이 대신 맞는 것이 기분 좋았다.

넘볼 수 없었던 사랑

    하지만 월선이 무당의 딸이라고 용이 집안이 결사반대하자 둘의 결합은 좌절되었다승려광대기생 등과 함께 무당은 조선시대 신분계층에서 맨 아래 여덟 천민 곧 팔(八賤)에 속했다. “하얀 피부빛에 머리칼이 다소 노르스름했던 외모의 월선이 조신한 여성이었음에도 에미가 무당이믄 딸년도 무당이지오리 새끼 물로 가지 어디로 갈꼬?” 뒷말을 들어야 했다그렇게 무당은 딸도 차별을 받았던 천형(天刑)의 연좌제였다혼사가 어긋나자 모녀가 함께 울부짖었다.

이 미친년아이 기든(기막힌)년아그라믄 태일 데 태어나지 와 무당 문전에 떨어졌다노미친년아와 내 간장에 못을 박노!” 괄괄하고 우스갯소리 잘하고 사내같이 잔정이 없는 월선네는 딸의 등을 치면서 그러나 그도 울었다.

에미 근본 모르는 데 가서 니나 팔자 치리하고 살아라오르지 못할 낭구 치다보지도 말라캤다나이 많으믄 어떻노다리 병신이믄 어떻노니 섬겨주고자식 낳거든 노리에 늘이나 보고 살아라아예 에미 찾을 생각 말고내사 살다 살다 신풀이나 하고 살다 살다 죽으믄 고만이다.”(토지 1부 1통권 1, 2002, 234)

    월선이 하릴없이 늙은이와 혼인했다가 헤어지곤 평사리 고향 가까운 읍내장터에서 국밥집을 꾸렸다용이 장터에 나오는 것은 그녀를 만나려는 뜻이 컸다둘은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만나는 순간마다 새롭고 전부였고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고기다리는 동안의 몸서리치던 고통은 아주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눈물겨운 사랑이었다첫사랑의 실패가 포한인데도 그 첫사랑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일생이었다.

   “아아내가 무신 소용이고법으로 만낸 사람이 제일이고 이자는 자식 낳아준 사람이 제일 아니가”(토지 1부 3통권 3, 2002, 271). 전자로 강청댁후자로 임이네를 부럽게 바라보는 처지로 월선은 결국 첫사랑 남자의 정부(情婦)로만 살아내야 했다.

    월선의 그런 일대에 대해 특히(?) 연민의 정을 느꼈던 독자는 단연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1999년 6월 9현직 대통령으로 토지문화관 개관식에 참석해서 축사를 했다비서가 적어준 의례적인 말이 아니었다.토지를 옥중(獄中)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개인사를 먼저 꺼내고는 월선이가 죽어가는 장면이 가장 눈물겨웠다 했다나도 전적으로 동감이었고나를 따라 작가를 만나봤던 적 있었던 여식 하나는 이 대목에서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대성통곡했다고 미국에서 전화로 말해왔다.

방으로 들어간 용이는 월선을 내려다본다그 모습을 월선은 눈이 부신 듯 올려다본다. “오실 줄 알았십니다.”

얼굴 가까이 얼굴을 묻는다그리고 떤다머리칼에서부터 발끝까지 사시나무 떨듯 떨어댄다얼마 후 그 경련은 멎었다이불자락을 걷고 여자를 안아 무릎 위에 올린다쪽에서 가느다란 은비녀가 방바닥에 떨어진다.

우리 많이 살았다.” “.”

내려다보고 올려다본다눈만 살아 있다월선의 사지는 마치 새털처럼 가볍게용이의 옷깃조차 잡을 힘이 없다.

니 여한(餘恨)이 없제?” “없십니다.‘

그라몬 됐다나도 여한이 없다.”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 눕힌다.

용이 돌아와서 이틀 밤을 지탱한 월선은 정월 초이튿날 새벽에 숨을 거두었다.

어이구우니가 이서방을 기다리노라어이구우이 불쌍한 것아!”(토지 2부 4통권 8, 2002, 226-234쪽 발췌)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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