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토지』, 그 출발 무대(박경리 51)

 

  『토지는 농촌마을의 추석 명절 풍경 이모저모 묘사가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그 농촌. 애독자들이 작가 박경리라 하면 흙냄새가 느껴진다 함도 그 때문이었다. 열강이 조선을 노리고 한반도로 몰려들던 우리 근대사 초엽, 그 격랑의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민초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대하소설의 제목 그 자체가, 또는 대작 집필의 막바지에서 창작의 고통도 이겨낼 방편으로 원주 땅에서 매달렸던 텃밭 농사가 풍기던 흙냄새였다.

  『토지의 주무대인 평사리 상평마을 한 귀퉁이에 지금 박경리문학관이 서있다. 한 방송사가 드라마로 만들 때 조성했던 소설의 대표 주인공 최 참판 집 세트장에 덧붙였던 곳인데, 그걸 건사하게 이전확대발전(2016)시켰다. 그 한옥 문화관 마당에는 소설의 유명 구절을 새긴 오석(烏石) 석판도 깔렸다. 이를테면 원고지 모양의 석판 하나는 섬진강과 해란강이 왜 다를까하고 생각한다. 아름답기론 섬진강 편이다. 조촐한 여자같이, 청아한 소복의 과부같이, 백사(白沙)는 또 얼마나 청결하였는가”(토지3, 통권 12, 나남, 85-6)를 새겼다. 고장 사랑의 글귀에 더해 박경리 문학의 현창을 위해 쏟은 지극정성이 단박에 느껴졌다.

하동의 박경리문학관

  문학관을 찾는 언덕길 좌우에 기념품 가게가 줄지어 들어섰다. 역을 중심으로 먹고 사는 역세권(驛勢圈)처럼 문학관에 기대는 상가들의 집적(集積)을 두고 관세권(館勢圈)이란 말도 생길 법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직전인 2019년 한 해만도 군인경찰경로 등의 무료입장객을 제외하고도 359,175 명이나 찾았다. 대충 하루 1천명이 이 외진 곳의 문학관을 찾았다는 말이었다. 가까이 비교하면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세워진 역시 대하소설로 유명세를 탔던 태백산맥문학관은 2008년 말 개관 이래 12년째 누적 관람객이 70만 명, 하루 평균은 약 170명이었다(AI 타임스, 2020.3.26).

  전국에 문학관이란 간판을 붙인 곳이 적지 않다. 높은 문학적 향기에도 불구하고 경북 내륙의 대표적 오지인 영양군 주실마을에 자리한 청록파 시인 조지훈(趙芝薰, 1920- 68)의 지훈문학관을 찾는 이는, 내가 가본 바로, 가뭄에 콩나기다. 통영이 자랑하는 청마 유치환(靑馬 柳致環, 1908-67)시인을 기리는 청마문학관은 입장료를 받기 시작하자 관람객이 크게 줄었다. 좀 오래전인 2013년 청마문학관의 한 해 관람객수는 약 3만 명, 달로는 25백 명 수준이었던 것이 입장료를 받기 시작하자 2천명 아래로 줄었다(한산신문, 2014.2.14).

  유족의 반대로 통영의 박경리기념관은 무료 관람이지만 하동의 박경리문학관은 입장료를 받아왔다. 그럼에도 하루 천명의 관람객은 우리 국민들의 박경리와토지에 대한 높은 평가와 뜨거운 관심을 말해주는 지표가 분명했다. 과연 이 땅에서 하루 1천명이 한 작가의 문학관을 찾은 적이 있었던가. 과문인지 몰라도, 한국문학사상 초유의 일이 아닌가 싶었다.

  특히 방문객 중 전국각지에서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절반을 넘는다 했다. 문학관 운영을 오래 책임져온 시인 최영욱(崔榮旭, 1957- ) 관장 말로, 이 시대 중고생들은 가장 가고 싶은 수학여행지로 단연 박경리 문학관을 으뜸으로 꼽았단다. 국민의 문화체험이 이 나라를 대표하는 작가에 대한 존경의 표시를 담은 문학관 탐방으로 변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래저래 경주 그리고 부여를 수학여행지 지존으로 알았던 나 같은 흘러간 세대의 그 시절과는 완전 딴판이 되었다.

  ‘박경리문학관 동네입구엔 박경리토지문학비입석이 우람하게 서 있다. 높이가 3미터나 됨직한 게 여수 오동도 유원지 입구에 세운 若無湖南 是無國家(약무호남 시무국가,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없었다)”는 이순신의 한자 어록비에 버금가는 위용이었다. 생전에 이것을 보았던 작가가 너무 크다. 반으로 줄이면 좋겠다고 말했다지만 현지 유림들이 무슨 소리냐! 하자 당국도 작가의 청을 들어주지 못했다. 평사리 주민들 사이에선, 최 관장의 말로,토지를 여러 차례 읽었음을 자랑하는 정서도 생겨났단다. 현지 사람의 지극한 사랑이 보태진 끝에 작가를 하동 출신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도 꽤나 많이 생겼다.

  지나친 사랑은 뜬소문을 사실인양 믿게 만들기도 했다. 악양면 평사리와 인접한 정서리(亭西里)화사별서(花史別墅)’조 부자옛집이 일부 남아있다. 조선 개국공신 조준(趙浚, 1346-1405)의 직계손으로 화사라는 아호를 가졌던 이가 16년에 걸쳐 1918년에 완공했단다. 산골동네에서 보기 드물게 당당한 건축물인데다 조선시대의 풍류를 살린 조원(造園)수법이 잘 적용됐다 했다.

  그 집이 소설토지의 최 참판집의 모델이란 소문이 퍼져나갔다. 진주고녀시절 하동 친구를 찾아왔던 작가가 그런 고택이 있음을 알고 소설을 구상할 무렵에 이미 마음에 설정해 놓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함께였다. 이 소문이 날개를 달고 달았다. 고녀시절, 방학 때 하동을 찾아왔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건 의자매를 맺었던 하동 언니와 함께 지내려함이었다. 그리고 2년 선배 언니는 조 씨가 아니라 이 씨였다. 하여튼, ‘조 부자집을 최 참판 댁 모델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적어도 작가를 가까이 만나온 사람들에겐 당신 생전이나 사후나 금시초문이었다.

세트장이 랜드마크로 성큼

  사랑이 귀여운 오해를 낳는다지만 제대로 알 것은 알아야 한다. 놀랍게도 작가는 지도 라도 한 장 들고 제대로 한 번 찾아와 본 적도 없었던 악양면 평사리라 했다. 1968년인가 불화(佛畫)로 졸업논문을 쓰고 있던 당신 외동딸이 평사리에 있는, 쌍계사의 말사인 한산사의 대웅전에 걸린 국보급 탱화(경남 문화재자료 제286)를 보러 왔고, 그때 동행했던 작가가 잠시 악양 들판을 멀찌감치 바라보았을 뿐이라 했다. 그럼에도 어째서 소설 주요 무대가 경상도 서쪽 끝자락 평사리였던가. 언젠가 작가로 부터 직접 들었다.

토지 무대를 평사리로 잡은 것은 전라도 사투리를 잘 몰라서였다. 내가 어머니 혀끝에서 익힌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기 좋아서였다. 경남 쪽은 진주라 해도 천석지기가 고작이었던지라 무대를 전라도 쪽으로 붙이게 되었다. 하동을 지나다 보니 악양(岳陽)이 넓음을 알았다. 게다가 소설의 전개상 중요 거점이 될 지리산이 가깝고 해서 평사리로 정한 것이다. 나중에 지도를 보고 일대를 공부했다.

  나중에 따져보니 지명도 예사롭지 않았다. 우리 선조들이 소문만 듣고도 동경해 마지않던 중국 명승에 소상팔경(瀟湘八景)이란 게 있었다. 판소리 <심청가> 주요 대목 하나일 정도로 마치 이 땅의 것인 양 소주(蘇州) 일대의 경관을 동경했다. 그 하나가 平沙落雁(평사낙안). 넓은 평평한 모래밭이나 들판에 기러기가 내려앉음인데 이 모양의 명당 터를 말함이었다.

  해서 예로부터 평사리라 이름붙일 수 있는 땅을 귀하게 여겼다. 평탄한 들판이 농경사회의 선호였기 때문이었다. 경북 경산시 진량읍에도 전북 정읍시 산외면에도 평사리가 있다. 산골인데도 평사리란 이름의 마을이 있는 것은 거기에 평평한 들판이 들어앉았다는 말이었다. 그 가운데 악양면 것이 가장 유명세를 탄 것은 순전히 소설 토지덕분이었다. 그 고마움의 표시였던가 199410, 원주의 토지완간기념식에 평사리 이장도 참석했다.

  평사낙안의 특징은 발복(發福)이 한꺼번에 금방 이루어지지만 망하는 것도 순식간이란 일설도 있었다. 기러기는 철새로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데, 한 마리가 내려앉으면 수십 마리가 떼를 지어 내려않는다. 그러다가 한 마리가 날아가면 또 떼를 지어 날아가 버린다. 이 지령(地靈)이 예감한 대로 소설의 주인공인 만석꾼 집안 최 참판 댁이 몰락의 길을 걸었고, 마침내 식솔들을 데리고 저 멀리 북간도 용정으로 떠났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무단전재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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